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70화 (570/605)

570화. 훈수

어린 집사의 외침을 들은 호른 성 소속 병사와 푸른고래 호 당직 선원이 선창으로 몰려왔다. 안 그래도 좁고 갑갑한 실내가 땀내 나는 남자들로 가득 찼다. 밀항자에게 절망적이었다.

“뭐해요? 저거 당장 잡아요!”

어린 집사가 눈알 굴리는 밀항자를 가리키며 외쳤다. 상황 파악을 끝낸 병사 둘이 칼과 도끼를 한 명에게 맡기고 다가갔다. 밀항자는 밀항의 대가가 노잡이 노예형이란 것을 아는지 거칠게 몸부림쳤다.

“이거 놔라! 놔!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보시오! 당신들! 이 잡것들을 치우시오!”

“이보시오? 범법자 주제에 많이 건방지네요?”

어린 집사가 ‘매우 아프게 쳐라!’ 명령했다. 호른 성의 병사는 어린 집사한테 급료 받지 않지만, 짜증나는 범죄자를 응징할 기회를 굳이 포기하지는 않았다. 주먹으로 복부를 치고 팔꿈치로 등짝을 찍어 찍소리 못하게 제압했다. 로벨은 흐룬팅을 소드 벨트에 걸며 이안 선장을 질책했다.

“사람이 숨어있는 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것이... 뭐라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선원 중에 조력자가 있는 듯합니다.”

“그야 그렇겠지. 선장의 아랫사람이니까 선장이 찾아서 처벌해.”

왕의 신뢰를 깎아 먹은 책임은 무거웠다. 오늘 밤 누구 하나 죽어 나갈 것이다. 이안 선장이 피 냄새를 풍기며 물었다.

“저자는 어찌합니까?”

로벨은 직관적으로 먼지 나게 두들겨 맞는 밀항자를 보았다.

“늑대성으로 데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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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 좋지 않았다. 푸른고래 호에 실은 향신료 상당수가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미친 거 아니에요? 어떻게 거기다 대소변을 볼 수 있죠? 와, 생각할수록 화가 나네? 저거 당장 죽여 버리죠. 아니다. 죽이는 것도 자비롭다. 두 다리를 잘라내고 죽을 때까지 노 젓게 해요.”

평소에도 절단을 즐겨 권하는 어린 집사지만, 이번만큼 진심인 적은 없었다. 정체 모를 밀항자가 움찔해서 변명했다.

“...머근 거시 이쓰면 나오능 거시 당여하거늘, 보닝이라고 싸고 시픈 게 아니어소.”

귀여운 척이 아니다. 입술이 퉁퉁 부어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빨도 하나 빠진 것 같은데 확인이 어려웠다. 허풍쟁이가 힐끔힐끔 살피며 속삭였다.

“겁대가리 상실한 멍청이긴 한데, 뜨내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요.”

“어째서?”

“손가락에 굳은살이 없습니다요.”

과연 유념할만한 특징이었다. 칼을 휘두르든, 괭이를 휘두르든, 망치를 휘두르든, 직업이 있으면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머리 모양을 보면 성직자도 아닌데, 학생일까? 수도원? 도시 대학?”

“어느 쪽이든 귀하게 자란 작자입니다요.”

로벨은 분(糞) 때문에 분(忿)이 풀리지 않은 어린 집사에게 허풍쟁이 추리를 전해주었다. 보호비와 배상금을 뜯어낼 수 있으니 표정이 밝아졌다.

“근데 몸값을 낼 수 있는 신분이면 저 꼴이 되기 전에 신분을 밝히지 않았을까요?”

“그건 그렇지?”

로벨도 의아했다. 이름조차 밝히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뭐, 심문해 보면 알겠지.”

로벨은 고문이라 칭해도 어색함이 없을 혹독한 심문을 각오했다. 그런데 늑대성에 도착하자 의외로 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무적무패 왕이라고?”

로벨의 신분을 알자 우선 당황했다.

“뭐가 이렇게 계집처럼 생겼소? 아니, 그것보다 나이가 몇이오? 누가 봐도 애송이잖소?”

“...어린 집사, 아까 말한 대로 하자. 일단 다리를 썰어서...”

“잠깐! 잠까안-!”

그 다음 반응은 절박함이었다. 목숨 걸고 밀항할 정도니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로벨은 반쯤 뽑은 아론다이트를 밀어 넣고 핵심 내용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파울로 엠마누엘 경이라고?”

“그게, 아직 경(Sir)은 아니오. 작위를 받지 못해서...”

“어쨌든 모나카 국왕의 셋째 아들이란 것 아니오.”

모나카 왕국. 남해 3국 중 작고 가난한 나라. 옛 신의 교리를 따르기에 유라피아 대륙 왕국으로 분류하지만, 지리적으로 이교도 국가와 가깝고 풍습도 독특했다.

“저게 왕자님이라고요?”

“사실 왕자(Prince)도 아니오. 아직 작위를 받지 못해서...”

“...대체 받은 게 뭐에요?”

“옛 신을 찬양할 거룩한 몸과 올곧은 신념이오. 비록 그대들이 죽사발로 만들었지만.”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그새 좋아진 모양이네요. 좀 더 팰까요?”

어린 집사가 미심쩍게 물었다. 그러나 진짜 왕족이라면 해서 안 될 짓이었다.

“엠마누엘(Emanuele)이면 모나카 왕가의 성 씨가 맞아.”

“사칭이겠죠. 왕의 아들이란 자가 밀항을 왜 해요?”

어린 집사가 의심을 거두지 않자 파울로 왕자가 소리를 높였다.

“계속 말하지 않았소! 본인은 도움이 필요하오!”

“가까운 아이란드 왕국과 알베니아 왕국을 두고?”

“지금 남부 사정을 모르고 하는 말이오?”

이안 선장 말을 빌려서 전쟁이 끝난 지 겨우 3년밖에 안 됐다. 이대로 가면 다 죽겠다 싶어서 휴전했을 뿐, 도움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반란을 막아달라니...”

“직접 와서 싸우라는 것이 아니오. 그건 오히려 본인이 반대하지. 한 나라에 왕이 둘일 수 없잖소? 군사와 군자금만 빌려주시오.”

“심지어 오만불손하기까지...”

시작은 약 5년 전, 남해 3국 전쟁이 막 시작되었을 때였다. 모나카 왕국은 알베니아 왕국의 갑작스러운 침공을 받아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허나, 단언컨대 엠마누엘 왕은 기사로써 흠잡을 곳 없이 용맹하게 싸웠다.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산화했으니 의심의 여지없었다.

“에헤이,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그만이잖아요? 왜 그리 복잡하게 구는 거죠?”

“큰 형님께서는 좋은 분이지만... 그저 좋을 뿐이오.”

이안 선장이 귓속말로 의미를 풀어주었다.

“첫째 왕자는 소위 말하는 반푼이입니다.”

울프 용병단 소속 중에 별명이 ‘반푼이’인 이가 있지만, 그것은 그냥 별명이었다. 로벨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진짜 반푼... 모자란 왕자라고?”

목소리가 조금 컸다. 파울로 왕자가 가문의 치부를 변명했다.

“어린 시절 크게 열병을 앓아 불편함이 생기셨소. 형님의 잘못이 아니니 무례한 표현은 삼가주시오.”

“아, 미안하오.”

로벨은 즉시 사과했다. 그리고 모나카 왕국 상황을 대강 이해했다. 과거 죠드 도너반 자작도 그랬지만 장애는 옛 신의 형벌, 악마의 저주, 천국에 가지 못하는 괴물로 여겨 터부시했다. 하물며 지금은 혼란의 시기였다. 왕위계승자가 정상적인 판단을 못하는 상황에서 왕족과 제후들이 어찌 나올지 알만했다.

“둘째 왕자가 반란을 일으켰나요?”

“그것도 무례한 말이군. 우리 가문의 형제애가 그리 가벼워 보이시오? 작은 형님은 큰 형님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소.”

형제의 난이 아니라 진짜 반란이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적아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파울로 왕자가 자국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우선 마르키시오 공작은 적장자란 명분으로 큰 형님의 왕위계승을 주장하고 있소.”

“그럼 좋은 사람이네요.”

“사실상 과부나 다름없는 큰 형수님의 친부인데 말이오?”

“음... 아닌가 보군요.”

어린 집사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 왕비를 통해 섭정하려는 의도 같았다.

“반면, 알비치 후작은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는 이유로 작은 형님을 새 국왕으로 추대하고 있소.”

“그럼 그 사람을 도와서 둘째 왕자님을 왕위에 앉히시죠? 첫째 왕자님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알비치 후작이 작은 형수님의 삼촌인 것은 말할 것 없고, 외가가 아이란드 왕실인데도 말이오?”

정치에 약한 어린 집사가 기어이 폭발했다.

“크아악-! 복잡해! 뭐가 이렇게 복잡해요!”

“워워, 진정하세요. 남의 일이잖아요? 남의 일이요.”

“아, 그렇죠?”

마녀 키르케가 토닥이자 금방 침착해졌다. 파울로 왕자는 괜히 얄미워서 주먹을 쥐었다가 슬그머니 풀었다. 로벨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그럼 경은 어떻소?”

“어떠냐니? 무슨 뜻이오?”

“두 형제를 몰아내고 왕좌에 앉고 싶소?”

귀가 있는 사람은 모두 집중해서 파울로 왕자를 보았다. 왕위계승전쟁에서 밀린 왕자가 외국으로 망명해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는 스토리는 작가가 아니어도 한 번쯤 생각해볼 만했다.

“조금 전에 말했지만, 우리 형제는 골육상쟁에 관심 없소. 우리 가문을, 200년 동안 이어진 엠마누엘 왕가를 지키고 싶을 뿐이오.”

세 오라비를 좋아하는 로벨을 웃게 했다.

“그대가 싸우고자 하는 적은 누구요?”

“마르키시오 공작, 알비치 후작, 그들을 따르는 추악한 모두요. 그리고 왕실의 뜻을 하나로 모아 작은 형님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할 것이오.”

“물론, 우리 폐하가 도와줄 때 말이죠.”

로벨과 어린 집사는 어렴풋이 파울로 왕자의 속내를 읽었다. 이웃 나라에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르나 왕국과 포비아 왕국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북해 3국-에르나, 포비아, 잉그비아 왕국-의 힘은 매우 강대하여 왕권을 되찾은 후 위험했다. 네일 공국이나 자유도시연맹 같은 작고 분열된 세력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황을 바꿀 힘이 있으면서 위협이 되지 않을 나라, 무적무패 왕의 신생 국가가 딱 이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오. 허풍쟁이, 손님에게 쉴 곳을 내어줘.”

파울로 왕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확답 받지는 못했지만, 범죄자에서 손님으로 격상되었으니 긍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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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냉철하게 평가했다.

“하는 짓은 얼치기인데, 속은 꼬리 아홉 달린 너구리에요.”

로벨 이하 늑대성 식구가 모두 동의했다. 로벨을 최우선 조력자로 선택한 정치적 안목, 왕실의 적을 속이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밀항하는 행동력, 갖은 폭력과 모욕에도 정체를 숨기는 인내심 등이 생각할수록 대단했다.

“용감하잖아. 마음에 들어.”

“호른 경 앞에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마요. 그 양반 생긴 거랑 다르게 질투심이 장난 아니에요.”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군신 간의 우정 따위로 생각하고 웃었지만, 관계를 잘 아는 사람은 진지하게 동의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파울로 왕자의 제안이었다.

“솔직히 기회긴 해요. 북쪽으로는 잉그비아 왕국과 네일 공국 모두 무관세 교역이 가능한데, 남쪽은 3국 모두에 어마어마한 세금 떼어주고 있어요. 10만 페닝을 거래해도 이것저것 빼고 나면 순이익은 3천 페닝이 안 될 정도예요.”

물론, 선원 임금이나 선박 수리비 같은 지출은 내수로 돌아온다. 그리고 로드릭 시장 시세로 3천 페닝이고, 북해와 내륙으로 가져가면 2배쯤 더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순이익이 10%가 안 되는 것은 큰 불만이었다.

“모니카 항구 중 하나만 관세조절이 되어도 중계무역 이문이 어마어마하게 남아요. 아예 10년쯤 대여받으면 더 좋고요.”

“중요한 것은 왕자에게 승산이 있느냐지요.”

펄프 대장이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울프 용병단 남군(南軍) 출신에게 알아봤습니다. 모나카 국왕은 이름만 왕이라 합니다. 외해로 나가는 서쪽 해안을 제후들이 차지하여 재정적으로 궁핍하고, 지난 전쟁 역시 아이란드 왕국이 끼어들지 않았으면 참패했을 터라 기사들의 신망이 낮습니다.”

“그렇기에 몸값을 높여 받을 수 있죠!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몰라요?”

“그 리스크로 죽어가는 것은 우리 용병이오.”

로벨은 두 실무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후 결정했다.

“정보가 필요해. 크레타 시티에 사람을 보내서 각 세력의 전력을 알아봐.”

“왜 크레타 시티에요?”

“체스도 훈수 두는 사람이 가장 잘 보는 법이야. 인어해 교역이 본업인 자유도시 상인이니 남해 정세에 가장 밝을 거야.”

“그건 그러네요. 뭘 팔아먹으려면 잘 알아야 하니까...”

“그리고 울프 용병단이 피 흘릴 필요 없어. 페닝만 있으면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이 있으니까.”

“새로 용병을 모집하시려면... 아... 그렇군요.”

“그래. 페르젠 ‘주니어’ 백작한테 사람을 보내서 골칫거리 치워준다고 생색내자.”

일을 통 안 해서 그렇지, 왕은 왕이었다. 로벨의 지시가 떨어지자 해당 업무 담당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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