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71화 (571/605)

571화. 결혼

어린 집사가 울상으로 페닝 상자를 꺼냈다. 금고 서랍에서 책상까지 세 걸음도 안 되는 거리를 옮기는데 한세월이었다. 로벨이 대신 받으려 하자 움찔하며 피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며? 어서 리스크 내놔!”

“흐아앙-! 내 비자금이-!”

“비자금 같은 거 만들지 말라고!”

어린 집사의 고충도 이해되었다. 시가지 공사에 많은 예산이 사용되어 가을 추수까지 재정이 빠듯했다. 이번에 이안 선장이 가져온 교역품을 처분하면 어찌어찌 버틸 수 있겠지만, ‘버틸 뿐’인 게 재정 담당자의 고통이었다.

“난 한 번만이라도 행복하고 싶은데! 왜! 왜 행복할 수가 없어!”

“이만하면 행복하지. 뭘 더 바라는 거야?”

가장 큰 고통은 보스가 아무 생각 없다는 것이다. 작은 집사를 쥐어짜면 페닝이 나오는 줄 아는 게 분명했다. 근데 진짜 나오는 게 문제다.

“페르젠 가문의 골칫거리 용병이 480명이야. 울프 용병단 남군(南軍)에서 자원자를 100명 받고, 기사와 맨앳암즈를 100명 정도 모집할 거야.”

“그럼 약 700명인가요?”

실전경험이 있는 직업 용병 700명이면 엄청난 전력이었다. 여차하면 울프 용병단을 중축으로 2차 파병이 가능하니 모나카 왕자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페르젠 가문 기사가 동참하면 그쪽에 지휘를 맡기고, 아니면 몰트 도너반 경이나 조루아 랭스터 경에게 맡길 거야.”

“그래도 돼요? 믿을 수 있어요?”

“응. 파울로 왕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로벨은 파울로 왕자의 능력을 믿었다. 그리고 무슨 공작, 무슨 후작의 야심을 믿었다. 그들도 로벨과 볼탄 반도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하죠. 으... 그래도 다행이네요.”

“뭐가?”

“공왕 폐하가 안 가시니까요.”

어린 집사 말에 펄프 대장, 페리 행정관, 마녀 키르케까지 모두 끄덕였다. 사람들은 무적무패 왕이 불사신이고 승리의 보증수표인 줄 알지만, 로벨을 가까이서 본 측근들은 로벨도 피 흘리고 눈물짓는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보통 사람보단 살가죽이 두꺼워서 잘 안 흘리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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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왕이 인어해 너머 모나카 왕국으로 군대를 파병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민들의 반응은 ‘그럼 그렇지’와 ‘오래 참았다’로 요약할 수 있었다. 로벨을 피에 굶주린 전쟁광으로 여기는 게 괘씸했다.

그래도 여론은 긍정적이었다. 전쟁을 핑계로 세금을 올리지도 않고, 치안을 담당하는 울프 용병단을 줄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이겨 모나카 왕국을 정복하면-소문이 그렇게 났다- 동방대륙의 특산품 후추, 비단, 도자기 따위가 저렴해질 거라 기대도 있었다.

“남해 3국에는 주인 없는 땅이 수백 곳이라는데?”

“이교도와 싸움이 수시로 나는 곳 아니오?”

“옛 신께서 가호하거늘 그깟 이교도가 무서운가.”

올해에는 전쟁도, 마상시합도 없다며 낙담한 기사들과 기사들의 무구를 찍어내는 공방 장인들과 그들 사이를 중계하는 사채업자들은 신이 났다. 칼, 창, 화살, 갑옷, 마갑, 편자 등이 매일 수백 개씩 쏘아져 나와 로드릭 항구에 쌓였다. 갑작스러운 물류 증가에 선원과 짐꾼이 의문을 표시했다.

“고작 700명이 가는데 이렇게 많이 필요하우?”

“전쟁 무기는 원래 소모품이오.”

그것도 그거지만, 인어해 남쪽에서는 볼탄 반도 기사들이 쓰는 직검(直劍)과 판금 갑옷이 귀하다는 소문이 퍼진 탓이다. 그 출처는 당연히 어린 집사였다.

“아, 거짓말은 아니잖아요? 거기 장인들한테 웃돈 주고 살 바에 미리 챙겨 가면 좋죠.”

전쟁 비용을 한 푼이라도 회수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시가지 공사, 성벽 공사, 파병 준비 등으로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기왕 새로 짓는 빌라니까 4층 말고 5층으로 지어요. 그래야 주민을 많이 받죠.”

“5층? 너무 높지 않아?”

“요즘은 다 그렇게 지어요. 프란시스 시티를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높으면 무섭지 않을까? 실수로 떨어지면 어떡해? 불나면 탈출도 못하는데?”

고층 빌라는 보기에 좋지만 문제가 많았다. 조리시설과 난방시설이 모두 1층에 있어 공동으로 불을 쓰고, 화장실이 따로 없어 요강에 볼일을 보고 매일 아침 내다 버렸다. 고층에 사는 사람은 오물통을 들고 나가는 것이 번거로워 창밖에 뿌리기도 하는데, 법으로는 금지된 행위였다. 길 가다 오줌 벼락 맞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당연했다. 그 외에도 층간소음, 부실한 보안, 쥐와 벼룩 전파 등의 문제가 있었다. 어지간한 불편은 그러려니 참고 사는 게 도시민이라 다행이었다.

“고층은 집값이 싸잖아. 그냥 3, 4층으로 하자.”

“안 돼요! 무조건 5층이에요! 목수들한테 벌써 그렇게 말했어요!”

“그럼 왜 물은 거야?”

“선조치 후보고요.”

지금 집을 짓는 곳은 기존에 마시장이 있던 곳이라 크게 손 갈 것이 없었다. 목공들의 톱질 소리와 대패질 소리만 요란했다. 특이점은 로드릭 항 조선소에서 일하던 사람이 많다는 것 정도였다. 진짜 시끄러운 곳은 성벽을 옮기는 곳이었다.

“가급적 그대로 옮기려고 하지만, 깨지고 부서지는 게 많아 채석장에서 돌을 옮겨와야 해요.”

“켈트 남작이 협조해주겠지?”

“협조는 하지만, 공짜는 아니죠.”

로드릭 시티의 석공으로 부족해 노스폴드 시티와 바위성의 석공도 불러왔다. 피난민 중에도 성벽을 쌓거나 개축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특별히 우대했다. 노동력이 부족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억-! 공왕 폐하? 집사 나으리!”

성벽 공사 책임자가 로벨 일행을 발견하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목공 길드의 수석 장인 폴... 폴 어쩌고였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물론, 예의를 알기에 몰라도 아는 척했다.

“잠깐 들러봤어. 특별한 일 없지?”

“무, 물론입죠! 계획대로 착착 진행 중입니다!”

크고 무거운 돌을 나르는 일이라 크고 작은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지만, 그 정도는 특별한 축에 끼지 않았다. 노동법도 안전규정도 없는 시대였다. 로벨 역시 다치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일꾼들 식사는? 잘 챙겨 먹이고 있어?”

“밥이요? 밥이야 지들이 알아서... 그, 그럼요! 시장 상인들이 끼니때마다 이리로 가져옵니다.”

길드 차원에서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니고, 빵 한 조각 스튜 한 그릇이라도 더 팔려는 시장 상인들이 알아서 찾아왔다.

로벨은 정수리에 인사하는 햇님을 한번 보고 상인까지 만나보기로 했다. 때마침 공사장 한쪽이 시끌시끌했다.

“먹고 살려고 다들 부지런하네요. 어라? 저 녀석들은...”

고소한 냄새가 나는 광주리와 반질반질한 무쇠 냄비를 끙끙거리며 옮기는 쌍둥이가 있었다. 로드릭 시티의 인구가 가파르게 늘어난다지만 쌍둥이는 아주아주 드물었다.

“지미네 아이들이에요. 이야, 언제 저렇게 컸죠?”

“올해 15살이 됐을 걸? 음, 내년인가?”

로벨은 손가락을 꼽으며 쌍둥이의 나이를 계산했다. 어느새 어엿한 숙녀가 되었다. 지미와 루시의 여관은 시내에서 손꼽히는 여관이고, 조부는 늑대성의 사용인으로 성 밖 마을의 유지-물레방앗간 관리인-였으니 여기저기서 혼담이 많이 들어올 것이다.

“저 꼬맹이들이 결혼할 나이라니, 저희가 늙긴 늙었네요.”

“아닌데? 난 안 늙었는데? 집사만 늙었어.”

“낼모레 사십 되는 양반이...”

로벨과 어린 집사는 투닥거리며 지미네 야외 식당을 찾아갔다. 노새가 끄는 수레에서 이것저것 내리던 지미와 지미의 아들은 뒤늦게 조상 대대로 모신 주인을 발견했다.

“여, 영주님(My Lord)! 아, 아니, 공왕 폐하(Your Majesty)!”

로벨은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미소 지었다.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미소라 본인도 깨닫지 못했다.

“여관 일도 바쁠 텐데, 여기까지 와서 장사해?”

“하하, 하, 그것이 사정이 있어서...”

로벨을 기억 못하는 아이들은 공왕 폐하란 말에 놀라 아빠 뒤에 숨었다. 성인이 되어도 아직 10대였다. 로벨은 섭섭한 아이들을 보며 물었다.

“저 아이들 때문이야?”

“예, 예. 올가을에 둘 다 시집을 갑니다요.

두 아이를 한 번에 보내려니 혼수가 많이 드는 듯했다. 로벨은 계산이 맞은 것을 자축하며 물었다.

“어느 집안이야?”

“첫째는 제빵사 찰리의 아들이고, 둘째는 도축업자 토미의 조카입니다.”

귀족은 아니지만, 도시에서 나름 페닝 좀 굴리는 집안이었다. 로벨은 문뜩 오래전에 작고한 구 로드릭 마을의 늙은 촌장을 떠올렸다. 손주들이 커서 시집가는 것을 알면 무척 좋아할 것이다.

“그 빵 파는 거지?”

“예? 예예. 그렇습니다요.”

“큰 거 하나 줘.”

로벨은 주머니에서 10페닝 금화를 꺼내 던졌다. 엄지손톱만한 작은 금속이 오늘 가져온 빵과 스튜 전부보다 비쌌다. 지미가 화들짝 놀라 도로 내밀었다.

“이건, 이건 너무 많습니다요!”

“결혼축하금이야. 시간이 없어서 못 갈 것 같으니 미리 낼게.”

“그, 그렇게까지... 황공무지, 아니, 황송합니다.”

로벨은 길죽한 빵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모인 사람들은 큰 칼을 찬 기사와 기사 종자 모습에 화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다음은 어디 갈까?”

로벨의 물음에 답이 없었다. 로벨은 불안한 마음에 옆을 힐끔 보았다. 어린 집사가 양 볼에 불만을 가득 담아 쳐다보고 있었다. 로벨은 괜히 찔러서 변명했다.

“내 용돈이야!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잖아!”

“누가 뭐라 했어요?”

어린 집사가 표정으로 뭐라 했다. 어린 집사는 한참을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한숨 쉬었다.

“뭐, 됐어요. 결혼세로 다시 뜯어낼 거니까.”

“와, 사악해.”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미와 루시는 로드릭 마을 농민 출신으로 로벨의 아랫사람이지만, 사돈 되는 제빵사, 도축업자는 자유민이었다. 자유민과 결혼하면 자유민이 되고, 자유민은 결혼세를 내지 않았다. 겔몬족 관습법에 해박한 어린 집사가 그걸 모를 리 없으니 심통 나서 로벨을 골려주려고 한 소리였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귀리빵을 쪼개 하나씩 입에 물고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비심에 대해 토론하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최근에 거래처가 3개국으로 늘어나 기쁨의 비명을 지르는 로드릭 상회였다.

“여기가... 이렇게 컸어?”

“순시 핑계로 맨날 싸돌아다니면서 처음 봤어요? 이제 보니 순시는 핑계고 호른 경이랑 놀려고...”

“아니야! 아니야! 며칠 전에 봤어! 진짜야!”

시장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은 로드릭 상회 건물을 못 보고 지나갈 리 없으니 아마 신경 쓰지 않은 탓이었다.

“근데 건물이 하나가 아니잖아!”

“기존 건물은 북해무역 담당이고, 옆 건물은 볼탄 반도랑 남해무역 담당이에요. 상회직원도 108명이나 돼요. 거래하는 상단은 220곳이고요.”

“와... 헨리 상회장 부자구나?”

“공왕 폐하가 부자죠. 로드릭 상회잖아요.”

헨리 피터 상회장의 지분도 없진 않았다. 맥주 장사로 시작해서 북해와 내해를 연결하는 국제 상인이 되었으니 엄청난 성공이었다.

“공왕 폐하와 만난 것이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지요.”

펄프 대장만큼이나 늙은 헨리 상회장이 말했다. 어린 집사는 입에 발린 소리가 싫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투자한 양모 사업은 어때요?”

“기존의 구릉성 판매루트를 완전히 장악하고 포클랜드로 확장 중입니다.”

“호의적이지 않을 텐데요?”

“그쪽 상인들도 귀가 있으니 잉그비아 왕국의 품질 좋은 양모가 무관세로 들어올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먹힐 시장이면 우리와 손잡는 게 낫다 여길 겁니다.”

“손 잡아주게요?”

“모직물은 쉬이 상하지 않아 장기 보관이 가능합니다.”

“일단 시장부터 차지하겠다는 거군요.”

로벨 ‘로드릭’ 상회인데, 로벨이 끼어들 대화가 아니었다. 기초적인 것부터 자세히 설명하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굳이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천장 높이를 가늠하고, 벽의 간격을 걸음수로 세어보고, 괜히 바쁜 척하는 상회직원을 본의 아닌 게 괴롭히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을 발견했다.

“저 왕자가 무슨 일이지?”

출정 준비로 바쁠 파울로 왕자가 시장 구석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심심한 차에 정말 잘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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