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61화 (561/605)

561화. 증명

포탄은 돌로 만드는 것이 상식이다.

그게 왜 상식이냐 물으면 꼭 집어 설명할 수 없는데, 옛날 옛적 투석기 시절부터 돌을 쏘아왔고, 주위에 흔해 빠진 거라 소재가 아깝지 않기 때문이라 짐작되었다.

그러나 이롭지 못한 상식은 깨야 하는 법이다. 재료는 싸지만 제작비용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석공 하나가 겨우내 달라붙어 겨우 서너 개 깎으니 효율이 안 좋았다. 게다가 위력도 썩 좋지 않았다. 가끔 여러 조각으로 깨져 대인 피해를 입히지만, 의도대로 깨지는 것도 아니고 대인용으로 쓸 거면 처음부터 작은 조각을 채워 쏘는 포도탄이 나았다. 해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히리히리히야아앗-!”

마녀 키르케가 고깔모자 챙을 푹 누르며 주저앉았다.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상한 소리가 귓가에 감돌았다.

해적선에서 날아온 ‘철제 포탄’이 선교 뒤 미즌 마스트를 스치고 바다 저편에 물보라를 일으켰다. 해적의 포술이 조악하고, 400야드 거리가 좀 멀기도 하지만, 강철갑옷 호의 ‘강철 포탄’이 먼저 해적선을 강타한 이유도 있었다. 조루아 경이 혀를 찼다.

“4발 쏴서 1발 맞히다니...”

“허어? 모르는 소리 마시오. 이 거리에서 한 발 명중이 얼마나 대단한데.”

해적은 2발 쏴서 모두 빗나갔으니 비교대상이 마땅치 않았다.

“재장전! 재장전!”

선장이 명령하지 않아도 포수장과 포갑판 선원들은 밀려 나온 대포에 꼬질대를 쑤시고 화약과 포탄을 준비했다.

어린 집사 말을 빌려 돈 잡아먹는 청동 괴물이었다. 불꽃 한 번에 6파운드 화약과 8파운드 강철이 사라지니 금화·은화로 환산하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도 전함이 대포를 포기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비싼 만큼 위력이 확실했다.

“한 방 더 꽂으면 떨굴 수 있다! 돛을 노려라! 타륜을 맞히면 더 좋다!”

돛대를 부러트리면 최상이고, 돛을 찢거나 돛줄을 끊어도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콰콰과광-! 콰과광-!

2차 포격이 시작됐다. 최상은 아니지만 괜찮은 결과가 나왔다. 포탄 하나가 흘수선 가까운 곳을 뚫고 들어갔다. 강철 포탄의 위력이었다.

“우와아아아아!”

“이 자식들! 내 해낼 줄 알았다!”

꼬질꼬질한 강철갑옷 선원들이 좋아서 펄쩍 뛰었다. 덕분에 해적선도 분주했다. 전투에 앞서 침수부터 막아야 했다.

“이걸로 2대 2야.”

해적선 A와 포격을 주고받는 사이 B와 C가 후미에 바짝 붙었다. 닻을 던지고 대포를 쏘아 속도가 많이 줄었다. 선장의 명령으로 급히 닻줄을 잘랐지만, 바람으로 움직이는 범선 특성상 가속이 붙는데 오래 걸렸다.

콰아앙...!

바다사자 호가 대포를 쏘아 응원했다. 해적선 한 척이 물보라에 기우뚱거렸다. 거리를 생각하면 명중이나 다름없는 정확도였다. 전투 경험만 보면 바다사자 호가 강철갑옷 호보다 몇 곱절 많았다.

해적선이 수기신호를 나눴다. 오늘만 삶이고 내일은 덤이라 여기는 해적치고 정교한 신호였다. 선장이 수염을 한 번 쓸어 만지고 말했다.

“역시 보통 해적이 아니군요. 잉그비아 왕립해군입니다.”

“해군이요? 해군이 왜 해골기를 걸어요?”

마녀 키르케가 선교 난간 위로 머리를 쓰윽- 올리며 물었다. 선장은 선주의 애인으로 알려진 마녀를 존중했다.

“해적과 해군의 차이는 세금을 내냐 안 내냐 뿐입니다. 하는 짓은 어차피 같지요.”

선장의 말은 살짝 틀렸다. 아무리 그래도 해군이 해적보다 ‘작전’에 충실했다. 잉그비아 왕립‘해적’ 한 척이 방향을 틀어 바다사자 호를 쫓아갔다.

“이제 1대 1이군요.”

전선을 이탈한 배는 없으니 언제든지 1대 2나 2대 3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 싸울 배는 한 척이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에게는 그게 중요했다.

“왼쪽으로 온다! 전원 전투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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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몸뚱이는 참으로 신기해서 아침까지 멀미, 추위, 매스꺼움, 손떨림 등을 호소하던 용병이 싹 사라졌다. 생존본능이 모든 이상신호를 뒤로 미룬 것이다. 덕분에 당장은 불편 없이 쳐죽이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

“기다려라! 내가 신호할 때까지 기다려라!”

조지 솔트가 큰 소리로 사격을 통제했다. 본래는 애꾸눈이 할 일인데, 저격을 위해 망루에 올라 지휘권이 부관 조지 솔트에게 넘어왔다.

해적선은 20야드가 안 되는 거리로 바짝 붙어 올라왔다. 두 전함의 크기를 생각하면 스치는 수준의 접근이었다.

“지금이다! 쏴라!”

고르고 골라 뽑은 울프 용병단에서 또다시 골라 선발한 최정예 호위부대였다. 100야드의 표적을 맞히는 정예 사수에게 20야드는 눈 감고도 쏠 수 있는 거리였다. 10발 중 7, 8발이 해적의 머리와 몸통을 뚫었다. 흔들리는 배가 아니었으면 1, 2발은 더 맞았을 것이다.

“저 새끼들이!”

“발사! 발사!”

해적이 곧장 반격했지만 직업 경력이 전쟁 경력인 울프 용병단은 바리케이드에 등을 붙이고 엄폐한 뒤였다. 동작이 굼뜬 선원 몇 명만 팔다리를 잡고 쓰러졌다.

“재장전!”

용병들은 앉은 채로 다리를 뻗어 등자를 밀고 윈드라스를 감았다. 쉬이 볼 수 없는 재주였다.

팡- 팡- 쒸이잇-!

선원들이 순차적으로 쿼럴을 쏘고, 망루 위의 애꾸눈이 간부, 지휘관, 선동꾼으로 보이는 해적을 저격했다. 그렇게 시간을 버는 사이 울프 용병단이 장전을 마쳤다.

‘셋. 둘. 하나.’

조지 솔트가 손가락으로 신호를 하자 일제히 몸을 돌려 모래포대에 크로스보우를 거치했다.

“쏴!”

첫 사격보다 정확하고 치명적이었다. 해적 십수 명이 동시에 쓰러졌다. 해적선장은 이대로 안 되겠다 판단했는지 방향을 틀어 접근을 시도했다. 갑판과 갑판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거창(据槍)!”

조지 솔트는 빈 쇠뇌를 옆으로 던지고 칼을 뽑았다. 첫 실수였다. 배의 속도와 질량을 우습게보았다. 크기 때문에 느린 것 같아도 시속 12마일로 움직였다. 무게 또한 어마어마하여 반올림하는 최소 단위가 다섯 자리 파운드였다. 그야말로 움직이는 성(城)이었다. 성과 성이 충돌하는데 가만히 서 있으면 안 되었다. 조지 솔트를 따라 칼과 창을 뽑은 울프 용병단은 충돌로 균형을 잃고 와르르 자빠졌다. 선원들이 선원 특유의 걸쭉한 욕을 퍼부었다.

“저 멍청한 땅개 새끼들!”

해적들이 갈고리를 던지고 영차, 영차, 여기엉차 끌어당기는 황금 타이밍에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못 박힌 널빤지가 걸리고 ‘북해의 주인’을 자처하는 잉그비아 왕립해군이 넘어왔다.

“이 냄새나는 해적놈이...!”

“네놈 말똥냄새가 더 심해!”

살인과 약탈을 업으로 삼은 성인 치고 유치한 대화가 오갔다. 그렇다고 행동까지 유치하지는 않았다. 해적이 내리치는 커틀러스에 용병 어깨가 4~5인치쯤 파이고, 비명과 함께 찌른 숏 스피어에 해적 넓적다리가 앞뒤로 꿰뚫렸다. 양쪽 다 치명상이라 오래 살기 힘들었다. 그리고 비슷한 외상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지상에서 제대로 진을 짜고 붙으면 해적이 두 배, 아니, 열 배 많아도 울프 용병단의 상대가 될 리 없다. 그러나 좁고 흔들리는 선상에서는 자리를 지키는 것이 힘들었다. 전우의 도움 없이 각자 싸워야 했다. 그나마 무장이 좋아 엇비슷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호른 경, 조루아 경, 왼쪽을 맡으시오.”

전황을 바꿀 방법은 간단했다. 개인이 아주 많이, 아주아주 많이 강하면 되었다.

“공왕 폐하! 폐하! 제길! 경들은 후미의 병사를 챙기시오!”

강철갑옷 호에는 강철갑옷을 입은 기사가 13명이나 있었다. 최소 9년, 최대 22년을 칼질만 한 인간병기, 살육병기. 학살병기였다. 그 위력은 등장하자마자 증명되었다. 퍼걱-!

로벨의 강철주먹이 쓰러진 용병을 노리는 해적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상투적인 관용구가 아니라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철편으로 감싼 진짜 강철주먹이었다. 두개골이 찌그러지고 눈, 코, 입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헉! 공왕 폐하?!”

구원받은 용병이 무심코 소리쳤다. 본인 딴에는 감사함의 표현일 텐데 은혜는 아니었다. 가까이서 칼질하던 해적이 일제히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갑옷이었다.

“공왕 폐하라고?”

“무적무패 왕! 로벨 왕이다!”

“저자가 타겟이다! 잡아!”

존 공작이 보냈노라 대놓고 광고하는 꼴이 우스운데, 기세는 웃지 못했다. 외팔이가 부서진 바클러를 이빨로 풀어 던지고 소리쳤다.

“이런 망할! 전부 공왕 폐하를 지켜... 줄 필요가 없네?”

호른 경의 교육이 강렬한 탓에 반응은 했지만, 누구도 아닌 무적무패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이었다. 위아래로 날아드는 커틀러스를 파리 쳐내듯 쳐내고 앞발로 복부를 뻥 뚫었다. 이것도 관용어가 아니었다. 사베튼에 송곳칼을 달아놔서 진짜 배때기에 구멍이 났다. 칼로 찢지 않아도 내장파열로 죽었을 것 같지만, 아무튼 무시무시했다.

로벨이 칼을 뽑은 것은 용감한 해적 셋을 때려눕힌 다음이었다. 조금 덜 용감한 해적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전란이 끊이지 않는 볼탄 반도에서 ‘기사 중의 기사’란 칭호를 받은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인간 맞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온몸이 흉기인 로벨이 진짜 흉기를 휘두를 공간을 확보했다. 어깨에 칼침 맞고 자빠져 끙끙거리는 용병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느그들 이제 큰일 났다. 우리 폐하 열받으셨다.”

로벨은 ‘열 안 받았는데?’하고 정정해주지 않았다. 해적들이 움찔하여 반보 물러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거기 뭣들 하냐! 계속 쳐! 쳐 죽여!”

아직 배를 건너오지 않은 해적 간부가 소리쳤다. 해적들이 얼굴 근육으로 욕을 했다. 그러나 정작 로벨은 긍정했다.

“저 말이 맞아. 계속 하자.”

“자, 잠깐...!”

로벨은 널찍해진 공간에서 마음 편히 검광을 흩뿌렸다. 겨울 햇살이 눈부시게 번쩍였다. 피와 비명이 점철되어 아름답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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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도 로벨이지만, 로벨에게 자극받은 호른 경, 조루아 경, 기타 볼탄 반도 기사들도 무시무시하게 활약했다. 해적의 짧은 무기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뚫지 못하니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장병기를 이용해 바다로 밀어내려는 시도를 했지만, 애꾸눈 이하 저격수들이 가만 두고 보지 않았다. 애초에 로벨한테는 장병기를 가져다 대지도 못했다. 역으로 끌려가서 두 쪽으로 쪼개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전세가 뒤집히자 겁에 질린 해적은 모선으로 탈주했다. 자기가 건 갈고리를 자기 손으로 끊어내는데, 얼마나 질렸는지 동료가 넘어오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해적 일부가 바다에 빠졌다. 로벨의 짐작대로 몸이 가볍고 수영을 할 줄 알아도 소용없었다. 차디찬 파도가 좌우로 한 번씩 덮치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로벨은 흐룬팅에 흐르는 핏물을 털어내고 전장을 넓게 살폈다. 바다사자 호는 백병전을 피해 멀찍이 돌며 대포와 쇠뇌로 싸우고 있었다. 기사가 없고 용병도 몇 안 되니 현명한 판단이었다. 로벨이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하고 시간을 버는 듯도 했다.

포격전으로 흘수선에 구멍이 난 해적선은 긴급 수리를 마치고 조금씩 움직였다. 배에는 얼굴이 없지만 왠지 당황한 것 같았다. 좌현에서 전투 중이면 우현에 붙어 가세할 텐데, 수리가 끝나기 무섭게 결판이 나버렸다.

“저것들을 어쩔까요?”

선장이 헝클어진 머리를 넘기며 물었다. 선장답지 않게 익살이 묻어났다. 다른 선원과 마찬가지로 무적무패 힘에 흥분했다. 해적이 아니라 해적 아비와 할애비가 와도 이길 자신감이 넘쳤다. 로벨은 흐룬팅의 칼날을 살핀 후 칼집에 밀어 넣었다.

“고민하는 거 같은데, 도와주자.”

“그거 자비로우십니다.”

선장은 껄껄 웃은 후 몸이 멀쩡한 선원을 호명해 직접 지시를 내렸다. 각각의 지시는 간단명료한데, 각각의 행동이 합쳐지자 강철갑옷 호가 육중한 몸을 움직였다. 그 모습은 흡사 수십 명의 도적을 때려눕히고 마지막 한 놈을 향해 돌아서는 기사 같았다.

“으아아...”

해적은 로벨의 자비를 받아들였다. 즉시 뱃머리를 돌리고 도망쳤다. 잉그비아 왕립해군의 명성이 우스웠다. 또한 무적무패가 육지와 바다를 가리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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