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60화 (560/605)

560화. 닻

겨울바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특히 바다 위에서 습기와 짠내를 동반해 몰아치는 겨울바람은 불호를 넘어 혐오를 자극했다.

“으으으... 불이라도 피우게 해주지... 진짜 뒤지겠다...”

사방이 뻥 뚫린 갑판은 말할 것도 없고, 여기저기 크고 작은 구멍이 난 선실도 무시무시하게 추웠다.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쳤다.

“그래도 담요는 챙겨줬잖은가.”

“이것도 호른 나으리가 가져온 거지?”

“그 양반이 고지식해도 의리는 있지. 우리 공왕 폐하와도 가장 친하잖아.”

‘채찍 맞은’ 빌보가 뭐라 구시렁거렸으나 대놓고 부정하지는 않았다. 숨 쉴 때마다 등짝이 무섭게 아프지만 내심 용병단에서 쫓겨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밀리지 않고 따박따박 나오는 급료와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명성, 늙거나 다쳐도 책임져주는 고용 안정성이 업계 통틀어 최고였다. 열심히 싸워서 다치니 팽하는 영주와 일거리가 없어 도적질하다 아름드리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동종업계 종사자를 생각하면 채찍 정도는 참을 만했다. 조지 솔트가 위로하듯 넌지시 말했다.

“이 바람 덕에 이틀이면 사트로 항에 도착한다.”

가족과 연인이 있는 용병들은 덜덜 떨면서도 미소 지었다. 두 왕이 평화 협정을 맺었으니 한동안은 평화로울 것이다.

“카악- 퉤-!”

친구는 많지만 여자는 없는 외로운 외팔이가 담요를 두르고 일어났다. 그 친구도 대부분 여기 있으니 집에 간들 반겨줄 사람이 없었다. 허풍쟁이가 안쓰럽게-그래서 다분히 놀리듯- 물었다.

“뭐여? 어디가?”

“오줌 누러간다.”

“아하, 그쪽으론 쓸모가 있구만?”

“...갔다 와서 때려주마.”

외팔이는 코를 훌쩍이고 컴컴한 선실을 나섰다. 상부 갑판에 올라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날씨가 많이 안 좋았다.

“견시원이 없나?”

메인 마스트의 까마귀 둥지를 올려다보았다. 로드릭 가문 깃발이 거세게 펄럭일 뿐, 사람 그림자는 없었다. 하긴, 이 날씨에 망루를 오르면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동사할 것이다. 내일이면 볼탄 반도 해안에 접어드니 걱정도 없었다. 조타수와 갑판원이 몇 명 있지만 순풍이라 크게 할 일은 없어 보였다. 갑판 밖으로 돌출된 열악한 변소-쿼터 갤러리(Quarter Gallery)가 싫은 외팔이 입장에서 잘된 일이었다. 적당한 곳에서 바지춤을 풀었다.

“어어... 어...?”

자연에서 온 것을 자연에게 돌려주려는 찰나, 기묘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외팔이는 애써 꺼낸 것을 도로 넣고 눈알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체를 알아냈다.

“이 날씨에 싸돌아다니는 배가 또 있네?”

“거기 누구요? 왜 밖에 나온 거요?”

외팔이의 수상쩍은 행동을 감시하러 선원이 다가왔다. 양쪽 다 로벨 왕의 부하지만 소속이 달라 경계가 심했다. 이 육군과 해군의 깊은 골은 향후 수백 년 동안 계속될 것이다.

“그, 그냥 나왔는데, 그게 아니라, 저것 좀 보쇼. 저게 뭐요?”

노상방뇨, 아니, 선상방뇨(?)하다 적발된 외팔이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진짜 관심을 가져야 할 화제였다.

“...저게 왜 저기 있지?”

“저게 뭔데? 댁이 아는 배요?”

선원은 대답하지 않고 후다닥 선교로 뛰어갔다. 괜스레 무안해진 외팔이가 침을 뱉었다.

“하여간 저 뱃놈들은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없어. 에잇, 퉷! 퉤엣-!”

뱃놈들도 육지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저 멀리에서 오는 해골 깃발의 뱃놈들이 그러했다.

“뭐, 뭣이라고?”

“졸리 로저! 졸리 로저가 접근합니다!”

졸리 로저(Jolly Roger). 울프 용병단하고도 인연이 깊은 단어였다. 바로 해적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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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짧은 고민 끝에 필드 아머를 입었다.

쇳덩이를 입고 물에 빠지면 위험하다는 조언이 있었지만, 이 계절에 물에 빠지면 어차피 위험했다. 더구나 수영도 못했다. 호른 경, 조루아 경, 기타 기사들도 비슷하게 판단하여 완전무장하고 선교로 나왔다.

“몇 척이라고?”

“지금 확인된 것은 세 척입니다.”

“확인 안 된 게 있을까?”

“공왕 폐하를 노리고 온 해적이면 세 척이 전부일 리 없습니다. 먼저 출발한 배도 있을 테니 최악의 경우 앞뒤로 포위된 상황을 가정해야 합니다.”

겨울은 해적에게도 비수기였다. 바다야 항상 열려있지만 육지가 막힌 탓에 물자가 돌지 않았다. 제대로 된 해적들은 첫눈이 내리기 전에 크게 한탕하고 한적한 섬마을을 점령, 혹은 매수하여 봄까지 놀고먹었다.

“저들이 성실하지 못한 해적일 가능성은?”

“성실하지 못한 해적이 무장 카락을 세 척이나 몰고 다닐까요?”

“존 공작이 보낸 자들이군.”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지혜로운 호른 경과 경험 많은 선장이 결론 내렸다. 존 공작의 다급한 축객령이 이해되었다. 해적이라고 망망대해에서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루이틀만 가면 사트로 항이잖아. 따돌릴 수 없어?”

“그게 조금 힘듭니다. 이쪽은 사람부터 말(馬)까지 무게가 많이 나가고, 아무래도 중형 카락이라...”

“그럼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선장이 각오로 얼굴을 굳혔다.

“저는 뱃놈이지 기사가 아닙니다. 누가 이길지 알아맞히는 재주는 없습니다. 하지만 선주님께서 싸우라 하면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로벨은 용맹한 기사들과 울프 용병단을 믿었다. 하지만 물 위에 떠다니는 나무는 믿지 않았다. 호른 경이 신중하게 조언했다.

“청옥성이 멀지 않습니다. 공왕 폐하의 연합함대가 주둔 중이니 그들과 합류하여...”

“아, 그게, 청옥성으로 가려면 항로를 남서서로 돌려야 합니다.”

선장이 조심스럽게 말허리를 끊었다. 호른 경이 짜증 반 의문 반으로 물었다.

“그게 문제가 되나?”

“저 해적놈들이 북서쪽에서 나타난 게 문제가 됩니다.”

항해술을 몰라도 바람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았다. 청옥성으로 가려면 지금 나타난 해적 무리를 돌파해야 했다.

“우리가 사트로 항으로 가는 걸 알고 있으니 앞쪽에도 적이 있을 거야.”

“그렇다는 말씀은...”

“난 기사라 뱃일을 모르지만, 적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해야 하는 것은 알아.”

왕이자 선주이자 고용주인 로벨의 결정이 떨어졌다. 기사, 선원, 용병이 모두 따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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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명령이 떨어지자 소란은 있을지언정 혼란은 없었다. 밥벌이 도구를 상시 휴대하는 기사와 용병은 즉시 전투태세를 갖췄고, 선원 역시 무기고를 열러 하프 파이크와 크로스보우로 무장했다.

여기서 육지 무기와 바다 무기의 사소한 차이가 보이는데, 용병의 크로스보우는 윈드라스를 이용한 강뇌가 많고, 선원의 크로스보우는 염소발(Goat foot lever)을 이용한 속사 위주의 쇠뇌가 많았다. 쿼럴 또한 차이가 있으니, 용병의 쿼럴은 갑옷을 뚫기 좋은 쇠못 모양이 주류고 선원의 쿼럴은 밧줄을 자르기 좋은 끌 모양이 주류였다.

“이 상어도 씹다 버릴 머저리들아! 왼쪽에도 쌓아! 왜 오른쪽만 막냐!”

“그, 그야 해적놈이 나타난 게 오른쪽이니까요?”

“적함이 세 척이다! 매너 좋게 차례대로 접현하겠냐? 생각을 해라! 생각을!”

선장은 싸움을 모른다 했지만, 그것은 무적무패 왕 앞이라 겸손한 것이다. 뱃일을 오래 하면 해적이나 해적하고 다를 바 없는 해군하고 드잡이하게 되니 전투경험이 베테랑 용병 못지않았다. 방화용 모래 포대와 모포를 말아 넣을 그물망을 차곡차곡 쌓고 물을 끼얹었다. 평범한 해적이면 불을 쓸 리 없지만, 존 공작이 보낸 ‘암살자’라면 화물이 타든 말든 냅다 불화살을 쏠 것이다.

“저 선장 꼭 우리 대장 같은데?”

“뭐, 같은 캡틴이잖아.”

“으으으... 춥다... 물 뿌리니까 더 추워...”

“겁먹어서 떠는 게 아니고?”

“칼밥 먹은 게 몇 년인데 해적 따위한테 겁먹을까.”

울프 용병단은 쿼럴을 하나씩 들고 잡담을 나눴다. 말은 그렇게 해도 해전이라 조금씩 긴장했다.

“우리가 먼저 공격하면 안 돼?”

로벨이 순진하게 물었다. 선장은 ‘무적무패’가 육지 한정임을 깨닫고 간단히 설명했다.

“바람을 마주하고 싸우면 불리합니다.”

“그럼 여기서 자리 잡고 기다리면?”

“측면을 내주면 충각에 당할 수 있습니다.”

“범선에도 충각이 있어?”

“저들은 평범한 범선이 아니라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로벨은 전문가의 지식을 우대하는 편이었다. 선장이 그렇다고 하니 그냥 믿었다. 그 사이 애꾸눈과 애꾸눈이 인정한 명사수는 망루와 선미루에 자리 잡고 거리를 재었다.

“눈깔이 하나라 이럴 때 불편하군.”

애꾸눈이 안대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쇠뇌를 장전해줄 부사수가 의아하게 물었다.

“시력 좋지 않았수?”

“시력이 아니라 거리감이 문제다.”

육지에서는 주변 사물로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데, 구름과 파도뿐인 바다에서는 그게 잘 안 되었다. 애꾸눈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대포를 쏘는 거리가 450야드니까, 그때를 기점으로 판단하수.”

“음... 한번 해보지.”

그때 바다사자 호에서 수기가 올라왔다. 완벽하진 않지만 전투준비가 끝났다. 그것은 적들도 마찬가지였다.

해적선 3척이 넓게 산개해서 포위를 시도했다. 로벨이 있는 기함을 정확히 아는 행동이었다.

“역시 존 공작이 보낸 게 맞군.”

“이 개돼지만도 못한 자가...!”

조루아 경이 추위와 멀미를 잊고 무섭게 욕을 했다. 기사가 된지 얼마 안 돼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렇소. 옳소. 맞소. 돼지와 비교하는 게 실례요.”

기사가 된지 20년 된 로벨도 순진한 거 보면 그냥 천성일지도 모르겠다.

해적선은 점점 가까워져 4, 500야드까지 접근했다. 마주 달리면 1분 안에 머리를 부딪칠 수 있으나 사선으로 비스듬히 달려 거리가 쉬이 좁혀지지 않았다. 갑판 위에 꼬물거리는 해적이 보였다.

“포수장! 발포 준비!”

“발포 준비!”

“발포 준비!”

선교에서 내려진 명령이 갑판원의 복창으로 포갑판까지 전해졌다. 총 8문의 대포 중 우측 4문이 포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선장은 차분히 숫자를 세었다. 바퀴를 고정하고 심지를 심고 불을 준비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는 사이 거리가 400야드로 줄었다. 캐벌린 포의 충분한 사거리지만 포각이 나오지 않았다. 로벨은 ‘속도를 줄이면 되잖아?’ 생각하다가 물 위에 떠있는 배라는 것을 자각하고 다른 방법을 고심했다. 하지만 대개 그렇듯 첫 번째 답이 정답이었다. 경험 많은 선장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제동을 걸었다.

“닻을 던져라!”

“닻이라신다!”

“던져랏!”

수심이 깊어 바닥에 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습적으로 속도를 줄이기 충분했다. 카락선 기준으로 한 척 반 정도 떨어진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철갑옷 호 선장과 해적선장이 동시에 명령했다.

“쏴라!”

“Fire!”

옛 신이 해전까지 관장하는지는 모르나 강철갑옷 호가 한 박자 빨랐다. 별거 아닌 차이지만 승패를 가르는 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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