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5화. 관심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편적으로 추수가 끝난 늦가을과 땅이 녹기 시작한 이른 봄에 주로 사냥을 한다. 그러나 두 시기의 사냥은 약간 차이가 있었다. 가을에 하는 사냥은 월동준비의 일환으로 고기와 가죽을 마련하는 수렵의 목적이 크고, 봄에 하는 사냥은 겨울잠에서 깬 짐승이 민가에 해를 끼치지 않게 막는 구제의 목적이 컸다. 물론, ‘이런 이유다!’ 하고 딱 정해진 것은 아니고, 심심풀이 유흥으로 시도 때도 없이 사냥하기도 했다. 엘리엇 백작이 실망한 듯 물었다.
“회색늑대는 데려가지 않습니까?”
“그 녀석들은 나이가 많아 신통치 않소.”
사실 젊을 때도 신통한 적은 없지만, 포식동물 체면을 위해 나이 핑계를 대주었다. 그래도 대신 신통한 용병들이 많았다. 애꾸눈이 솜씨 좋은 크로스보우맨을 스무 명 골라왔다.
“아, 진짜. 나 오늘 야간근문데 빼 줘야 하는 거 아냐?”
“야! 너두? 나두!”
아침에 불려나와 짜증난 사람은 있어도 긴장한 사람은 없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꾸준히 유해 동물을 제거해 왔다. 가끔 잠이 덜 깬 멍청한 곰이 나타나지만 겨우내 굶주린 상태라 창과 활로 무장한 용병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설령 전설적인 불곰 내지 신화적인 회색곰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맨손으로 오우거 수십 마리를 때려잡은-그런 적 없다- 무적무패 왕이 함께 있는데 무엇이 무서울까. 애꾸눈의 걱정도 다른 쪽이었다.
“이 시기에는 잡을 만한 짐승이 많지 않습니다. 시간을 주시면 사냥감을 미리 좀 풀 텐데...”
“어린 집사가 싫어해. 나도 싫고.”
로벨도 풋내 나는 기사 종자가 아니라 양과 돼지를 준비했다. 사냥에 실패했다고 쫄쫄 굶으며 돌아올 수 없으니 뭐라도 먹긴 먹어야 했다. 허풍쟁이가 높은 확률로 도살될 가축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토끼라도 잡으면 좋겠습니다요.”
“초 치지 마. 불길하잖아.”
로벨 일행과 엘리엇 백작 일행은 로드릭 시티를 가로질러 북문으로 향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한 시민들은 무장행렬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다 로벨을 보고 크게 반겼다.
“아앗! 로벨 왕이다!”
“에끼! 공왕 폐하가 네 친구냐?”
“공왕 폐하 만세! 무적무패 왕 만세!”
로벨의 인기는 대단했다. 제왕학을 몰라도 절대적인 권력과 맹목적인 사랑이 동반되기 힘들다는 것은 알았다. 당대에 힘으로 왕좌에 오른 이가 만민의 존경을 받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엘리엇 백작이 진심을 장난으로 바꿔서 물었다.
“비결이 무엇입니까?”
“글쎄... 본인은 잘 모르겠소.”
구태여 말하자면 싸울 때마다 이기는 무적 신화, 각지에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자금,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 검소한 왕실과 낮은 세금 등이 비결이지만,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기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엘리엇 백작은 좌우로 한 번씩 돌려 떠보다가 포기했다. 역시 보통내기 왕이 아니란 확신만 가졌다. 그리고 인적 드문 북문에 도착했다.
상인들이 출입하는 서문과 농부들이 출입하는 남문에 비하면 통행량이 거의 없었다. 벌목장이 하나 있긴 하지만 매일 나무를 패지는 않았다. 땔감을 구하거나 버섯을 채집하는 사람은 대부분 성 밖 농민들이라 도시를 가로질러 다니지 않았다. 애초에 숲 자체가 로벨의 사유지라 허가 없이 들어갈 수 없었다.
“본인의 사냥터가 멀지 않소. 그곳에 짐을 풀고 준비합시다.”
주인이 하자는데 손님이 반대할 수 없었다. 오솔길을 조금 지나자 1개 중대쯤 야영할 수 있는 널찍한 공터가 나타났다. 미리 연락받은 찰드 촌장의 장남이 일꾼들을 데리고 청소 중이었다. 허풍쟁이와 울프 용병단이 가세하니 천막이 뚝딱뚝딱 세워졌다.
그 사이 로벨과 엘리엇 백작 일행은 사냥도구를 골랐다. 잉그비아 왕국인을 위해 주목으로 만든 롱보우도 가져왔는데 거들떠보지 않았다. 장력이 100파운드 가까이 되는 활로 짐승을 맞히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활에 재주가 있는 기사들은 팔 길이와 완력에 맞는 셀프-숏 보우를 골랐고, 활을 못 쓰는 기사들은 다루기 쉬운 크로스보우를 골랐다. 로벨은 후자에서도 유독 못 하는 쪽이라 애꾸눈이 장전까지 완료해준 것을 받았다.
“공왕 폐하의 힘과 체격이면 활도 곧잘 다룰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좀 어려워...”
로벨은 난색을 표시했다. 검술보다 심오한 것이 궁술이라 어설프게 쏘았다가는 망신당할 수 있었다. 허풍쟁이가 분위기를 보다가 크게 외쳤다.
“그럼 몰이를 시작하겠습니다!”
귀족의 사냥은 끈기 있는 추격, 은신, 탐지, 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냥꾼과 사냥꾼 출신 용병이 먼저 숲에 들어가 짐승의 흔적을 찾고 귀족 나리가 잡기 편하게 몰아왔다. 로벨과 엘리엇 백작 일행은 시야가 좋은 곳에서 기다렸다가 정해진 순번으로 방아쇠만 당기면 되었다.
“먼저 쏘시겠소?”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계급이 깡패라 왜 니들끼리 순서 정하냐고 따지는 기사는 없었다. 왕과 백작은 말을 타고 느긋하게 몰이꾼 신호를 쫓아갔다.
“예전에 여기서 요정왕을 보았소.”
“요정... 말입니까?”
“그냥 요정이 아니라 요정왕이요. 믿기 힘들겠지만 이 흐룬팅이 그 증거요.”
“그러고 보니 명검을 두 자루나 가지고 계시군요.”
사냥꾼에게는 직업이지만 귀족에게는 취미인 이유가 있었다. 호위를 잔뜩 거느리고 산책하듯 돌아다녔다. 과연, 신통한 용병들이라 금방 한 마리 몰아왔다. 뿌우우우-웅-!
엘리엇 백작은 깃이 네 개 달린 화살을 골라 신중히 시위에 걸었다. 기사(騎射)에 능한 듯 손끝에 흔들림이 없었다. 부러운 재주였다. 그때, 새순 돋은 앙상한 덤불에서 오소리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나, 나왔다!”
“백작! 어서 쏘시오!”
엘리엇 백작보다 주위의 기사들이 더 난리였다. 무적무패 왕에게 사냥까지 질 수 없다는 자존심이었다. 엘리엇 백작은 차분하게 시위를 놓았다. 퉁- 시위 튕기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15도쯤 높이 쏘아진 화살이 중력에 이끌려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낯선 장소와 익숙지 않은 활이라 빗나갈 법도 한데 정확히 오소리의 목덜미를 뚫었다. 긴 잠에서 깨어 둔한 탓도 있으나, 그걸 감안해도 훌륭한 솜씨였다.
“오오오! 역시 엘리엇 백작이오!”
“잉그비아 왕국의 기사답소!”
로벨은 크로스보우를 어깨에 걸치고 두 손으로 박수쳤다. 싱거운 반응에 흥분이 가라앉았다.
“...이거 먹을 수 있나?”
머리에서 꼬리까지 4피트쯤 되는데 살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겉가죽은 쓸만 해보였다. 허풍쟁이가 화살을 뽑아서 가져오자 엘리엇 백작이 은화 한 닢을 던졌다.
“가죽을 벗겨서 손질하도록. 공왕 폐하께 선물로 드릴 테니.”
허풍쟁이는 ‘그걸 왜 나한테 시키십니까요?’하는 반항적인 눈빛을 보내다가 로벨한테 준다는 말에 냉큼 챙겨 물러났다.
다음은 로벨 차례였다. 로벨의 사격 솜씨를 잘 아는 사람들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사냥터를 돌았다. 슬픈 걱정이고, 쓸데없는 기대였다. 해가 중천에 떴지만 사냥감이 없었다. 어색한 표정의 몰이꾼이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진 게 전부였다. 로벨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오.”
“이럴 때도 있는 법이지요.”
애써 고른 활을 써보지도 못한 기사들은 허탈하게 구시렁거렸다. 삐쩍 골아 먹지 못할 오소리지만, 그거라도 잡은 엘리엇 백작이 승리자였다.
“지금쯤이면 야영지에 불을 피웠을 것이오. 가져온 고기를 먹고 오후 늦게 돌아갑시다.”
가장 슬픈 것은 기사들이 아니었다. 사슴이라도 한 마리 잡았으면 어찌어찌 살아서 돌아갔을 텐데, 인간들이 무능하여 가축의 운명이 정해졌다.
힘 좋은 용병이 새끼 양을 주저앉혀 뒤집었다. 새끼 양은 곧 닥쳐올 죽음을 직감한 듯 구슬프게 울었다. ‘메에에- 메에-’ 그러나 저항은 심하지 않았다.
가업이 도축업자라는 용병이 날카로운 대거로 가슴을 찔렀다. 3인치쯤 갈랐을까, 심장의 동맥이 끊어진 듯 양의 움직임이 멈췄다. 도축업자 용병은 양이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한 후 배를 길게 찢었다. 우선 내장을 제거해야 했다. 커다란 대야에 위장, 허파, 간, 창자 등을 담고 핏물을 뺐다. 먹지 못할 부위도 바닥에 흘리지 않게 조심했다. 피 냄새에 민감한 짐승이 어슬렁거리면 곤란하기에 야영지 먼 곳으로 가져가 버릴 것이다.
속을 비웠으면 겉가죽 차례였다. 엉덩이에서 목으로 길게 칼집을 내어 우악스럽게 가죽을 뜯어냈다. 계란껍질처럼 잘 떨어지는 곳도 있지만, 살과 근육이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곳도 있었다. 그때는 손칼로 두어 번 긁어 벗겨냈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똑바로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곧 먹는다는 것이다. 먹는 것에 기만은 없었다. 고대 철학자 같은 소리지만 사실 단순했다. 깨끗이 발라낸 고기가 불 위에 올라가자 한마음으로 한뜻으로 군침을 삼켰다.
“고기가 모자라겠는데? 험블 파이를 만들까?”
“윽... 그거 싫은데...”
허풍쟁이는 대야에 담긴 내장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저걸로 만든 음식은 높은 확률로 용병 몫이었다. 로벨이 인간 제일주의 사상으로 고민을 덜어주었다.
“남은 가축도 다 잡아.”
“공왕 폐하 만세!”
숙련된 용병이라 양 한 마리 해체하는데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고기가 노릇노릇 익는 데는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로벨은 관례대로 고기를 썰어 엘리엇 백작 일행에게 나눠주었다. 직접 사냥한 고기였으면 좋았겠지만, 아쉬운 대로 예의는 지켰다.
엘리엇 백작은 천박한 나무 그릇에 담긴 고깃덩이를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기도는 하지 않습니까?”
로벨은 고기를 큼직이 베어 물려다 그대로 멈췄다. 옛 신의 기사, 살아있는 복자, 지상에 강림한 천사(?) 등으로 불리는 것치고 신앙생활은 거의 하지 않았다. 기사가 원래 그러해서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같은 기사인 백작이 지적했다.
“야외에서까지 그래야겠소?”
“수도원에서 자란 공왕 폐하라 한번 여쭤봤습니다.”
활 쏘는 재주 말고도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전쟁은 못 하면서 이상한 것만 잘했다. 엘리엇 백작은 어색하게 눈치 보는 기사들에게 먹으라 손짓했다. 그러나 먹을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세상일을 모두 뜻대로 하시지만, 사냥은 그렇지 못하군요.”
“옛 신 말이오?”
엘리엇 백작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나 누구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사냥과 활에 관심이 없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가진 힘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걸까요. 어느 쪽이든 이 세상이 변하는 것은 많지 않겠군요.”
“그거 신성모독이요. 리암 수도원장이 있었으면 백작의 머리채를 물어뜯었을 것이오. 아닌 척해도 은근 독실한 사람이라...”
“수도사들은 살생을 싫어하지 않습니까.”
“옛 신께서도 좋아하진 않으시지.”
“공왕 폐하는 어떻습니까?”
로벨은 이상한 선문답에 식어가는 고기를 슬프게 생각했다.
“짐승을 많이 잡았으면 좋았을 거요. 그러면 이 식사가 한층 즐거웠을 테니.”
바로 그때였다. 고기 굽는 냄새에 이끌린 건지 숲 한 쪽이 요란스러웠다. 희희낙락해서 돼지를 뒤집던 용병들이 벌떡 일어났다.
“이 소리 뭐야? 돼지가 또 있어?”
“돼지는 돼지인데... 흐히익-! 멧돼지 가족이다! 활 들어! 아니, 창 들어! 이쪽으로 온다!”
로벨의 바람이 기가 막히게 이루어졌다. 기사들은 접시를 팽개치고 활을 챙겨 뛰쳐나갔다. 무적무패 왕과 그 부하들에게 잉그비아 왕국 기사의 기상을 보여줄 기회라 소리쳤다. 로벨도 신나서 함께 달려 나갔다. 이런 재미있는 볼거리를 놓칠 수 없었다. 그러나 오소리를 잡은 바 있는 엘리엇 백작은 천막을 나가지 않았다. 그저 의미 모를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