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69화 (569/605)

569화. 밀항

계절의 변화는 바람의 변화였다.

매서운 북풍이 건조한 서풍으로 바뀌더니, 보리싹이 익을 때쯤 미지근한 남풍이 불어왔다. 인어해의 뜨거운 입김이 담긴 남국의 바람이었다.

“계절이 바뀌어서 바람이 바뀌는 거야?”

“바람이 바뀌니까 계절이 바뀌는 거죠.”

“그럼 바람이 바뀌는 이유는 뭐야?”

“...계절이 바뀌니까요?”

아직 자연과학에는 많은 시간과 페닝이 필요했다.

어쨌든 남풍이 불자 집 나간 새와 배들이 돌아왔다. 가장 반가운 이는 최근 2, 3년 동안 북해에 묶여 있던 푸른고래 호 선단이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푸른고래 호 선창에 쌓여 있는 남해 왕국 특산품이었다.

“후추! 계피! 설탕! 비단! 황금! 다이아몬드!”

어린 집사가 나이를 잊고 방방 뛰었다. 아직까지 미혼이라 어린-혹은 젊은(Young)- 집사지만, 결혼하고 애를 낳아 올드 집사가 되어도 저럴지 걱정되었다. 물론, 30대 후반에 접어든 로벨이 할 걱정은 아니었다.

“황금하고 다이아몬드는 없습니다.”

이안 스칼(Scar) 선장이 말했다. 별명이 성(姓)으로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지만, 이 선장만큼 직관적인 경우는 드물었다. 주름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큼직한 흉터가 꿈틀거렸다.

“후추가 64자루, 설탕이 15통, 기타 계피, 마늘, 샤프란 같은 향신료가 3, 4자루씩 됩니다. 자세한 것은 회계사가 보고서로 올리겠지만... 직접 확인하시겠습니까?”

“그야 당연하죠! 가요, 공왕 폐하!”

“나, 나도?”

“나도 가요!”

과장 좀 해서 같은 무게의 황금과 바꾸는 동방의 향신료였다. 어린 집사 성품상 직접 품질과 수량을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진짜 황금을 실어 왔어도 굳이 확인하지 않았을 로벨은 귀찮았다. 호른 경이 자작나무 숲으로 자리를 비운 탓도 있었다. 의외는 마녀 키르케였다.

“그쪽은 왜요? 늑대 것들 준다고 슬쩍할 생각이면 미리 경고하는데...”

“제가 도둑인줄 아세요? 그냥 구경만 할 거예요!”

로벨, 어린 집사, 심지어 이안 선장까지 미심쩍게 마녀를 보았다. 그나마 신용할 수 있는 근거는 남국에서 술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럼 다 같이 가자. 심심한 것보다 낫잖아.”

“세상에나, 그 비싼 재물을 두고 심심할 수 있나요?”

어린 집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침 안마당을 지나는 허풍쟁이를 잡아 말과 마차를 준비시켰다.

“이런 제길! 선장이 왔을 때 피했어야 했는데!”

옛 신이 허풍쟁이를 지상에 내림에 보직을 잘못 입력하셨다. 마부 노릇이 숙명이었다.

로드릭 시티에서 로드릭 항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 가엾은 짐승에게 채찍질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네 발을 교차시키면 1시간 반이었다.

“예전에는 개울을 건너서 구불구불한 길을 한나절이나 가야 했는데...”

“이게 바로 도로의 힘이죠.”

수만 페닝을 들여 늑대도로를 설치한 보람이었다. 곧은 길을 가니 몸도 마음도 여유로웠다. 책상 앞에서 해야 할 실무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남해 3국 모두 식량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왜요? 전쟁이 끝난 지 3년이 지났잖아요?”

“겨우 3년이지요.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갓난쟁이는 괭이를 쥐지 못합니다.”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요?”

“북쪽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피해가 훨씬 큽니다. 아예 폐허가 된 도시도 여럿 있습니다.”

자유민이 사는 도시가 사라질 정도면 벽지의 작은 농촌은 수도 없이 불타 사라졌을 것이다. 전쟁이란 게 본디 그러했다. 로벨처럼 단기간에 승부를 보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용케 교역품을 가져왔네요.”

“그래서 오히려 싸게 구했습니다. 생필품 가격이 폭등하면 사치품 가격은 폭락하는 법이죠.”

“아... 그러면 양모 말고 귀리를 더 실어 보낼 걸 그랬네요.”

“양모값도 좋게 받았습니다. 전화(戰火)가 가축을 피해 가진 않으니까요.”

여담으로 무기와 용병을 왕창 사들인 페르젠 가문은 손해를 보았다. 처치 곤란이 된 상품도 상품인데, 피를 거래했다는 이유로 아이란드, 알베니아, 모나카 3국 모두에게 백안시당했다. 좋다고 사 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러냐고 화내도 소용없었다. 먹고 죽을 곡식도 없으니 용병 몸값을 갚을 수 없었다. 어린 집사가 페르젠 항 분위기를 전해 듣고 깔깔 웃었다.

“이래서 심보를 곱게 써야 한다니까요.”

“...공왕 폐하의 심보였지 않습니까?”

“저와 폐하는 일심동체라고요. 그렇죠, 공왕 폐하?”

“그건 아니야.”

로벨이 정색하며 부정했다. 한 마음은 그렇다 쳐도 한 몸은 너무 많이 갔다. 저런 작은 몸뚱이를 가지고 싶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시무룩해지자 마녀 키르케가 위로했다.

“기사님이 매정하네요. 이리 오세요. 제가 한 몸이 되어 줄게요.”

그런 의도는 아니겠지만, 자칫 오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어린 집사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이안 선장과 허풍쟁이가 헛기침하며 딴 곳을 보았다.

“저 두 사람 어느 사이에...”

“험험! 좋을 때잖소. 모른 척하쇼.”

로벨은 모닝스타의 옆구리를 두드려 마차에서 떨어졌다. 어린 집사가 발광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시뻘겋게 발광(發光)은 하지만, 발광(發狂)하지는 않았다.

“어린 집사? 집사?”

어린 집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마녀 키르케의 손을 잡았다. 로벨, 허풍쟁이, 모닝스타, 수레를 끄는 짐말까지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바라는 것보단 약하지만, 평소 행실을 보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마녀의 눈이 커졌다가 가늘어졌다.

“헤에, 우리 집사님 용감하네요?”

“뭐, 뭐가요? 먼저 말 꺼낸 게 누군데요!”

이안 선장과 허풍쟁이는 재빨리 바다 날씨에 관해 이야기했고, 로벨과 모닝스타는 최신 유행 갈기 스타일을 심도 깊게 토의했다. 종을 뛰어넘은 섬세한 배려지만 아쉽게 소용이 없었다. 소년과 소녀는 그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로벨은 만족했다.

“한 인간에게는 작은 몸짓이지만, 늑대성에게는 위대한 포옹이야.”

“저기요! 이상한 표절하지 마요!”

@

호른 마을의 로드릭 항이 모처럼 북적였다.

사실 당연한 말이지만, 로드릭 가문 선박에는 로드릭 영지 출신 선원이 많았다. 항해 중에 모은 페닝과 작은 짐칸에 꼬불쳐온 교역품이 활기를 불러왔다. 꼭 금전이 아니어도 무사히 돌아온 남편, 아들, 형제, 친구들을 보기 위해 많은 주민이 찾아왔다.

“공왕 폐하께서 오셨다! 길을 비켜라! 어허! 비키라고!”

허풍쟁이가 말채찍을 휘두르며 호통쳤다. 그러나 좁은 부두에 밀어터지게 사람이 모인 탓에 쉽지 않았다. 왕의 권위가 하늘같이 높다 하나 바다에 뛰어들게 할 수는 없으니 비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어린 집사가 다소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선원들을 해산하지 않았나요?”

이안 선장이 흉터 하나를 긁적였다.

“화물을 지킬 인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호른 성의 병사들을 부르면 되잖아요?”

“호른 성주가 성에 없어서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선원이 배에 묶여 있으니 선원 가족이 배로 모인 것이다. 이래서는 외지 상선도 들어오지 못했다. 로벨은 짜증내는 모닝스타를 토닥이며 말했다.

“허풍쟁이, 호른 성으로 가서 내가 보냈다 하고 병사를 불러와. 한 척당 3명은 지켜야 하니까. 20명. 그래. 선원 중에도 당직자가 있으니까 20명이면 충분해.”

호른 성의 병사 대부분이 동원되었다. 그 대신 100명 넘는 선원이 고향 땅을 밟았다. 가을까지 항해 일정이 없으니 한동안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로벨은 사람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푸른고래 호 갑판에 올랐다. 바다사자 호와 강철갑옷 호에 적응해서 그런지 중형 갤리어스가 비좁게 느껴졌다. 선체가 낮은데다 선실 절반이 노잡이 공간이라 적재할 수 있는 화물량이 많지 않았다.

“옛날에는 이것도 크게 느껴졌는데...”

“심지어 용병을 가득 태우고 싸우러 다녔잖아요. 이야, 그걸 어떻게 참았죠?”

아쉬운데 필요하면 참아지는 법이다. 이안 선장은 한평생 동고동락한 애인이 작다고 놀림 받아 살짝 삐졌다.

“2층 선창 두 곳에 화물이 있습니다. 크흠! 안내하겠습니다.”

추억에 젖어 선장을 잊은 로벨은 움찔해서 조용히 따라갔다. 마녀 키르케가 어린 집사 옆구리를 찔러 소리 없이 타박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꿉꿉한 복도를 지나자 유난히 두꺼운 떡갈나무 문짝 창고가 나타났다. 보안에 신경 쓴 듯 값비싼 청동 자물쇠가 두 개나 채워져 있었다.

“선원이 못 들어가게 막은 건가요?”

“항구에 정박할 때는 잠가둡니다. 육지에서는 욕심이 양심을 죽이니까요.”

선장다운 의심이고 바다 사람다운 표현이었다. 그러나 마녀 키르케만 조그맣게 감탄했다. 로벨은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고, 어린 집사는 곧 보게 될 다섯 자리 상당 페닝에 집중 중이었다.

“빨리 열어요. 빨리요.”

이안 선장은 목에 건 열쇠 꾸러미를 풀었다. 선장실, 무기고, 저장고, 화물창고 등의 열쇠로 선장의 권리를 간접적으로 상징했다. 조명이 어두워 길이와 모양을 더듬는 게 폼 나는 권위는 아니었다.

“아, 찾았습니다. 잠시만...”

자물쇠가 하나하나 풀리고, 도끼질도 100번은 버틸 두꺼운 떡갈나무 문이 열렸다. 어린 집사의 표정이 점점 환해졌다. 알싸한 후추향 속에 짭짜름한 페닝 냄새가 물씬 나는...

“윽! 찌린내!”

“기사님! 누가 여기다 오줌 쌌나 봐요!”

가장 놀란 사람은 이안 선장이고, 가장 화난 사람은 어린 집사지만, 가장 먼저 행동한 사람은 로벨이었다.

“물러나!”

로벨은 어린 집사의 목덜미를 끌어당기며 자리를 바꿨다. 햇살 한 점 들지 않는 칠흑 같은 선창이나 분명하게 보았다. 살아있고, 움직이고, 크고, 적대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이이야압-!”

다시 말해 공격적인 무언가였다.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칼날 길이가 최소 핸드 앤드 하프 소드였다. 좁은 선실에서 뽑기 쉬운 무기가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습격자도 그걸 노리고 용감히 달려든 듯했다. 허나, 소드 마스터 칭호는 거저 받은 게 아니었다. 칼집이 분리되지 않으면 칼집 채 뽑으면 그만이었다. 칼자루가 불쑥 솟아올라 습격자의 목젖을 때리고 칼집 끝을 감싼 쇠테가 발등을 찍었다.

위아래를 동시에 가격당한 ‘찌린내’ 습격자는 ‘컥-! 커억!’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어린 집사가 뒤늦게 소리 질렀다.

“암살자! 암살자다!”

암살자치고 솜씨가 어설펐다. 로벨은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발로 굴렸다. 후추알을 가득 채운 가죽 쇼오스(Chausses)였다.

“그냥 선원 같은데? 이안 선장, 아는 사람이야?”

조금 전에 은화 나눠주고 해산한 선원이 자물쇠도 풀지 않고 선창에 숨어들 리 없었다. 고로 정답은 하나였다. 이안 선장이 난감하게, 그리고 대단히 부끄럽게 말했다.

“제가 볼 때... 밀항자군요.”

남국의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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