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67화 (567/605)

567화. 행복

어린 집사는 깃펜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깍지 껴 책상 위에 올렸다.

손으로 글을 쓰고 발로 늑대 남매를 굴리며 입으로 점심 메뉴를 토론할 수 있는 어린 집사치고 묘하게 점잖은 반응이었다.

“우리 도시에 부랑인이 몇 명인지 알아요?”

볼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통솔하는 2인조, 로벨과 펄프 대장이 움찔했다.

“엄청... 많을까?”

“성 안에 집계된 숫자만 277명이고, 성 밖에 돌아다니는 숫자는 세다가 포기했어요.”

1, 2차 북해전쟁 이후 흘러온 피난민이었다. 다시 말해 2년간 누적된 숫자였다.

“그렇게 많아? 그럼 어떡해?”

“전쟁이 끝났으니 고향으로 돌려보내야죠.”

“춘궁기인데? 굶어 죽을 거야.”

“그건 그쪽 영주가 알아서 할 일이죠. 그리고 지금 가야 파종이라도 하지 않겠어요? 여기 말뚝 박고 살 거 아니면요.”

매정한 말이지만 사실이었다. 세금 내지 못하는 부랑인은 재정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치안만 해쳤다. 지금은 황금 보리 수도원에서 먹을 것을 챙겨주니 얌전하지만, 숫자가 불어나 굶주리게 되면 필히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

“예전에는 받아줬으면서...”

“그때는 남는 땅이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성 안이나 성 밖이나 포화상태에요.”

“새로 마을을 만들면?”

“집 짓고 밭 갈아서 성과를 내려면 족히 3년은 걸려요. 성공할 거란 보장도 없고요. 그럴 바에 본래 살던 고향이 낫지 않아요?”

로벨은 팔짱을 끼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린 집사 말이 맞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벨이 고집을 부리자 집사가 한숨으로 항복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요.”

“그럴 줄 알았어!”

“썩 좋은 방법은 아니에요.”

어린 집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한 바퀴 돌았다. 로벨, 펄프 대장, 아야와 이야카의 시선이 꼬리처럼 따라갔다.

“공공사업을 벌이는 거예요.”

“공공사업?”

“성곽을 보수하거나, 다리를 만들거나, 세금을 걷어서 공익이 되는 일자리를 만드는 거죠.”

“그거 좋은 거잖아?”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에요. 공사가 끝나면 다시 무직 부랑인이니까요. 하지만 귀향할 때 도움이 될 수는 있겠죠.”

로벨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냥 페닝을 주면 안 돼?”

“...예산이 남아도는 줄 아세요? 그리고 공짜로 페닝을 주면 흥청망청 쓰고 또 달라 할걸요?”

“에이, 설마 그러려고.”

“그 정도는 아니어도 고향에 돌아갈 생각은 안 하겠죠.”

어린 집사는 다시 방을 돌았다.

“그리고 시민들이 납득할 만한 사업이어야 해요. 세금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창칼을 앞세워 징수하면 내기야 하겠지만, 결과가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나한테 맡겨.”

“뭘 어쩌려고요?”

노동력이라고 다 같은 노동력은 아니었다. 농사 말고 배운 것이 없는 농민들이라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어 있었다.

“아무튼 일 시키면 되는 거잖아?”

로벨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그래서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은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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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열정적으로 펜을 움직였다. 어린 집사 증언에 따르면 글을 깨우친 이래 처음이었다. 그러나 열정과 성과가 비례하지는 않았다. 주어와 목적어가 수시로 생략된 문장과 오탈자로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태반이었다. 차라리 그림이 알아보기 쉬웠다.

“신(新)시가지요?”

“응!”

어린 집사는 엄지를 곧게 펴서 미간을 꾹 눌렀다. 끽해야 망루 몇 개 고칠 줄 알았는데 일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로벨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린딘 시티를 보고 왔는데, 도시가 엄청 크고 복잡했어.”

“천년 묵은 도시랑 이제 10년 된 도시를 비교할 수 없죠.”

“그러니까 우리 도시도 천년 지나면 그렇게 되겠지?”

“내년도 어찌 될지 모르는데 천년 뒤를 걱정해요?”

“나 지금 진지하니까 제대로 들어.”

어린 집사는 계속 말하라고 끄덕였다. 애초에 성장 속도가 같지 않으니 10년만 지나도 린딘 시티 규모가 될 수 있었다.

“그 동네처럼 안 되게 미리 손을 볼 필요가 있어. 이참에 시가지를 확장하고 구획도 새로 정리하는 거야.”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만... 서족? 서쪽인가? 이거 서쪽이라 쓴 거죠?”

“보면 알잖아?”

어린 집사는 봐도 모르겠다고 투덜거려서 기사 중의 기사를 기쁘게 했다. 어쨌든 구두로 설명을 들으니 지금 마시장과 대장간이 있는 곳에 체스판 모양으로 길을 만들어 사이사이에 고층 빌라를 짓는다는 내용이었다. 하긴, 북쪽은 숲이고, 남쪽은 농경지고, 동쪽은 황금 보리 수도원과 목장이 있는 언덕이니 도시를 확장할 거면 항구로 이어진 서쪽 말고 없었다.

“성 안의 집은 없어서 못 사니까 상관없는데, 통행이 복잡하지 않을까요?”

“성벽을 허물어야지.”

“...진짜 일이 커지네.”

수백 명, 어쩌면 수천 명일지 모를 부랑인을 동원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한 가지 문제만 빼면 말이다.

“그 돈은 어디서 가져와요?”

“세금 걷는다면서?”

“성 안의 시민들요? 도로를 만들거나 방어시설을 만드는 거면 내겠죠. 근데 남의 집 짓는다고 페닝 내놓으라 하면 과연 낼까요?”

“낼걸? 안내면 지들이 어쩔 거야.”

로벨이 긴가민가하게 말했다. 근데 맞는 말이었다. 왕이 내라는데 지들이 어쩔 건가.

“...내기야 내겠죠. 근데 불만이 장난 아니겠죠. 그런 게 하나하나 쌓이면 나중에 도시를 버리고 떠난다고요. 장차 돈줄이 줄어들어요.”

“에이, 그렇게 쉽게 이사 못 가지. 저들도 겨우 자리 잡았는데.”

“와... 왜 이럴 때는 똑똑한 거지?”

어린 집사는 겨우 읽을 수 있게 된 로벨의 계획서를 다시 보았다. 기사 머리에서 나온 것치고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제법 훌륭했다.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내가 해볼게.”

“지금 ‘설득’이라고 했어요. 협박 아니에요.”

“그러니까 해본다니까. 가만, 무슨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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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로벨의 인망을 과소평가했다. 혹은 부르주아의 야심을 과소평가했는지도 모르겠다.

로벨이 직접 클럽에 나가 페닝을 요구하니 어마어마한 호응이 따라왔다. 에르나 왕국, 잉그비아 왕국, 네일 공국, 포클랜드, 자유도시연맹을 모조리 격파한 무적무패 왕이었다. 작은 친분 하나만 있어도 이용해 먹을 곳이 수백 곳인데, 직접 ‘부탁’을 받았으니 거절할 리 만무했다. 물론, 로벨은 친분이란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세상에... 우리 도시에 이렇게 페닝이 많았어요?”

어린 집사는 수레에 실려 오는 금화, 은화궤짝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누가 집사 아니랄까봐 반짝이는 것을 보면 좋아 죽었다. 로벨은 모닝스타 목덜미를 두드리며 으쓱였다.

“이 정도면 공공 뭐라는 거 충분하지?”

“아뇨? 턱없이 모자라죠.”

“...진짜?”

“하지만 초기 자금으로 충분해요. 건물이 완성되면 공왕 폐하 이름으로 팔 거니까요.”

성벽을 옮기고 빌라를 올리는 것은 농민만으로 할 수 없었다. 석공 길드, 목공 길드, 대장장이 길드에 의뢰가 들어갔다. 자재를 구하기 위해 상단도 모집했다. 그렇게 페닝이 풀리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사는 사람이 늘어나고 외지 상인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경제학 개념이 부족한 시대에 획기적인 뉴딜 정책이었다.

“뉴딜(New Deal)?”

“카드 게임 할 때 패를 다시 섞어서 분배하잖아요. 카드 대신 페닝을 분배한 거지만, 비슷하지 않아요?”

“음... 뭔가 다른 거 같지만, 어린 집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로드릭 시티의 진짜 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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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개인적으로 쑥쑥 자라나는 도시가 좋지 않았다.

바닷길로 온 상인들은 서문이 공사로 통제되자 북문과 남문으로 들어왔다. 정확히는 태반이 북문이었다. 성 밖 주민과 인근 영지민의 통행이 많은 남문은 평소에도 혼잡하고 길이 자주 막혔다. 고집불통 당나귀가 길 한복판에 앉아 꼼짝도 안 하거나 수레바퀴가 부러져 짐을 하나하나 옳기거나 하면 한나절이 그냥 지나갔다. 시간이 금이고 신용인 상인은 필연적으로 인적 드문 북문이 이용했다.

“좌판까지 생겼잖아?”

“이런,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북문으로 들어온다고 장사세를 못 받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상회를 통해 거래되니 빨리 들어오고 빨리 나가는 것이 좋았다. 다만, 북문 주변이 로벨과 호른 경의 비밀 데이트 장소란 것이 문제였다.

로벨은 후드를 살짝 들었다가 바로 내렸다. 외지 상인과 가난한 노동자가 로벨을 알아볼 리 없고, 설령 알아봐도 암행 비슷한 거로 생각할 테지만, 오붓한 시간을 위해서는 되도록 정체를 숨기는 것이 좋았다.

“차라리 숲에 들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음흉하기는.”

“그, 그게 무슨-! 그런 뜻이 아닙니다!”

로벨은 눈웃음치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쉽게도(?) 북쪽 숲은 아니었다.

“황금 보리 수도원으로 갑시다.”

“수도원... 말씀입니까?”

거의 보름 만에 찾아와 몹시 들뜬 호른 경이 실망했다. 아무래도 수도원에서는 애정행각을 기대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람이 몰려도 수도원은 조용하지 않겠소? 작년에 담근 벌꿀주가 있으니 조금 챙겨주겠소. 물론, 리암 수사가 허락해야겠지만...”

“벌꿀주군요.”

“숙성이 덜 되어 달짝지근하오. 경의 작은 친구도 좋아할 것이오.”

로벨의 여러 신분 중 가장 방해되는 것은 ‘기사’였다. 술과 싸움 외에는 관심이 없으니 진도가 안 나갔다. 어린 집사의 심정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우와아-! 기사님이랑 호른 기사님이다!”

그때 로벨의 발목을 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로벨을 아직도 ‘기사님’이라 부르는 유일한 목소리였다.

“어? 키르케? 여기 무슨 일이야?”

“여기가 제 직장이잖아요. 로드릭 시티의 키르케 병원!”

“닥터 줄리안의 병원이잖아?”

“제 병원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병원이 멀지 않았다. 병원(Hospital)은 곧 구호소(Hostel)라 가난한 빈민이 많이 몰리는데, 최근 날씨가 풀리고 여기저기 공사판이 벌어져 다들 퇴실한 듯했다. 가난뱅이라고 평생을 가난뱅이로 살고 싶지는 않을 테니 뉴딜 정책의 긍정적 효과였다. 마녀 키르케는 로벨과 호른 경 사이에 끼어들어 양쪽에 팔짱을 끼며 물었다.

“하얀 탑의 위대한 도둑들이 한자리에 모였어요! 와, 좋아라!”

“위대한 도둑이라니...”

“양심이 있으면 본인은 빼는 것이 어떤가?”

로벨과 호른 경의 반응이 좋지 않아도 마녀답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두 분이 무슨 일이세요? 혹시 저를 보려고?”

“그건 또 무슨 망발인가!”

호른 경이 팔짱을 풀고 버럭! 화를 냈다. 마녀 키르케는 입술을 삐죽이고 로벨에게 매달렸다.

“저 기사님은 맨날 화만 내요. 저 기사님 버리고 저랑 놀아요.”

“그치만... 난 호른 경이 좋은걸.”

“어머나, 어머나, 어머나!”

마녀 키르케가 호들갑을 떨었다. 호른 경의 얼굴이 시뻘게져서 더욱 요란을 떨었다.

“호른 기사님, 그거 아세요?”

“무, 무, 무엇을 말이냐!”

“제 첫사랑이 우리 기사님이란 거요.”

이건 로벨도 예상 못한 깜짝 고백이었다. 두 기사의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마녀 키르케는 과장되게 깔깔 웃었다.

“하지만 이제 양보할게요. 음, 저보다 어울리는 거 같아요. 키는 좀 작지만.”

“...너보다 크다.”

마녀 키르케는 혀를 날름이고 로벨을 놓았다.

“병원에서 동쪽으로 두 블록 가면 공터가 있어요. 작은 창고도 있고요. 꼬마들이 돼지 오줌보 차며 노는 곳인데, 지금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아, 그래?”

로벨과 호른 경이 모두 반색했다. 그리고 뒤늦게 표정을 수습했다.

“그런 곳이 있구나. 우리가 갈 일은 없지만.”

“그럼 계속 순찰을 도시지요. 험! 험!”

순시 방향은 자연히 병원 동쪽이었다. 마녀 키르케는 입을 가리고 웃다가 손을 흔들었다.

“봄이야. 봄.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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