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58화 (558/605)

558화. 보물

로벨 일행이 머무는 동쪽 탑에서 왕실 보물고가 있는 서쪽 탑까지 직선거리로 500야드였다. 열심히 뛰면 3분도 안 걸릴 거리지만, 직선도 아니고 뛰지도 않으니 대여섯 배 오래 걸렸다.

“저기요! 저기 사람이 있어요!”

“쉿! 쉿! 시끄럽다!”

“기사님! 호른 기사님이 시끄럽대요!”

“폐하 말고! 너! 너 말이다!”

전장에서 반평생을 보낸 기사와 고대의 신비를 다루는 마녀가 볼품없이 싸웠다. 은밀하지도 않고, 비밀스럽지도 않았다. 로벨 일행이 정체를 들키지 않은 것은 기가 막히게 숨어 다녀서가 아니라 운이 좋아서였다.

오늘은 궁성 밖에서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왕실 근위대 절반이 국왕을 따라 궁성을 나갔다. 성에 남은 병력도 성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을 감시하는데 치중하여 성 내부는 신경 쓰지 않았다. 호른 경과 마녀가 크르릉- 캉캉- 히이잉- 거려도 저것들 왜 저러나 힐끔거릴 뿐 다가와 신원을 확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행운은 영원하지 않았다. 리처드 1세 때 증축했다는 이너 워드를 빙 돌아 서쪽 탑에 이르자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경계병과 마주했다.

“무장 상태를 보아 왕실 근위대가 맞습니다.”

원뿔 모양 캐버셋(Cabasset:투구)과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호버즌(Haubergeon:소매와 밑단이 짧은 사슬갑옷)을 갖추고 빌, 할버드, 폴 엑스 등의 도끼창으로 무장했다. 잉그비아 왕실 근위대의 표준 무장이었다.

“숫자가... 세 명일까요?”

“넷이야. 안쪽에 한 명 더 있어.”

호른 경과 마녀가 쳐다보았다. 그러나 의심하거나 따져 묻지는 않았다.

“살인은 안 됩니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진짜 잘못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웃으며 받아칠 말을 고민할 시간 없었다.

“중무장 용병 네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제압이라...”

“역시 어렵겠죠?”

로벨은 갬비슨의 옷고름을 풀고 8인치쯤 되는 대거를 꺼냈다. 호른 경과 마녀가 본능적으로 얼굴을 붉혔지만, 붕대를 감고 셔츠를 입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뭐를요?”

로벨은 대거를 역수로 쥐어 숨기고 대뜸 앞으로 나갔다. 말리고 자시고 할 틈이 없었다.

“어? 어라? 어쩌죠? 따라갈까요?

“기, 기다려라! 공왕 폐하도 생각이 있을 것이다!”

“진짜요?”

“...아마도.”

서쪽 탑 경비병은 시큰둥하게 쳐다보다가 10야드 가까이 접근하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멈춰! 멈추시오! 이곳은 왕실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소!”

로벨은 신분제 사회에서 나고 자란 보편적인 귀족으로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의 명령은 듣지 않았다. 그 어엿한 귀족노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경비병이 할버드를 앞으로 기울여 협박했다.

“거기 멈추라고 했소! 더 다가오면 아주아주 아프게 해줄... 꺽-!”

말본새를 보아 제법 위트가 있는 병사인데, 상대가 안 좋았다. 볼탄 반도 사람은 농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로벨은 갑자기 보폭을 넓혀 거리를 삽시간에 지웠다. 거의 3야드를 준비동작 없이 뛰었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 경비병 공격 범위에 뛰어들어 할버드 창대를 잡고 역으로 내찔렀다. 별 다른 장식이 없는 뭉툭한 창대지만, 로벨의 힘과 창의 무게가 위력이었다. 사슬 갑옷과 겹쳐 입은 누비 갑옷이 아무 소용없었다. 위트 있는 병사는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과 함께 뒤로 날아가 충돌 직후 혼절했다.

“습격이다! 습겨- 어엌-!”

출입문 앞에 두 병사는 정예 근위대답게 신속했지만, 로벨만큼은 아니었다. 오른손을 아래에서 위로 휘두르며 숨겨둔 대거를 던졌다. 허리춤에서 풀어낸 손바닥 크기 호각을 정확히 반으로 쪼갰다. 위력과 정확도가 모두 대단하니 마음먹으면 호각을 꺼낸 병사의 이마를 쪼갤 수도 있었다.

로벨은 거꾸로 쥔 할버드를 한가해진 오른손으로 옮겨 낮게 휘둘렀다. 호각 대신 폴 엑스를 잡은 병사가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소용없었다. 창끝으로 다리를 걸어 올리니 붕 떠서 한 바퀴 돌았다. 위당탕탕-! 애초에 체급이 달랐다.

“괴, 괴물...!”

“무례한 발언이야.”

로벨은 로벨과 깨진 호각을 번갈아 보는 병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뒤늦게 병장기를 꼬나들었지만 전의가 없으니 위협이 되지 않았다. 로벨은 도끼머리로 칼날을 쳐내고 주먹으로 턱을 돌려주었다. 실 끊긴 인형처럼 스르륵- 쓰러졌다.

“...와우.”

호른 경과 마녀가 동시에 감탄사를 뱉었다. 중무장 용병 셋을 단숨에 제압한 솜씨를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로벨은 제 역할을 다한 할버드를 주인에게 던져주고 일행에게 손짓했다. 호른 경과 마녀 키르케가 허둥지둥 로벨을 쫓아갔다.

“안쪽에 한 명 더 있소. 소란을 눈치챘을 테니 조심하시오.”

그 말 그대로였다. 건물로 들어가자 문짝 옆에 숨어 있던 병사가 숏소드를 찔렀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왔으면 크게 당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면 말이다. 드르륵- 깡-!

호른 경의 대거가 숏소드의 칼날을 빗겨내어 가드끼리 부딪쳤다. 병사는 완벽한 기습이 실패하자 멈칫했다. 그 틈에 마녀 키르케가 모래를 가득 채운 블랙잭을 휘둘렀다.

“아악-!”

“엥?”

성공적으로 후두부를 가격했으나... 상대가 안 좋았다. 정예 용병답게 실내라고 투구를 벗지 않았다. 로벨의 힘이면 투구를 찌그러트려서 기절시킬지도 모르지만, 평범한(?) 마녀는 무리였다.

“도움이 안 되는군!”

“힝-”

호른 경은 걸리적거리는 마녀를 밀치고 병사와 본격적인 칼싸움에 들어갔다. 기사와 용병의 대결인데, 아이러니하게 용병의 무장이 훨씬 우수했다.

철로 된 보호구 하나 없이 짤막한 대거 한 자루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무장한 정예 용병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은 말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사 짬밥은 상상 이상이었다. 시동으로 3년, 기사 종자로 7년, 기사 서임 후 19년을 칼부림하며 살았으니 이능이 없어도 상식을 넘는 기술이 있었다.

깡- 까강- 푹- 빠각-!

두 배 가량 긴 칼을 요령 좋게 튕겨낸 후 사슬이 보호하지 않는 허벅지에 칼침을 박아 넣고 팔꿈치로 턱을 올려 쳐 쓰러트렸다.

“후우... 후우... 움직이지 마라. 항복하면 살려준다.”

로벨이 괴물 같은 힘과 재주를 가져서 그렇지, 호른 경 정도면 일국을 대표할만한 기사였다. 병사는 실력 차이와 부상 정도를 객관적으로 분석한 후 숏소드를 버렸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너희가 누군지 모르나 왕의 보물을 훔치고 무사...”

퍽-!

더 들을 것 없어 턱을 걷어찼다. 병사는 때린데 또 때리냐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의식이 먼저 날아가 실패했다. 때맞춰 로벨이 뒷정리를 마치고 들어왔다.

“근무 교대까지 1시간 남았소. 재빨리 성배를 찾아 나갑시다.”

마녀는 칼침 맞은 병사 허벅지에 붕대를 감아 준 후 허리에 찬 열쇠 꾸러미를 빼냈다.

“에헴! 이게 있어야 보물창고를 열죠.”

꼭 그렇지는 않았다. 4층까지 한달음에 올라간 로벨은 눈에 보이는 방문을 죄다 발로 차 부쉈다. 마녀 키르케는 시무룩해서 열쇠 꾸러미를 뒤로 던졌다.

“내 포지션이 의미가 없잖아요.”

“응? 마법사 말이냐?”

“아니요. 섹시한 여도적이요.”

신분사회에서 낙오된 가난뱅이 기사와 관절이 안 좋은 나이인데 은퇴 못한 마법사와 직업 같지만 사실 범죄인 도둑이 등장하는 모험 소설을 본 모양인데, 현실은 현실이었다. 힘이 제일이었다.

“이건가?”

로벨은 쇠로 된 상자 중 술잔 하나 들어갈 상자를 골라 주먹으로 내리쳤다. 청동으로 된 자물쇠가 와장창- 깨졌다.

“이게 아닌가?”

첫 번째 상자는 평범한 보석 상자였다. 손톱만한 진주가 가죽 주머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족히 2만 페닝은 나갈 보물이지만, 기사 중의 기사와 마녀 중의 마녀는 욕심내지 않았다. 다른 상자를 꺼내 팔꿈치로 뚜껑을 부쉈다.

“이것도 아니야.”

성탑 한 층을 통째로 쓰는 만큼 온갖 보물 상자가 있었다. 철로 된 상자, 나무로 된 상자, 수레바퀴만한 상자, 손바닥만한 상자 등이 수십 개였다. 크기와 재질을 보아 전부 보물은 아니고, 보물이라 해도 가치가 낮은 저급 비단, 옥 장식 노리개, 청동 조각상 따위가 뒤섞여 있었다. 그중 로벨이 찾는 것은 가로 12인치, 세로 7인치의 술잔 하나 들어갈 철 상자였다.

로벨의 힘자람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마녀 키르케도 상자를 앞에 두고 발로 뻥-! 찼다. 결과는 지독한 발가락 통증이었다. 호른 경은 발바닥을 붙잡고 뒹굴뒹굴 구르는 마녀를 아주 한심하게 보았다.

“정말 도움이 안 되는군! 마법을 쓸 생각은 없는 건가?”

“마법은 이럴 때... 으앙... 쓰는 게 아니에요...!”

호른 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로벨을 도왔다. 힘으로 때려 부수지는 못하고 대거를 자물쇠 고리에 끼워 지렛대처럼 경첩을 떼어냈다. 그렇게 여섯 개쯤 해쳐먹었을 때, 바라고 바라던 것을 찾았다.

“...성배야.”

거룩한 옛 신의 유산이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앞서 본 빛나는 보석에 비하면 그냥 고물 같았다.

“이런 게 뭐 좋다고 찾아오라는 거야?”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가치가 다르니까요. 기사님의 갑옷과 왕관도 싸구려 술잔보다 못한 날이 올지 몰라요.”

“무슨 소리야? 내 왕관은 무려 알루미늄인데?”

마녀가 생각해도 알루미늄이 싸구려가 될 것 같진 않아 혀를 내밀었다. 호른 경은 손수건을 꺼내 성배를 고이 감쌌다.

“그 수건은...?”

“아, 예. 폐하께서 하사한 제 보물입니다.”

호른 경은 쑥스럽게 답하고 성배를 바쳤다. 로벨은 자신의 선물을 고이 간직한 호른 경이 고마워 머뭇머뭇 받았다.

“경의 보물은... 나중에 돌려주겠소.”

“감사합니다.”

성배를 찾았으니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남들 눈에 띄기 전에 동쪽 탑으로 돌아가야 했다. 로벨과 호른 경이 헛기침하며 보물방을 나가고 마녀 키르케는 잠시 뒤에 따라 나왔다.

잉그비아 왕실의 귀한 보물방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뚜껑이 따이고 자물쇠가 부서진 작은 상자 여섯 개, 발 모양이 선명하게 남은 큰 상자 하나, 그리고 서너 알 사라진 진주 주머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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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그비아 궁성 하얀 탑이 발칵 뒤집혔다. 그도 그럴 것이 왕실 보물창고가 털린 것은 420년만이었다. 하얀 탑이 세워진 게 420년 전이니까 처음이란 뜻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도적의 행동이었다.

“근위병을 제압하고, 보물고에 침입해서, 꼴랑 진주 세 알 훔쳐 달아났다고? 그걸 지금 믿으란 건가?”

“뭐? 진주 세 알?”

얼마나 황당한지 국빈으로 모셔진 로벨 로드릭 왕까지 놀랐다. 젊은 마녀가 눈알을 좌우로 굴리는 것이 수상쩍으나 본디 마녀라서 의심하지 않았다. 목격자의 엇갈린 증언 탓도 있었다.

“병사들의 말이 전부 다릅니다. 한 명은 장신의 여자가 공격했다고 하고, 한 명은 근육질 사내가 공격했다고 하고, 한 명은 야비하게 생긴 남자와 멍청하게 생긴 여자 2인조가 습격했다고 합니다.”

“그게 뭐요? 비슷한 구석이 전혀 없잖소!”

“전원 머리를 맞고 기절해서 기억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적절히 혼란을 주었다. 그 와중에 로벨은 자신의 성별을 알아 본 눈썰미 좋은 병사가 누군지 궁금했다. 편견 없이 보면 조금은 티가 나는 모양이다.

“...이게 이렇게 해결됩니까?”

“험험. 본인이 성공할 거라 했잖소.”

로벨의 자신감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도둑질은 옛 신이 알고 당사자가 알고 피해자가 아는 법이었다. 헤이스팅스 가문의 연회가 끝난 늦은 밤, 존 공작이 조용히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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