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62화 (562/605)

562화. 결말

강철갑옷 호가 측풍을 타고 한 바퀴 돌자 바다사자 호와 술래잡기하던 마지막 해적선도 슬그머니 남쪽으로 이탈했다. 조금 전까지 접현을 못해 악을 썼는데, 지금은 접현을 안 해 다행이라 안도했다. 까딱하면 중형 카락선 사이에 끼어 몰살당할 뻔했다.

결과적으로 로벨의 함대를 쫓던 세 척의 잉그비아 왕립해군은 동, 남, 북쪽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다. 사자에게 덤볐다가 혼쭐이 나서 도망가는 하이에나 같았다.

“부상자를 수습해. 키르케가 도와줄 거야.”

사자도 아주 멀쩡하지는 않았다. 쿼럴에 맞은 선원과 칼에 베인 용병이 다수였다. 전투 내내 숨어있던 마녀 키르케가 약 가방을 가지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어설프게 배운 것이 있는 기사들도 화살촉을 밀어 빼내고 불로 지져 지혈했다. 자지러지는 비명이 스테레오 타입으로 울려 퍼졌다. 그때, 선장이 핏자국을 피해 다가왔다.

“쫓을까요?”

로벨은 점차 멀어지는 해적선을 보며 물었다.

“쫓으면 잡을 수 있어?”

“한 놈은 배가 상했고, 한 놈은 선원이 많이 줄었으니 운이 좋으면 가능할 겁니다.”

“운이 없으면?”

“쫓다가 후속함대와 마주칠 겁니다.”

에르나 왕국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잉그비아 왕국 해군이 꼴랑 세 척일 리 없었다. 로벨은 빠르게 결정했다.

“청옥성으로 가자.”

해적선을 나포하면 어린 집사가 좋아할 테지만,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컸다. 예정대로 청옥성 함대와 합류해 사트로 항으로 귀항하는 것이 옳았다. 선장 역시 그리 생각한 듯 곧장 바다사자 호에 깃발 신호를 보냈다. ‘선주 명령. 추격 금지. 항로 유지’ 숙련된 뱃사람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해적 시체를 바다에 던지는 것으로 뒷정리를 마무리했다. 숨 쉬는 시체와 말하는 시체도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잉그비아 왕실 소속이면 포로로 잡아 두는 게 좋지 않습니까?”

조루아 경이 순진하게 물었다. 호른 경이 인생 선배, 전쟁 선배, 기사 선배로 말했다.

“왕의 병사라 해도 말단은 그냥 용병이오. 신원을 증명할 방법도 없고, 아는 것도 없소. 설령 증명이 된다 해도 오해, 독단, 거짓으로 몰고 갈 테니 의미가 없소. 잘해야 배상금 조금 받는 것이 전부인데, 피해가 크지 않으니 액수도 많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경도 연륜이 쌓이면 알게 될 것이오’라고 마무리하려다가 로벨을 보고 생략했다. 조루아 경 의견에 ‘오!’ 하다가 함께 시무룩해졌다. 영리한 왕인지 무식한 기사인지 자꾸 헷갈렸다. 아무튼 국가 간의 일은 정의와 상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이 일은 묵과하지 않을 것이오. 반드시 책임을 지게 할 테니...”

로벨은 북쪽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선장은 ‘혹시 린딘 시티를 찾으시는 거면 북동쪽입니다’ 라고 말하려다 호른 경의 살벌한 눈빛에 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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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옥성에 도착하자 영주 대리 펠릭스 경을 비롯해 볼탄 반도 기사들이 마중 나왔다.

호전적인 기사들은 전투 흔적이 역력한 강철갑옷 호를 보고 분개하며 린딘 시티로 쳐들어갈 것을 주장했으나 이성적인 기사들이 북풍이 부는 시기에 북해를 건너는 것은 좋지 않으니 내년 봄에 쳐들어가자 만류했다. 아무튼 전부 쳐들어가자는 의견이었다.

로벨은 마음으로 동조한 후 머리로 기각했다. 봉신들의 지원을 모두 끌어내면 모를까, 청옥성의 1천 명 남짓한 병력과 물자로 린딘 시티를 점령할 수 없었다. 존 공작이라면 해적이 실패할 것을 대비해 해안 수비를 강화해 놓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평화협정 직후에 전쟁을 일으키면 웃음거리가 되오.”

“저들이 먼저 협정을 어겼잖습니까?”

“전쟁은 아니잖소?”

“그럼 저희도 전쟁 말고 암살을 하지요! 존 공작을 죽입시다!”

청옥성의 펠릭스 경이 지나치게 흥분했다. 배를 오래 타서 뱃사람에 가까워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육지에서 온 기사들이 별종 보듯 보았다. 펠릭스 경은 뒤늦게 잘못을 파악했다.

“화가 나서 한 말이오. 화가 나서.”

그제야 그럼 그렇지 하고 납득했다. 아무리 외국인이라 해도 공작을 죽이는 것은 불명예였다. 적당히 두들겨서 잡아 올 수 있다면 당장 하겠지만...

“해적들은 기사님을 죽이려고 했는데요?”

“그야 해적이니까.”

“존 공작 기사님이 시킨 거 아니에요?”

“그래도 실행한 것은 해적이잖아.”

마녀 키르케의 4차원 사고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게 기사의 명예니 이해는 포기할 것을 권장한다.

“존 공작이 하얀 탑에서 나온다면...”

“그때는 본때를 보여줘야지!”

볼탄 반도 기사들이 한마음으로 전의를 불태웠다. 어쨌든 로벨을 왕으로, 주군으로 인정하니 나오는 태도였다.

로벨 일행은 청옥성에서 하루 쉬고 7척의 무장 갤리선과 함께 사트로 항으로 출발했다. 해적이 길목을 막을 거란 예상이 기우였는지, 아니면 로벨이 청옥성으로 갔다는 소식이 벌써 전해졌는지 추가적인 습격은 없었다.

로벨 일행은 만 하루 만에 사트로 항에 도착해 볼프 사트로 후작의 환대를 받았다. 성공적인 협상(?)과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는데, 평화 사절단, 청옥성 기사, 검은 성 기사까지 합류해 4, 500명이 북적였다. 검은 성 재정에 심각한 타격이 될 듯 싶었다.

“그래서 그걸 셋이서 훔쳐냈단 말이오?”

“셋이라고 해야 할지... 저 마녀는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그거 정말 너무 많이 섭섭하네요!”

“섭섭하면 어찌할 것이냐?”

“무섭게 노려볼 거예요! 아주 무섭게!”

“...그래. 계속 노려보아라.”

12기사의 몇 안 남은 후예이자 볼탄 반도의 절반-사실은 1/4 정도-을 지배하는 볼프 사트로 후작은 옹색하게 연회비용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로벨의 무용담을 듣고 기뻐하며 건배를 연창했다. 성직자 중 하나가 ‘도둑질을 축하해도 되는 거요?’라고 물었으나 따가운 눈총에 긍정적인 동의를 포기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로벨이 원주인이니 도둑맞은 것을 되찾아온 것뿐이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삼삼오오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 되자 볼프 후작이 조용히 물었다.

“악마 추종자를 보지 못했소?”

로벨은 찌꺼기가 남은 맥주잔을 못마땅하게 보며 대꾸했다.

“궁성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니...”

“궁성 안에도 분명 마법사가 있었을 것이오.”

옛 신의 성배를 하얀 탑에 가져다준 자들이니 일리가 있었다. 로벨은 린딘 시티에서 만난 사람들을 쭉 떠올려 보았다. 근위대장, 궁내부장, 리처드 2세의 보모, 존 공작의 수행 기사, 시종, 하녀, 경비병...

“의심스러운 자는 없소.”

“그렇다면 더욱 의아하군. 애써 훔쳐 간 성배를 고이 돌려준 이유가 무엇일 것 같소?”

“고이 돌려주다니? 본인이 얼마나 애써서 훔... 아니, 탈환했는데?”

“경비 몇 명 때려눕힌 게 전부지 않소?”

“아주 용맹한 경비들이었소. 곰처럼 크고 늑대처럼 날랜... 아, 진짜요.”

로벨의 치기는 18살 시절 그대로였다. 귀찮아진 볼프 후작은 적당히 긍정과 찬사를 붙여준 후 다시 말했다.

“악마 추종자가 훼방을 놓지 않은 것은 맞잖소?”

“그건 그렇소.”

볼프 후작은 술잔을 내려놓고 트림하는 척 주위를 살폈다. 로벨의 충성스러운 수행기사 호른 경만 아닌 척 귀를 기울일 뿐, 다들 각자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처음에는 성배를 미끼로 공왕을 불러들여 해치려는 게 아닐까 의심했소.”

“...그런데도 본인을 말리지 않았소?”

“공왕이 쉬이 당할 사람이 아니니까. 혹시 몰라 군대를 준비하긴 했소.”

볼프 후작의 말이 일리 있었다. 특히 쉬이 당하지 않을 거란 부분이 그러했다. 로벨이 배시시- 웃자 볼프 후작은 얼굴을 붉히고 헛기침했다. 한때 목숨 걸고 싸운 중년 사내가 예쁘장하게 보이는 거 보니 취한 게 분명했다.

“공왕이 잉그비아 왕국에서 피살되면 최소 3개 나라가 혼란에 빠지오. 악마 추종자가 자주 그린 그림이 나올 테지.”

“그건 아니오. 그들은 본인이 죽길 바라지 않소.”

로벨은 해명하고 후회했다. 볼프 후작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性)이나 마법 같은 은밀한 비밀을 공유할 사이는 아니었다. 볼프 후작이 이상하게 쳐다본 후 말했다.

“아무 수작도 부리지 않은 것을 보아 그 말이 맞는 듯하오. 그럼 다시 의문이오. 왜 성배를 훔치고, 왜 순순히 돌려준 것일까.”

“그것은... 그러니까...”

로벨은 알코올에 잠긴 전두엽을 두드려 억지로 가동시켰다. 북해를 넘나드는 동안 한 번도 고민하지 않은 문제였다. 정치와 음모, 사악한 마수(魔手)에 관해서는 볼프 후작이 훨씬 오래 고민해 왔다.

“조금 전에 결론이 나왔소. 결과를 보면 단순한 일이지.”

“결론? 결과? 그게 무엇이오?”

“볼탄 반도와 잉그비아 왕국이 진정으로 평화 협상하길 원한 것이오.”

로벨의 동공이 좌우로 한 번씩 움직이고 입술과 콧구멍이 벌어졌다.

“농담이오?”

지금까지 막후에서 갈등을 조장해온 자들이었다. 이제 와 평화를 주선하는 것은 유머였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소거법으로 제거한 볼프 후작은 진지했다.

“옛 신의 성배를 잉그비아 왕실에 넘기는 것으로 협상 계기를 만들었소. 실제로 그 때문에 평화 사절단을 구성하지 않았소?”

“그것은 율리오 추기경의 부탁으로...”

“추기경이 부탁하게끔 만든 것이오. 자신이 성배를 훔쳤음을 자백하는 것으로.”

로벨은 마법사의 왕 제퍼슨을 떠올리고 신음했다. 볼프 후작의 말이 맞았다. 굳이 로벨 앞에 나타나 성배 도둑임을 밝힐 이유가 없었다. 굳이 하얀 탑에 가져다 놓을 이유 또한 없었다.

“이제 본인이 궁금한 것은 하나요. 왜 평화가 필요해진 걸까. 두 가지 추측이 있소. 하나는 볼탄 반도가 아닌 다른 곳에 갈등에 유도하려는 경우요. 아마 서드 컨티넨트가 아닐까 짐작하오.”

“그럴 가능성은... 음...”

겨우 굴러가기 시작한 전두엽이 말했다.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서드 컨티넨트는 아직 인간의 인지가 닿지 않는 곳이었다. 상상을 빚어내는 마법사가 활약할 곳이 아니었다.

“또 하나는 목적을 달성하여 더 이상 갈등이 필요 없어진 경우요.”

“그들의 목적을 아시오?”

“본인은 모르오. 하지만 어렴풋이 짐작은 가오.”

볼프 후작은 로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볼탄 반도의 왕이자 무적무패의 기사 ‘로벨 로드릭’과 관련이 있을 것이오.”

볼프 후작의 추측이 옳았다. 악마 추종자에게 더 이상 갈등은 필요하지 않았다.

로벨을 지칭하는 이름이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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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과 평화 사절단은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햇수로 3년 만에 북해 전쟁이 끝났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북쪽 주민들은 물론이고, 징집되고 징발되어온 남쪽 주민들도 마침내 찾아온 평화에 기꺼이 기뻐했다. 여름이었으면 꽃송이가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고, 가을이었으면 빵 바구니가 산처럼 쌓였을 것이다.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영원한 우리의 왕! 로벨 로드릭 왕 만세!”

북부대로를 지나고, 늑대도로를 지나고,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을 지날 때마다 로벨 로드릭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일이었다. ‘진짜’ 로벨이라면 말이다.

“내가 로벨이야.”

로벨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20년을 그렇게 되뇌고 또 되뇌었다. 이제는 진짜 이름보다 익숙했다.

“난 로벨 로드릭이야.”

거짓말 하지 말라는 듯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그곳에서 로벨 로드릭이 아니란 증거가 붉게 흘러나왔다.

“나는 로벨이야... 나는 로벨이야... 나는 로벨이야... 나는 로벨이...”

로벨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로벨이 아니야.”

마녀 키르케의 지난 말도 옳았다. 남을 흉내 낸 결말이 결코 좋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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