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화. 찝찝함
예절교육을 건성으로 받아도 상식선에서 지키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밥 먹을 때 때리지 않기, 알몸으로 산책하지 않기, 부모 욕은 사생결단 낼 때만 하기 등등. 3경이 지난 한밤중에 찾아가지 않기도 그중 하나였다.
“공왕 폐하, 고, 공왕 폐하, 존 오브 곤트 공작이 찾아오셨습니다.”
로벨은 가만히 눈을 떴다. 창틈으로 달빛이 스며들고, 재가 되다 만 난로불이 빨갛게 깜박였다.
“저, 공왕 폐하...?”
문 밖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검은 머리 빌보였나?’ 재작년에 입단한 크로스보우맨. 애꾸눈 중대 제3소대 소속. 그리고 오늘 밤 3번 초 근무자였다.
로벨은 소리 없이 일어나 흐룬팅을 칼집 채 꺼냈다. ‘검은 머리’ 빌보는 상식이 있는 친구라 이 시간에 자의로 손님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시 무례하고 폭력적인 상황이 예견되었다.
“공작을 안으로 모시고, 촛불을 가져와.”
로벨이 대답하자 인기척이 여럿 생겼다. 사슬 갑옷 특유의 마찰 소리, 속삭이는 소리, 창대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 거친 숨소리 등이 빠르게 흩어졌다.
숨 한 번 크게 쉴 시간이 지나자 방문이 빠끔히 열렸다. 어둠 사이로 십여 명의 무장 인원이 보였다. 익숙한 눈매의 울프 용병단도 있고, 우락부락한 덩치의 잉그비아 왕국 기사도 있었다. 그러나 문턱을 넘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그림자가 짙어 자세히 보이지 않으나 키와 덩치, 수염 모양 등을 보아 존 오브 곤트 공작이었다.
긴장한 것은 로벨만이 아니었다. 긴장감을 수치로 표현할 수 있다면 존 공작이 1.5배 정도 높았다. 공작의 시야를 공유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실루엣만 겨우 보이는 깜깜한 방에 칼을 쥔 무적무패 왕이 있으니 곰굴이나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달리 말하면 존 공작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허락 없이 찾아와 미안하오. 허나, 공왕이 먼저 시작했으니 용서를 구하진 않겠소.”
로벨은 칼자루를 반대쪽으로 옮기고 나직이 말했다.
“본인이 먼저 시작했다니, 무슨 뜻이오? 지금의 무례를 용서할 수 있게 잘 설명해야 할 것이오.”
존 공작은 어둠이 익숙해지자 가까운 의자로 걸어갔다.
“왕실 근위대원 셋을 상처 없이 제압하고, 자물쇠를 소리 없이 부순 후 옛 신의 성배를 골라 훔쳐 갈 자가 누가 있겠소?”
로벨의 시선이 오른쪽 아래로 흘러내렸다. 진심으로 완전범죄라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용의자가 정해져 있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무조건 잡아떼야 했다.
“보, 본, 본인은 모르는 일이오. 본인이 훔쳤다는 증거 있소?”
존 공작은 한숨을 쉬었다.
“...이곳 동쪽 탑을 통째로 수색한들 이미 빼돌렸겠지.”
당연히 그러지 않았다. 로벨의 무신경, 무계획, 무대책을 과소평가했다. 성배는 여전히 손수건에 쌓여서 침대를 굴러다녔다. 수색이고 자시고 이불 한 번 들추면 끝이었다. 로벨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공개적으로 밝히지 못하는 것도 알고 있을 테고...”
교회는 여전히 ‘진짜 성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가짜 성배’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악마추종자와 연관 있음을 시인하는 꼴이었다.
“설령 증거가 있어도 밝힐 수 없어 곤란하오. 성배 외에 잃은 것은 싸구려 진주뿐이니... 말이 나온 김에 묻소만, 그건 왜 가져간 것이오? 기왕 훔칠 거면 전부 가져가시던가.”
“그건 본인도 궁금... 아, 글쎄 본인이 안 훔쳤다니까.”
로벨의 변명이 궁색하게 들렸는지 존 공작이 실소했다. 억울한 일이었다. 메마른 웃음 끝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었다.
“내일 도시를 떠나시오. 성 안이 소란스러워 손님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입장이니 원하면 적당히 살을 붙이시오.”
“그냥 가라? 진심이오?”
“우리 쪽에서 답례 사절을 보낼 테니, 협정안의 사인은 그때 해도 될 것이오.”
“그게 아니라. 으음...”
범인을 알면서 순순히 보내주는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외국의 왕이자 후작인 로벨을 핍박할 수는 없었다. 로벨이 성 안에서 자연사를 해도 큰일인데, 언감생심 암살, 납치, 구속, 고문 따위를 할 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하러 이 밤중에 찾아온 것이오? 본인의 부하들을 위협하면서?”
“남들 앞에서 손님을 쫓아낼 수 없으니까. 그리고 공왕의 아랫사람은 괴롭히지 않았소. 말이 아주 잘 통하더군.”
마지막 말은 비웃음이었다. 최고 권력자가 찾아왔다지만, 싸우지 않고 침소까지 안내한 것이 칭찬할 일은 아니었다. 호른 경도 그렇게 생각했다.
@
아침 해가 뜨기 무섭게 울프 용병단 제1, 3, 5소대가 집합되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호른 경이 손수 매타작하는데, 평소 용병들을 천한 것이라 무시하던 조루아 경이 기겁해서 뜯어말릴 정도였다. 마녀 키르케 역시 화가 나서 어린 집사한테 이를 거라 빼액-! 빽-! 소리쳤다.
“공왕 폐하 침실에는 못 들어가게 막았습니다요! 그리고 공왕 폐하가 계셔야 그것들이 날뛰지 못합디요! 저깟 것들이 어쩔 겁니까요?”
“그것이 말이냐? 공왕 폐하를 지키는 게 너희 임무인데, 폐하보고 지켜 달라 한 것이 아니더냐!”
“어... 그, 그런가? 잠깐! 잠깐! 그만 때리... 끄아악-!”
‘검은 머리’ 빌보 이하 불침번 전원이 채찍에 맞아 실려 갔다. 소대장까지 연대책임을 물으려 했으나 로벨이 화급히 제지했다. 지금 지휘관이 다치면 곤란했다.
“궁성을 떠나라 통보했소.”
호른 경은 피 묻은 말채찍을 기사 종자에게 주고 헝클어진 옷매를 다듬었다. 로벨 외에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지만, 야성미와 절제미가 공존하는 멋진 기사였다.
“오늘은 무리입니다. 성을 나간 학자들을 찾아야 하고, 배의 보급품도 실어야 합니다.”
사실 서두르면 한나절에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호른 경이 주위를 한번 살피고 말했다.
“무엇보다 공작의 의도가 의심스럽습니다.”
로벨은 호른 경 사각으로 조지 솔트와 애꾸눈에게 손짓했다. ‘얘들 데리고 빨리 나가!’ 엄마한테 혼나는 아이를 몰래 빼내는 착한 아빠 같았다. 호른 엄마는 심각한 고민 중이라 깨닫지 못했다.
“청어잡이를 포기하면서 사수한 옛 신의 성배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붙인들 순순히 포기할 리 없습니다.”
“아, 본인도 그리 생각하오.”
“한밤중에 몰래 축객령을 내린 것도 수상합니다. 저들의 심중을 모르니 함부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로벨은 좀 더 생각한 후 말했다.
“저들이 무슨 짓을 꾸민다면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하루라도 빨리 철수하는 게 좋지 않소?”
“그러나...”
“성배를 되찾았으니 더 머물 이유가 없잖소? 오래 머물수록 위험이 늘어날 뿐이오.”
“맞아요. 호른 기사님처럼 의심할 것을 알고 못 가게 막으려 한 것 아닐까요?”
마녀 키르케가 뒷짐 지고 기웃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꼬아서 의도를 파악하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었다. ‘혹은 의심하는 것을 의심해서 의심하게 의심하는 의심일지도 모르죠!’, ‘그만해!’ 결국 로벨이 결정할 일이었다. 로벨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울프 용병단의 흔적을 보다가 말했다.
“내놔.”
“머, 뭘요?”
“진주 내놔. 장물이잖아.”
로벨의 표정은 진지했다. 마녀 키르케는 시치미도 떼고 응석도 부리다가 결국 툴툴거리며 범죄를 시인했다.
“허어! 진짜 훔쳤느냐?”
호른 경은 콩알만한 진주를 보고 어이없어 웃었다. 마녀 키르케는 코맹맹이 소리를 내었다.
“치이잇-! 어떻게 알았을까요? 누구처럼 쪼잔해서 갯수를 헤아렸나 보죠?”
“네가 할 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왜 하필 3개인가? 훔칠 거면 다 훔치지?”
“그야 기념품이니까요? 어린 집사님이랑 페리 행정관님이라 리암 수사님 드리려고 했죠.”
“어린 집사는 몰라도 리암 수사는 도둑질한 물건이라고 싫어할걸.”
로벨은 증거물을 어찌할까 고민하다 그냥 돌려주었다.
“공범이라서 뭐라 하기가 그렇지만, 다음에는 이러지 마.”
“히히힛-! 예옙!”
“...다음이 있는 겁니까?”
로벨은 엇갈린 반응을 무시하고 재차 말했다.
“존 공작은 잊으시오. 우리 목적만 생각하시오. 옛 신의 성배를 손에 넣었으니 집에 가면 되오. 오늘밤 철저히 준비하여 내일 아침 출발하시오.”
굳이 내일 출발하는 것은 존 공작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기분 나빠서가 아니었다. 진짜 아니었다.
@
예정보다 엿새 빠른 귀환이지만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잉그비아 왕실은 전례 없는 도둑으로 시끌시끌했고, 울프 용병단은 갑작스러운 징벌로 분위기가 살벌했다. 학문적 성취의 근간을 고집과 아집으로 정의하는 교수들도 차마 자기 주장을 하지 못했다.
“빠진 인원은?”
“선원 79명. 사절단 233명. 이상 없습니다.”
“식량과 식수는 충분하오?”
“아, 예. 물론입니다. 북서풍을 타고 내려가니 올 때보다 배는 빠를 겁니다.”
귀환 준비가 척척 진행되었다. 국적에 연연하지 않는 기사, 용병, 학자, 하인, 성직자 등등은-이 시대에 국적으로 호불호를 따지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그 사이 친해진 린딘 시민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국왕과 공작은 안 나오나 봅니다.”
“리처드 2세는 관심도 없을 것이오.”
용맹하고 지혜로운 흑태자가 자식은 잘못 키웠다. 아니, 키울 시간이 없었던 탓일까?
“존 공작은 어째서일까요.”
“뭐 좋은 사이라고 배웅 나오겠소. 지난밤에 인사했으니 그냥 갑시다.”
외교적으로 결례지만, 더 큰 결례를 저지르고 도망가는 상황이니 따지지 않았다. 로벨이 탄 강철갑옷 호가 닻을 올리고, 이어서 호위함 바다사자 호가 돛을 펼쳤다. 안개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 중에서는 가장 큰 배에 속했다. 큰 배와 큰 사람을 좋아하는 린딘 시민들은 모자와 치맛자락을 흔들며 배웅했다.
“저치들한테 환호 받으니 기분이 이상한데...”
“잉그비아 왕국도 사람 사는 곳이다. 사람 사는 곳은 다 같다. 전쟁보다 평화를 사랑하지.”
고향을 떠나게 된 조지 솔트가 쓸쓸하게 말했다. 궁성에 머물러서 지인을 만나지도 못했다. 그 심정을 잘 아는 외팔이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같으면 로드릭 시티도 지낼 만할 거요. 거, 좋은 여자도 많으니 하나 소개시켜 주리다.”
“네놈이?”
“외팔이, 네가?”
“노, 농담이지?”
사방에서 불신이 쏟아졌다. 이제 먹고살 만한 고참 용병 중 유일하게 연애 못하는 용병이었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강물을 따라가니 견인선은 금방 떨어졌다. 강철갑옷 호는 돛을 반개하고 어망을 피해 동쪽 바다로 나아갔다.
로벨은 점차 멀어지는 부두와 시가지, 그리고 늑대성보다 커서 괘씸한 궁성 하얀 탑을 바라보았다.
“허풍쟁이 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닌데, 그만큼 찝찝하오.”
“허풍쟁이가 무슨 말을... 아, 그건 잊으시지요.”
호른 경이 얼굴을 붉혔다. 교양 있는 사람이 거론할 종류가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그렇단 말이오.”
지금까지 경험을 미루어 볼 때 이렇게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이상하게 잘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