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78화 (578/605)

578화. 장기

모나카 왕국 최북단에 위치한 팔레모 시티.

고대 왕국 시절부터 인어해 교역으로 번성한 항구 도시로 북부의 종교와 남부의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곳이었다. 옛 신의 상징물이 걸린 원형돔 교회, 형형색색 직물이 주렁주렁 걸린 회백색 시장 건물 등이 이국적이었다.

“왜 저렇게 지은 거지?”

“글쎄? 자원이 남아도니까?”

각지고 뾰족하게 짓기를 좋아하는 북부 사람들이 볼 때 이상하고 아름다웠다. 저들이 북쪽에 와서 크고 높은 건물을 보면 기이하고 화려할 것이다.

“고용주가 왔다! 무적무패 왕이 도착했다!”

낯선 도시지만 낯익은 것도 제법 있었다. 북방식 수염도끼와 숏스피어로 무장한 용병들이 그러했다. 바이킹 헬멧과 캐틀 햇을 쓰고 있어 누가 봐도 볼탄 반도 출신이었다.

로벨은 선교에서 선수갑판으로 이동하며 어수선한 부두를 보았다. 무장 갤리어스 4척이 볼탄 반도의 상징이 된 로드릭 가문 깃발을 달고 입항하니 자잘한 배들은 알아서 자리를 피했다. 위세를 부리는 것 같지만 덕분에 편히 입항했다.

부두가 가까워지자 힘 좋게 생긴 선원이 밧줄을 힘껏 던졌다. 돛은 진작에 접어 묶었고, 노도 슬금슬금 구멍으로 사라졌다. 부두관리인이 밧줄을 말뚝에 감으니 선원 스무 명이 어기영차 당겨 바짝 정박했다. 널빤지 한 장으로 넘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허풍쟁이가 갑판 난간에 올라 크게 소리쳤다.

“볼탄 반도의 왕! 로벨 로드릭 폐하시다!”

그 한 마디로 팔레모 항의 세력이 구분되었다. 모자를 벗거나 바이저를 올려 경의를 표시한 것은 먼저 와 자리 잡은 조루아 랭스터 경의 용병부대고, 웅성거리며 물러나는 것은 팔레모 시티의 자유민들이며, 굳은 얼굴로 남해 3국 특유의 무기를 꼬나드는 자들은 시티 가드와 시 의원의 사병들이었다.

“흐음...”

로벨은 천생 기사답게 무기에 집중했다. 칼날이 완만하게 휘어진 시미터와 머리가 여러 개 달린 구르즈(Gurz,인도와 중동의 철퇴)로 무장하고 있었다. 천과 가죽으로 된 갑옷을 즐겨 입는 더운 나라 용병다웠다.

“팔레모 시의원장 미켈라 니칼도로입니다. 이곳의 모든 시민을 대신해 북쪽에 귀인을 환영합니다.”

로벨은 세 번째 세력에 집중했다. 로벨 뒤로 속속 상륙하는 울프 용병단과 조루아 랭스터 경의 용병들이 모이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그 숫자가 500명에 이르러 부두가 비좁을 정도였다. 시의원장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긴장할 것 없소. 본인과 볼탄 반도의 용사들은 모나카 왕국의 진정한 지배자를 돕기 위해 왔소. 그대들이 우정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싸울 일은 없을 것이오.”

시의원과 시민은 무적무패 왕이 누구 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지배자’를 따지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저희 팔레모 시민은 엠마누엘 왕가의 좋은 벗으로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충성을 바치고 있습니다.”

통속적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로벨도 통속적으로 대답했다.

“벗의 벗은 곧 나의 벗이오. 그대들의 환대에 감사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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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모 시의회관에서 커다란 잔치가 벌어졌다.

소와 양을 쉰 마리나 잡고, 와인을 스무 항아리나 꺼냈으며, 야만의 땅 야만인이 즐겨 먹는다는 과일과 과일주, 정체 모를 발효주도 한 상 가득히 나왔다. 왕의 벗이자 시민의 벗, 무적무패 왕을 환영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았다는데, 정말 자발적이면 ‘이거 먹고 사고 치지 마라’ 의미일 것이다.

로벨은 접대를 거절하지 않았다. 긴 항해를 마친 만큼 사람과 말 모두 휴식이 필요했다.

“잉그비아 왕립해군이 외해에서 시위 중이면, 마르키시오 공작과 에르나 왕국군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겠군.”

병사가 쉰다고 지휘관이 쉬지는 않고, 몸이 쉰다고 머리가 쉬지는 않았다. 로벨은 흙냄새가 나는 모나카 왕국산 와인을 홀짝이며 정보를 수집했다. 미켈라 시의원장이 호른 경과 애꾸눈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내일 당장이라도 라베노 시티로 진격할 것처럼 굽니다만, 그 내일이 영 올 것 같지 않습니다.”

기사와 용병이 동시에 피식- 웃었다. 거점항을 잃으면 고립되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잉그비아 왕국을 끌어들인 보람이 있군요.”

“아, 그거 비밀이야. 여기서 이야기하지 마.”

공공연한 비밀이라 미켈라 시의원장은 놀라지 않았다. 호른 경이 재차 물었다.

“알비치 후작은 어떻소?”

“그쪽도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알베니아 왕국 용병들이 국경에 포진하여 몸을 사리고 있지요.”

“하지만 육지와 바다는 다르지.”

로벨은 역시 흙냄새 나는 와인을 치웠다. 이안 선장 말이 맞았다. 에르나 왕국 와인은 고급 와인이었다.

“에르나 왕국과 아이란드 왕국도 다르고.”

거점‘항’보다 거점‘요새’가 지키기 수월하다. 그리고 알비치 후작의 뒷배인 아이란드 왕국은 바다를 건너온 에르나 왕국과 달랐다. 국경이 맞닿은 인접국이었다. 국내로 들어와도 고립 당할 위험이 적었다. 호른 경이 적극 동의했다.

“그럼 알비치 후작이 먼저 행동하겠군요.”

“아니오. 그렇지 않소.”

호른 경이 의아한 듯 부스럭 소리를 내었다. 로벨은 미켈라 시의원장에게 눈짓했다. 제후들이 날뛰는 혼란한 시절에 자치권을 지켜낸 수완 좋은 시의원장이었다. 척하면 척척이었다.

“숙소에 불편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편히 말씀 나누시지요.”

주인 노릇 하기 힘든 주인이 자리를 떠났다. 로벨은 가족 같은 측근만 남아 한결 편하게 자세를 바꿨다. 그러나 호기심이 가득 찬 호른 경과 애꾸눈은 그러지 못했다.

“알비치 후작이 아니면 누구입니까?”

“공작파와 후작파, 에르나 왕국과 아이란드 왕국을 제외하고 하나 더 있잖소.”

“예? 누가 또...”

애꾸눈은 멍청한 꼬마 양치기 이야기를 떠올렸다. 양 위에서 양 숫자를 세고 한 마리가 빈다고 깜짝 놀란 이야기였다.

“공왕 폐하께서 선공하실 생각이시군요.”

멍청한 양치기가 된 호른 경이 자신의 이마를 때렸다. 로벨은 전쟁, 전략, 전투, 전술에 있어 진정 천재였다.

“외부인이고, 지원군이니, 우선 수도로 가서 안토니아 왕자와 만날 거라 생각할 것이오.”

“그게 상식적인 행동이긴 하지요.”

허락 없이 멋대로 남의 나라를 휘젓고 다니는 것은 정치적으로 손해고 군사적으로 낭비였다. 아니, 그 이전에 애꾸눈 말마따나 상식적이지 못했다.

“전략의 목적은 빠른 승리고, 전술의 기본은 적을 속이는 거야. 상식 파괴만큼 효과적인 게 없어.”

후대 지휘관에게 수많은 영감을 준 어록이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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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용병단은 명실상부 볼탄 반도 최강이었다. 어쩌면 북해 4국과 남해 3국을 통틀어 유라피아 대륙 최강일지 모른다.

그런 울프 용병단의 장기를 꼽으면 대여섯 가지가 바로 나온다. 상시 유지하는 1천 이상의 병력, 평균 이상의 크로스보우맨 편제, 높고 안정적인 급료, 무적 '무패'의 명성 등등. 그러나 전적이 말하는 울프 용병단의 진짜 장기는 따로 있었다.

“이런 미친 행군을 또 하다니!”

“차라리 배를 탈 때가 좋았지...”

로벨의 전과를 비웃을 때 흔히 하는 말이 ‘빈집털이’였다. 그러나 빈집을 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주인이 알아채지 못하게 은밀하거나 알아도 대응하지 못하게 신속해야 했다. 그런 로벨의 빈집털이를 10년 넘게 보좌한 것이 울프 용병단이었다.

울프 용병단의 행군은 은밀하고 신속했다. 1개 소대(약 20명)를 2개 분대로 나누어 정찰 겸 길잡이로 번갈아 보내는데, 이상이 있으면 다시 2개 부분대로 나눠서 5명은 남고 5명은 우회로를 찾았다. 이들 분대원이 하루에 가야 할 거리가 최소 30마일이며, 우물 2개 이상의 수원지를 찾지 못할 경우 그 이상도 나아갔다.

거인이 두 발을 바삐 놀려 걷는 느낌인데, 체력이 약하고 전투 의지가 없는 농민병 부대는 흉내 낼 수 없는 속도였다. 아니, 전문가로 이루어진 용병부대도 어지간하면 앞만 보고 나아가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체력이 떨어졌을 때 기습당하면 큰 피해를 입는 것은 고대 장군들 일화를 가져오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벨은 기습을 걱정하지 않았다.

“이번 작전은 적이 예상 못하고 대응 못할 것을 전제로 시작한 거야. 우리 이동 경로를 눈치 채고 요격 나오면 실패한 거지.”

“그러니까 도박... 인가요?”

로벨은 고개를 가로젓고 자신의 투구를 툭툭 쳤다. 원래라면 위험을 감수한 도박이지만, 로벨에게는 보험이 있었다. 수 마일 범위를 스캔할 수 있는 신수 파나케아의 투구였다. 착용자가 약간의 피로를 감수하면 측면을 내어 줄 위험은 없었다.

전문성에 사기성이 더해지니 이동속도가 느릴 수 없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팔레모 시티를 떠나 닷새 만에 동부 국경도시 파레초 시티에 도착했다. 알비치 가문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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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부모를 여읜 조카딸을 앞세워 허울만 남은 엠마누엘 왕가를 장악하고 왕국의 제일 가는 귀족, 나아가 알비치 왕조의 시조가 될 거란 과대한 야심을 가진 42살의 키 작은 제후 조반니 데 알비치 후작이 외쳤다.

“누, 누가 왔다고? 누구?”

누대에 걸쳐 알비치 가문에 충성한 기사는 한 치 오차 없이 다시 보고했다.

“볼탄 반도의 로벨 로드릭 왕이 군사를 이끌고 이곳 파레초 시티를 공격 중입니다.”

“그, 그, 그 자가 여기를 왜 와! 아니! 그보다 군사가 얼마나 되는데 내 도시를 공격해?!”

“셋째 파울로 왕자를 지원하기 위해 왔을 겁니다. 현재 서문을 장악한 군사는 500명 내외고, 후속부대가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첫째 ‘반푼이’ 왕자는 왕좌에 앉을 자질이 없으니, 둘째 안토니오 왕자를 다음 왕으로 추대하고, 그 공로와 외척 신분으로 권력을 장악한다는, 음흉하지만 뻔히 보이고 단순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있는 계획이 복잡한 국제 정세에 틀어지고 있었다.

“오, 오백 명이라고?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진짜 오백 명 맞지?”

“그보다 조금 적을 겁니다.”

조반니 알비치 후작은 생각보다 적은 적의 숫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원이 중무장한 기사와 용병이란 것을 알면 쉬이 안도하지 못하겠지만, 아무튼 숫자는 만만했다.

“서문 쪽 상황은?”

“도시 진입을 막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현재 외곽 구역의 붉은 모래 요새(Citadel)를 공격 중입니다.”

“이런 머저리들! 성문 수비대는 뭘 한 거야!”

첫 번째 방어선이 어이없이 뚫렸지만, 도시를 장악하려면 최소 2개 요새를 더 장악해야 했다. 로드릭 시티로 말하면 늑대성과 울프 용병단 요새 비슷했다. 실제 전쟁사를 보면 도시 외벽을 넘고도 내성과 요새를 함락시키지 못해 철수한 사례가 흔히 있었다. 즉, 알비치 후작에게 희망이 남아있었다. 상대가 반신(半神)의 경지에 이른 무적무패 왕이 아니면 말이다.

“보, 보고합니다! 보고합니다! 붉은 모래 요새에 로드릭 왕 깃발이 올랐습니다! 붉은 모래 요새가 함락되었습니다!”

도시 성문이 뚫린 지 47분 만의 일이었다. 지금 막 보고를 받는 알비치 후작에게는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기둥을 짚었다.

“옛 신이시여...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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