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66화 (566/605)

566화. 믿음

어린 집사는 의기양양한 기사들을 못된 짐승 보듯 보았다. 기사란 족속들의 평소 행실을 보면 분명 사고 친 것이다.

“혹시 목장을 털었나요? 돼지농장? 가축상인은 아니죠?”

오후 늦게 빌려 간 수레에는 먹고 남은 고기와 짐승 가죽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엘리엇 백작의 수행원과 울프 용병단, 찰드 촌장의 아들과 일꾼까지 얼마나 폭식했는지 얼굴에 기름이 흐르고 배가 빵빵했다.

“사냥했다니까. 사냥.”

로벨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칭찬을 바라는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로벨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경의 창 솜씨는 하이랜드 제일이오!’, ‘으하핫! 무슨 말씀을! 경의 활솜씨야말로 웨던랜드 최고지요!’ 어쩌고 금칠하는 기사들의 모습이 참 아니꼬웠다. 그래도 뭐라 할 수 없어 큰 거 마려운 소리만 냈다.

송아지만한 멧돼지가 다섯 마리고, 새끼 양만한 멧돼지가 아홉 마리였다. 서른세 명의 사냥꾼 패거리가 배터지게 먹어도 티조차 나지 않았다.

“날씨가 쌀쌀하니 금방 상하지는 않겠지만, 보관할 장소가 문제네요.”

“창자를 씻어서 가져왔어. 소시지로 만들면 올여름까지 먹을 수 있을 거야.”

“그건 뭐, 잘 생각하셨네요.”

어쨌든 식비를 아끼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었다. 로벨은 좀 더 칭찬하라고 무용담을 떠들었지만 인색하기로 유명한 어린 집사는 칭찬도 많이 아꼈다.

“제2차 북해무역협정 초안이에요. 저번처럼 사망 핑계 대지 못하게 아예 기간으로 12년 잡았어요. 왜 12년이냐고요? 저쪽이 3년 주장한 거 최대한 늘린 거예요.”

어떻게 하면 2배도 아니고 4배로 늘릴 수 있는지 궁금한데, 휘청거리며 나오는 잉그비아 왕국 행정관이 답을 주었다.

“이제 다 끝난 거야?”

“리처드 2세 왕이 도장을 찍으면요. 성 보리히의 축일까지 답신하지 않으면 협상을 거부한 것으로 알고 조치할 거라 못 박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한 적 없지만 걱정하지 말라니까 걱정하는 척했다. 이제 입장이 바뀌었다. 어린 집사가 ‘어흠! 어흠!’ 하며 칭찬을 요구했다. 누구와 달리 손이 큰 로벨은 ‘잘했다’, ‘대단하다’, ‘우리 집사 최고다’,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라’ 등등 비행기 360도로 태웠다. 비록 비행기가 뭔지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협상이 끝났으니 이별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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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로드릭 시티 서문 밖까지 엘리엇 백작을 배웅했다. 산 넘고 바다 건너 400마일을 돌아갈 사절단이니 이 정도는 해줘야 마땅했다.

“고생했는데 줄 것이 없어 미안하오.”

금화와 은화를 자루로 주긴 했는데, 기사라서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페닝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진짜 고생은 행정관과 수행원이 한 탓도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뭐 없습니까?’하는 간절한 시선도 보였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엘리엇 백작이 말머리를 살짝 돌리고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 듯하니 솔직하게 고백하겠소.”

로벨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고백하니까 호른 경에게 고백한 과거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먼저 고백한 게 억울했다. 분명 먼저 좋아한 것은 호른 경인데... 이게 다 붉은 산의 처절한 일화를 기억 못하는 탓이었다.

로벨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엘리엇 백작 홀로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존 2세 폐하 서거 이후 오랜 시간을 방황했습니다. 명예와 재산을 잃은 기사를 받아줄 군주는 없으니 길고 긴 고난의 세월이었습니다.”

“백작 정도 되는 기사를 못 알아보다니, 안타까운 일이오.”

로벨의 위로에 엘리엇 백작이 웃었다. ‘이 인간, 지금 아무 생각이 없구나’ 엘리엇 백작의 고난은 능력 문제가 아니었다. 에드워드 3세 천하에서 배신자를 받아줄 가문은 없었다.

“그러다 지금의 주인을 만났습니다. 호렙산에서 옛 신의 계시를 받은 선각자의 기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과오를 잊고 새로 시작할 수 있었지요.”

로벨은 존 곤트 공작을 떠올렸다.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오. 늦었지만 축하하오.”

엘리엇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제 주인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벨이 좀 더 집중했으면 여기서 이상한 점을 알아챘을 것이다. 엘리엇 백작이 존 곤트 공작 아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으니 굳이 옛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었다. 엘리엇 백작이 잠깐 뜸을 들인 후 말했다.

“현세(現世)에는 더 이상 ‘로벨 로드릭’에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마침내 로벨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로벨의 양 눈썹이 서로 친근감을 표시했다.

“현세?”

종교적, 철학적 의미로 종종 쓰이지만, 어감상, 문맥상, 그리고 분위기상 그쪽이 아니었다. 엘리엇 백작이 계속 말했다.

“그러나 십만의 군사로도 막지 못하는 것이 공포요, 백만의 금화로도 주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오. 가장 위험한 적은 그대 가까이 있으니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하지 마시오.”

“...백작의 주인은 누구요.”

로벨은 기시감을 느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주한 느낌. 익숙한 느낌. 엘리엇 백작은 수수께끼 같은 표정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사절단장이 갑자기 출발하자 기사와 수행원 모두 화급히 따라갔다. 며칠 사이 친해진 용병과 주민 사이에서 잘 가라는 인사가 어정쩡하게 흘러나왔다. 로벨은 멀어지는 잉그비아 왕국 사절단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누구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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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을 연거푸 치르고 나니 본격적인 봄이 시작되었다.

작년에 묵힌 춘경지를 갈아엎어 추위에 강한 보리 씨앗을 뿌리고, 자투리땅을 찾아 가축 먹일 순무를 심었다. 일 년 중 가장 궁핍한 시기지만 상업 도시 특성상 굶주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소규모 행상인은 겨울에 눈이 쌓여 찾아가지 못한 시골 마을로 무작정 상행을 떠났으나 덩치 좀 있는 상단은 영주, 지주, 시장, 상회장 등을 찾아가 공급계약부터 따냈다. 물자가 돌고 페닝이 흐르니 활기가 생겼다. 로드릭 상회 역시 올해 일할 일꾼들을 모집하고 겨울에 쥐어짠 양모와 기름, 꼬불쳐둔 곡물 등을 사들였다. 로벨은 헨리 피터 상회장의 보고서를 게슴츠레 보다가 물었다.

“맥주 장사로 부족해서 그래? 겨울이 지났는데 양모를 왜 이리 많이 산 거야?”

“사람이 어떻게 술만 마시고 살아요. 어허, ‘난 살 수 있어’ 같은 소리 할 거면 가만있으세요. 멋진 거 아니에요.”

신(新)북해무역협정을 위한 사전조사 겸 시장개척이라는데, 무엇을 조사하고 어떻게 개척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집사에게 물어도 알 수 없는 단어만 늘어놓을 테니 그냥 넘어갔다.

“좋은 일이지?”

“그럼요.”

“그럼 좋아.”

로벨은 의심 없이 인장을 찍었다. 로벨의 3년 치 용돈이 예산으로 지급되었다. 예산이 크다는 뜻인지 용돈이 적다는 뜻인지는 비밀이었다.

“이걸로 끝이야?”

“오늘 일은 끝이요.”

“내일 또 있어?”

“매일매일 있죠. 봄이잖아요.”

“...봄 싫어.”

자칫 겨울 공국이 될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그래도 공국이라 다행이다- 물론, 진심으로 봄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사의 용맹을 가두는 지긋지긋한 종이 감옥에서 탈출해 벽에 걸어둔 소드 벨트를 잡았다. 어린 집사가 서류를 정리하며 물었다.

“놀러 가세요?”

“노는 거 아니야. 순시야. 왕의 중요한 의무지.”

“재밌게 놀고 오세요.”

로벨은 끝까지 공무라고 우겼지만, 어린 집사는 저녁 먹기 전에 오라 토닥여서 내보냈다.

‘어린 집사는 날 너무 무시해! 칫!’

...라는 생각은 성을 나서는 순간 사라졌다. 봄 햇살은 따스하고 봄바람은 포근했다. 날카로운 창을 가진 초병은 수마에 패해 꾸벅꾸벅 졸고, 목검과 목마를 가진 아이들은 씩씩하게 언덕을 뛰어다녔다.

“앗! 기사님이다!”

로벨을 알아본 꼬마가 있었다. 정확히는 큰 칼을 차고 큰 말을 탄 로벨의 차림새를 알아보았다. 로벨은 장난스럽게 응했다.

“난 힘세고 용감한 기사다! 크앙-!”

힘세고 용감한 게 왜 ‘크앙!’인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은 좋다고 깔깔 웃었다. 기사들의 콧대 높은 선민사상을 생각하면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여자와 아이를 보호하는 ‘진짜 기사’ 로벨 로드릭의 땅이라 가능했다.

“그래봤자 우리 공왕님보단 약하잖아요.”

“응?”

“맞아! 우리 폐하님은 무적이라고!”

로벨은 순간 당황했다. 칭찬인지 모욕인지 헷갈렸다. 머리 좀 굵은 아이가 진지하게 물었다.

“기사님은 공왕 폐하하고 싸워서 이길 수 있어요?”

“글쎄... 싸워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그럼 별로 센 게 아니네요.”

기분이 살짝 나쁜 것을 보아 아무래도 모욕 같았다.

“그래도 너희보단 셀 걸? 이리 와! 엉덩이를 때려줄 테다!”

“와악-! 도망가!”

“나쁜 기사님이 쫓아온다!”

어린아이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발 없는 목마 타고 껑충껑충 뛰어 도망가는 것 보면 진짜 겁먹은 것은 아니었다. 로벨도 진짜 혼낼 생각은 없으니 상관없었다.

“여기서는 저래도 되지만, 도시 밖에서 다른 나으리들 비위를 건들다 크게 다칠까 걱정됩니다.”

“어...? 펄프 대장?”

흰머리가 정수리 가까이 벗겨진 펄프 대장이었다. 사실 머리숱만 줄어든 것이 아니었다. 나이 탓에 체구도 줄었다. 부대 밖에서 보면 꼬장꼬장한 노인 같았다. 실제 성격도 꼬장꼬장했다.

“어린 집사가 놀러 나간 공왕 폐하를 모시라 하더군요.”

“...노는 거 아니라니까.”

노병의 지혜는 천금의 가치가 있는 법. 로벨이 화내기 직전까지 놀리다 딱 끊었다. 그리고 기꺼이 노는 데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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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시티의 인구는 매년 꾸준히 늘어났다. 인근 영지에서 도망 온 농민, 일거리를 찾아 흘러온 기술자, 치안을 믿고 찾아온 미망인, 은퇴 후 정착한 용병 등등. 어린 집사와 페리 행정관이 몹쓸 말을 쏘아붙이며 통제했음에도 시가지는 포화 상태가 되었고, 비교적 한적한 동문과 울프 용병단 요새 주변에도 가건물이 들어섰다. 세금을 걷는 그람 형제 입장에서는 욕 나오지만, 관광객 마인드로 싸돌아다니는 로벨과 펄프 대장은 꽤 재미있었다.

“이런 곳에서 음식을 파네? 뭐지? 영원의 스튜(Perpetual Stew)인가?”

“썩은 내장이 들어간 부랑자의 요리입니다. 군침 흘리지 마시지요.”

“어어? 술도 파는데?”

“술도가에서 나온 찌꺼기를 불린 겁니다. 거, 군침 좀... 어린 집사가 밥 안 줍니까?”

평생을 살아온 고향 땅인데 신기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마냥 좋은 것만 있지는 않았다. 성벽 아래에는 가난하고 몸이 성치 못한 자가 모인 판자촌이 있었다. 여기서 판자는 듣기 좋게 표현한 것이고, 기실 폐자재와 쓰레기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짐승 우리였다.

“시내에 일거리가 없어?”

“일손이야 항상 모자라지요.”

“그런데 왜 저들을 쓰지 않아?”

“신원을 알 수 없잖습니까.”

신분증이나 자격증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신원이 중요했다. 부모가 누구인지, 스승이 누구인지, 어디서 자랐고 누구와 일했는지 알아야 믿고 쓸 수 있었다.

막말로 페닝을 훔치거나 장사할 물건을 빼돌려서 도망가면 잡을 방법이 없으니 지인이거나 지인 네트워크를 통해 보장된 사람이 아니면 고용하지 않았다. 자유를 찾아 도시에 온 농민이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는 이유 중 하나였다. 로벨도 명목상 통치자라 금방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한 것이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저렇게 방치하는 것은...”

“싸움개 놈들을 동원해서 쫓아낼까요?”

“그런 뜻이 아니야.”

로벨의 성품을 잘 아는 펄프 대장은 농담이라 말했다.

“리암 수사, 아니, 수도원장이 이틀에 한번 꼴로 먹을 것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이틀에 한번?”

“그래서 아직까지 굶어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칼 맞아 죽거나 그냥 맞아 죽거나 얼어 죽는 사람은 종종 있는데, 굳이 일러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책을 세워야겠어.”

“공왕 폐하가요?”

펄프 대장이 불신을 보였다. 로벨은 엘리엇 백작의 말을 떠올렸다. 역시 믿음은 쉽게 살 수 없었다.

“어린 집사를 닦달하자.”

“역시 그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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