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68화 (568/605)

568화. 클럽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아지랑이가 살랑살랑 피어나고, 꽃망울이 봉긋하게 솟아났다. 적응이 안 되는 평화로운 봄이었다. 어린 집사가 이유를 꼭 짚었다.

“눈이 녹으면 득달같이 싸우러 갔으니까요.”

“억울한 발언이야. 난 싸우고 싶어서 싸운 게 아니야.”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결과만 있을 뿐이다. 세간의 평가 역시 어린 집사와 비슷했다. 무적무패 왕이 대외확장을 중단하고 내실 다지기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기분 나쁜 오해였다.

“난 내실 같은 거 신경 쓴 적 없어!”

“에이그, 자랑이다. 자랑이야”

창 한 자루, 말 한 필에 인생을 건 기사들은 실망했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대다수 귀족과 부르주아, 농민, 장인, 아이들은 왕의 새로운 행보를 환영했다. 그 증거로 수많은 클럽에서 초대장이 날아왔다.

“클럽(Club)은 단어는 좋은데, 막상 가면 심심해.”

“클럽이 왜... 아, 그렇군요.”

이름만 들으면 몽둥이(Club) 가지고 기량을 겨루는 기사 모임인데, 실제로는 부르주아와 장인들의 지루한 사교모임이었다.

“옛날에는 진짜 몽둥이로 사람 때렸을 걸요? 세월이 흘러서 의미가 바뀐 거겠죠.”

“와! 그쪽이 더 재미있겠는데?”

“...가끔 폐하가 기사란 것을 까먹어요.”

로벨은 기사인 동시에 왕이라 종종 클럽에 초대 받았다. 도시 상인들이 주최하는 클럽과 도시 밖 농장주인의 클럽이 대표적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정의롭고 올바른 경쟁을 위한 친목 향상 위주의 다과회 클럽’과 ‘교양 있는 문화생활을 위한 지주들의 사냥과 체스 클럽’인데, 줄여서 다과회와 체스 클럽이라 불렀다. 어느 쪽이 더 재미있는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술 먹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기사에게는 둘 다 심심했다. 로벨이 꼭 가야 하냐는 표정을 짓자 어린 집사가 엄하게 말했다.

“초대를 거절하는 것도 한두 번이죠. 자꾸 무시하면 공왕 폐하가 자기들을 적대한다 생각할 거예요. 게다가 신시가지 사업으로 빚까지 졌잖아요. 페닝을 받고 초대를 무시하면 어찌 되겠어요? 부르주아도 명예가 있고 자존심이 있어요.”

“윽... 그렇게 되나?”

그런 이유로 오늘 가는 곳은 체스 클럽이었다.

이 클럽은 주최(主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순번대로 돌아가며 클럽 회원과 지역 명사를 초대하는데, 오늘의 호스트는 로벨을 초대하기 위해 3,800페닝을 공공사업비로 지불했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모두 발걸음 했으니 나름 성공한 투자였다.

“공왕 폐하께서 당도하셨소!”

로벨의 깃발을 본 하인들이 부산을 떨었다. 사흘 전에 참석 의사를 밝혔는데도 막상 무적무패 왕을 영접하니 당황한 듯했다.

“1소대 정지. 2, 3소대 정문 앞으로. 소리 내지 말고 신속하게.”

조지 솔트가 호위병을 배치했다. 미리 지시받은 것이 있어 대문을 막고 저택을 에워쌌다. 시내에서 활동하는 거라 쇠뇌와 장창은 놓고 왔지만, 허리에 찬 큼직한 칼과 기름 먹은 가죽 갑옷이 사뭇 위압적이었다. 저택을 지키는 용병이 스무 명이나 있었으나 울프 용병단의 명성과 왕의 호위란 직함 앞에 감히 마주할 수 없었다.

로벨은 소란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모닝스타에서 내렸다. 주최자의 아들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허리를 굽히고 인사했다.

“공왕 폐하 만세! 저희 지브란 가문에 방문해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저는 알토 지브란의 장남...”

알테노 지브란 어쩌고 소개가 이어졌지만 굳이 기억하지 않았다. 오늘 소개 받을 이름이 줄잡아 30명이었다. 벌써부터 기억력을 낭비할 수 없었다. 로벨은 적당히 인사한 후 안내를 받아 저택 본관으로 향했다. 한발 먼저 달려온 청지기가 쩔렁쩔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볼탄 반도의 위대한 왕! 로드릭 시티의 유일한 공작! 포클랜드의 진정한 후작! 늑대성의 적법한 군주! 무적무패의 왕이자 옛 신의 살아있는 복자! 로벨 로드릭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사실 클럽에서 이렇게 요란 떠는 문화는 없었다. 신규 회원이 가입하면 주최자 재량에 따라 공개적으로 소개하기도 하지만 하루짜리 초청 손님을 위해 소리 높이지는 않았다.

‘손님이 암만 왕이라지만...’

손님이 진짜 왕이란 게 유머였다. 황금 보리 수도원에서 동남쪽으로 2.6마일 떨어진 곳에 120에이커 규모 밀 농장을 운영한다는-숫자가 많아서 금방 잊었다- 알토 지브란 씨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존경하는 공왕 폐하께서 이 누추한 곳을 방문해주시니 가문의 영광이오, 알토 지브란의 행운입니다. 아, 집사 양반도 어서 오시지요.”

알토 지브란은 체스 클럽 회원들을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봤냐? 봤어? 난 무적무패 왕을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이야!’ 신시가지 사업 이후 첫 클럽 모임이 지브란 가문 모임이었을 뿐이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솔직히 경외의 눈빛을 보냈다. 기사 신분이 아니면 만나주지 않기로 유명한 기사의 왕이라 더욱 그러했다.

볼탄 반도에 살아 숨 쉬는 사람 중 로벨과 어린 집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굳이 소개할 필요 없었다. 대신 무수히 많은 소개를 받았다. 소와 양을 100마리나 키우는 목장주인도 있고, 돼지농장을 2개나 가진 농장주인도 있었다. 로벨을 제외하면 로드릭 령(領)에서 가장 부유한 지주들이었다.

“세금만 제때 내면 상관없죠.”

“제때 안내면?”

“용병 뒀다가 사탕 바꿔 먹을까요.”

무서운 말이지만 당연한 말이었다. 로벨의 보호를 받으니 보호비를 내는 것은 타당했다.

한 명씩 인사가 끝나자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로벨은 비로소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술과 고기를 산처럼 쌓아놓고 즐기는 기사의 연회와 달랐다. 빵과 와인이 조금 비치되어 있지만 생색내기 수준이었다. 대신 체스 클럽이란 이름처럼 곳곳에 체스판이 놓여있었다. 왕의 방문 탓에 한가로이 체스 두는 사람은 없지만 나름 흥미로웠다.

“한 게임 하시겠습니까?”

로벨이 관심을 보이자 알토 지브란이 자리를 권했다. 어린 집사는 인상을 찌푸렸고, 클럽 회원들은 크게 반색했다. 창칼이 아니고, 군사가 아니지만, 무적무패 왕을 이기면 평생의 자랑이 될 수 있었다.

“크흠! 부족하지만 제가 한 수 배워도 되겠습니까?”

“어허, 체스를 배운지 얼마나 됐다고 나서시오? 우리 클럽에서 가장 고수인 본인이...”

“누가! 누가 고수란 말이오! 본인과의 전적을 잊으신 거요?”

‘무적무패’가 먹음직스러운지 10년 우정에 금이 가는 듯했다. 로벨은 어린 집사 만류를 뿌리치고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그냥 전부 덤비시오.”

왕의 말은 묵직했다. 클럽 회원이 모두 쳐다보았다.

“전부.., 입니까?”

“그렇소. 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제한이 필요하겠군. 시계가 있으면 가져오시오.”

‘체스 클럽’이란 약칭을 사용할 만큼 체스에 진심인 사람들이었다. 전장과 마상시합장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체스판에서 양보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모래시계를 가져오너라! 그래. 두 개 가져와!”

아직 평화로운 봄이었다. 그래서 피가 튀지 않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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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게임은 달랐다.

게임은 8×8의 평면에서 동일한 숫자의 말이 동일한 규칙으로 움직이지만, 전쟁은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조건에서 날씨, 지형, 보급, 사기 등 수많은 것을 신경 써야 한다.

그런 전쟁으로 단련된 무적무패 왕을 그저 게임판의 규칙 몇 개 숙달한 것으로 이길 거라 생각했으면 오산이었다.

“...저, 공왕 폐하?”

“왜 그러시오?”

“비숍은 옆 칸으로 이동하지 못합니다.”

“규칙은 그렇지.”

“규칙을 아시면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전황이 급하면 급속행군도 하고 잠시 이탈도 하는 법이오. 설마 주교(Bishop)는 무조건 순교해야 한다 주장하는 것이오?”

“그게 아니오라... 이건 체스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듭 말하지만, 전쟁으로 단련된 기사 중의 기사, 기사의 왕이었다. 게임판의 규칙 따위 칼자루 앞에서 하등 쓸모없었다. 로벨이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끌어당기자 ‘비숍도 급하면 옆으로 갈 수 있지’ 규칙이 통과되었다. 물론, 로벨에게만 적용되는 규칙이었다.

“장난치지 마요!”

어린 집사가 버럭 소리치고 ‘말 같지 않은 규칙은 무시하는 규칙’을 관철시켰다. 로벨은 원상 복귀된 자신의 말을 슬프게 보았다.

“어린 집사는 내 편인 줄 알았는데...”

“전 상식과 양심의 편이죠!”

상식이 모자란 로벨의 비숍이 룩에게 먹히고, 9턴 뒤에 상식 있는 쪽 승리로 끝이 났다. ‘무적무패’를 격파한 돼지농장주는 앞서 패배한 동지들 사이에서 승리의 세레머니를 펼쳤다.

그래도 로벨의 체스 실력은 우수한 편이었다. 권력과 무력에 굴복한 말이 아니라 진짜 우수했다. 초반에 도전자 3명을 압도적으로 이겨 무적이란 명성을 증명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전술로 밑천이 드러나고, 오기가 생긴 클럽 분위기에 점차 위기가 찾아왔다. 4, 5번째 시합을 아슬아슬하게 이기고, 6번째 시합에서 시간초과로 판정승 받고, 7번째 시합에서 유치한 떼쓰기에도 불구하고 끝내 패배했다. 오늘의 호스트인 알토 지브란이 애써 위로했다.

“그래도 과연 공왕 폐하입니다. 7전 6승이면 저희 클럽에서 최상위 성적입니다.”

부르주아답지 않게 경박한 세레머니를 펼치던 돼지농장주와 거기 어울리던 동료 회원이 아차차해서 몸가짐을 바로 했다. 상대는 이 땅의 왕이었다. 기분을 맞춰주진 못할 망정 너무 날뛰었다.

“제가 요행히 이기긴 했으나 진정한 실력은 공왕 폐하가 훨씬...”

조금 전까지 무릎 썰매 타며 환호하던 작자라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나 로벨은 관대했다. 칼자루 쥐고 우긴 것은 8할쯤 장난이고, 승부를 부정하진 않았다.

“재미있게 잘 놀았소.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 판 더 둡시다.”

“여, 영광입니다! 언제든지 방문해주시지요!”

시간을 절제했음에도 어느덧 초저녁이었다. 로벨은 저택 밖에서 고생하는 울프 용병단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벨이 집에 가야 다른 사람도 집에 갈 수 있으니 일찍 퇴장하는 게 옳았다. 체스 클럽에서 체스를 7판 내리 뒀으니 할 만큼 했다.

알토 지브란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오자 초췌해진 조지 솔트 외 울프 용병단이 앞뒤로 호위했다. 집에 가는 길은 한결 가볍고 즐거웠다. 어린 집사가 말머리를 가까이 붙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일부러 져준 거죠?”

“응? 티 났어?”

로벨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린 집사는 다시 거리를 벌리며 주억였다.

“제가 봐도 황당한 실수가 몇 개 있었어요. 저쪽 양반들도 대충 눈치 챈 거 같긴 한데, 집중력이 떨어져서 그랬다 생각한 거 같아요.”

하루 종일 칼을 휘둘러도 지치지 않는 로벨이었다. 고작 서너 시간 게임으로 집중력을 잃을 리 없었다.

“체스가 좋아서 달이 찰 때마다 모이는 사람들이야. 한 번도 못 이기면 실망할 거야.”

“덕분에 무적무패 명성에 금이 갔는데요?”

“체스로 무적인 게 아니잖아.”

로벨은 둠 노릭스 후작과 마법사의 왕, 그리고 엘리엇 백작의 말을 차례로 떠올렸다.

“인간이면 질 때도 있어.”

어린 집사는 코웃음쳤다.

“뭐, 신시가지 공사비용의 립 서비스라 치죠.”

“그렇게 생각해도 좋고.”

로벨은 집에 간다는 생각에 사소한 것은 넘겼다. 오늘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

“내일도 클럽에 가야 하니까 일찍 쉬세요.”

“뭐? 또?”

“페닝을 낸 곳은 다 가야죠. 그러게 왜 일을 크게 벌여요?”

로벨은 어깨를 떨구었다. 어린 집사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 어쩌고 설교했으나 듣지 않았다. 진짜 큰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책임이 너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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