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화. 도둑질
전쟁, 정치, 외교, 부부싸움이 모두 그렇지만, 일방적인 승리는 매우 드물다. 로벨과 존 공작의 비공식 협상 역시 절반의 승리, 절반의 타협이었다.
성과부터 말하면 잉그비아 왕국이 일방적으로 파기한 북해무역협정이 재개되었다. 서드 컨티넨트를 손에 넣으면 볼탄 반도의 철, 보리, 소금 따위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이 깔린 듯한데, 당장 식민지가 생기고 생산시설이 가동되는 게 아닌 이상 볼탄 반도의 수익도 보장되었다.
그 외에도 잉그비아 왕실 소유 개척 항구의 무관세 교역권, 청옥성 일대의 독점 어업권 등등 어린 집사가 알면 입이 귓불까지 찢어질 조건을 가져왔다. 그러나 옛 신의 성배는 돌려받지 못했다.
“어째서일까요? 가지고 있어 봐야 아무 쓸모도 없을 텐데요?”
마녀 키르케가 의아해서 중얼거렸다. 로벨도 이해되지 않았다. 옛 신의 계보를 잇는 교회야 정통성이 걸려있으니 기를 쓰고 찾지만, 존 공작에게는 그리 가치 있는 게 아니었다. ‘진짜 성배’로 인정받은 게 아닌 이상 그냥 납 한 덩이의 골동품이었다. 수십 만 페닝 상당의 협상을 양보하며 지킬 가치가 없었다.
“그냥 신앙심이 깊은 거 아닐까? 본인이 가지고 싶어서?”
“그런 자가 악마추종자와 손잡을 리 없지요.”
호른 경이 곰곰이 생각하여 말했다.
“아마도 두 가지 이유일 겁니다. 하나는 성배의 소지를 인정하는 것이 악마추종자와 관련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하나는 교회와 직접 거래할 유일한 카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그게 안 되어서 추기경이 우리한테 부탁한 것 아니오?”
“성전을 거론한 탓에 자위 수단을 가지려 한 것 같습니다.”
로벨이 충격 받았다. ‘내, 내 잘못이었소?’ 호른 경이 아차! 해서 그런 뜻이 아니라고 열렬히 위로했다. 그러나 아닌 것이 아니었다.
얼마 쉬지 않았는데, 조지 솔트가 찾아왔다.
“조금 있으면 오찬입니다. 사절분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절단의 역할은 외교 협상만이 아니었다. 예술, 기술, 과학, 문학 등을 교류하고 과시하는 일을 했다. 즉, 마음 편히 놀고먹는 자리가 아니었다. 호른 경이 시무룩한 로벨을 대신해 물었다.
“모두 준비가 되었나?”
“칼잡이가 아닌 학자는 무슨 준비가 필요한지 모르지만, 표정을 보아 얻어맞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되었다.”
호른 경은 조지 솔트를 내보내고 로벨을 일으켰다. 하얀 탑에 머무는 동안 바쁜 일정이 계속될 것이다. 정말 바쁜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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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그비아 국왕 주관의 하얀 탑 오찬은 예정대로, 그리고 예견대로 잘 끝났다. 피 튀기지 않는 싸움이 무사히 끝났다는 뜻이다.
신학자가 온갖 경전에서 문구를 발췌해 예시로 들 때는 나름 신앙생활 좀 했다고 자부하는 귀족들이 기죽었고, 수학자가 손짓발짓으로 그려대는 도형과 치수는 술 한잔 마시지 않은 기사들을 어지럽게 했으며, 자연과학자가 지구 크기와 바다 면적 두고 설전할 때는 국적을 초월하여 한마음으로 없는 사람 취급했다. 로벨 입장에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숫자와 접속사뿐이었다.
그나마 예술·문화 쪽은 어울리기 쉬웠다. 지식이 없어도 보고 듣는 것은 할 수 있으니 짤막한 음악과 그림을 감상하고 그럴 듯한 칭찬을 해주었다. 연주가 끝나기 전에 박수치거나 기마돌격하는 기사를 개구리로 착각하긴 했지만, 직위와 신분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었다.
“채색이 안 되어서라고.”
“이렇게 창을 들고 있는데...”
“혓바닥인 줄 알았어.”
오찬이 만찬이 될 무렵 간신히 끝나고, 성직자는 옛 신의 이름으로, 학자는 무슨무슨 학회 이름으로 삼삼오오 개별적인 시간을 가졌다. 도시 대학이나 수도원을 통해 정기적으로 정보를 교류하지만, 산 넘고 물 건너 페이스 투 페이스 하는 일은 극히 드물기에 이참에 친목을 다지는 듯했다. 로벨 곁에는 로벨의 호위 기사 여섯 명과 조지 솔트, 허풍쟁이, 마녀 키르케 세 명뿐이었다.
“이거 저녁에도 정신없겠군요.”
“어디 저녁뿐이겠소? 공왕 폐하를 뵙고자 하는 기사와 레이디가 수십은 될 터인데.”
잉그비아 국왕과 존 공작에 우선순위가 밀려 멀리서 보는 기사, 귀족, 귀부인이 여럿이었다. 비록 적이지만, 아니, 적이기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호른 경이 조루아 경에게 말했다.
“어울려서 좋을 작자들이 아니오. 자택으로 초대하거나 알현을 요청하면 모두 거절하시오.”
호른 경을 연장자로, 경력자로 존중하여 군말 없이 명령을 따르는 조루아 경이지만, 이번만큼은 의문을 제기했다.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조금... 물론, 공왕 폐하께서 시시콜콜한 가문을 모두 방문할 필요는 없지만, 리처드 2세 국왕과 존 공작이 참석하는 자리도 있어서...”
체면에 죽고 사는 기사라 자기 체면만큼 남의 체면에도 예민했다.
“어느 가문이길래 왕과 공작이 모두 참석하는 거요?”
“아, 헤이스팅스 가문이라 합니다.”
흑태자와 함께 종군할 때 들은 적 있었다. 잉그비아 섬 남부의 대가문이었다. 로벨은 잠깐 고민하다가 빠르게 말했다.
“존 공작이 참석하면 본인 또한 참석해야지. 확인 후 승낙하시오.”
로벨의 결정에 조루아 경이 목례로 답했다. 역시 명예를 중시하는 무적무패 왕이었다. 호른 경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성 밖은 위험합니다. 지난 패전을 앙갚음하려는 발칙한 기사나 생각이 모자란 강경파 귀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훔칩시다.”
“...예?”
앞 문장이 잘렸지만, 평균 이상의 지성을 자랑하는 영특한 호른 경이라 금방 이해했다.
“성... 스러운 그것을 훔치자는 말씀입니까? 어디 있는지 알고 말입니까?”
“이 성에 있지 않겠소?”
“이곳은 늑대성보다 3배, 아니 5배 더 큰 곳입니다.”
오늘따라 말실수가 많았다. 늑대성이 팩트로 모욕받자 로벨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지금부터 찾아보시오.”
“어, 어떻게 말입니까?”
“내 늑대성보다 큰 곳이니 일하는 사람도 많지 않겠소? 알아서 잘 찾아보시오.”
아무래도 삐진 것 같았다. 앞으로의 일이 깜깜한데, 그것보다 귀엽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크게 좌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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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른 경은 최선을 다했다.
궁성의 기사들과 어울리며 보물, 성물, 비밀창고 등이 연상되는 운을 띄웠다. 그러나 자기 일이 아니면 개미 오줌의 소금기만큼도 관심이 없는 기사들이라 엉뚱한 답만 들었다. 애당초 존 공작의 측근이 아니면 성배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역시 무리였나.”
호른 경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며 포기했다. 남의 성, 그것도 일국의 궁성에서 도둑질하다 잡히면 망신 수준으로 끝나지 않았다. 율리오 추기경에게 미안하지만 성배 탈환은 포기하는 것이 옳았다.
“서쪽 탑 4층 두 번째 방에 새로운 보물이 들어왔다고 합니다요.”
그런데 뜬금없이 허풍쟁이가 정보를 물어왔다. 호른 경이 자존심 상해 따져 물었다.
“기사들도 모르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에이, 기사 나으리들이야 당연히 모르지요. 자기 손으로 뒷구멍도 안 닦는 양반들 아닙니까요.”
로벨이 얼굴을 붉혔다. 전투 중에 갑옷을 벗을 시간이 없을 때 이야기였다.
“난 내가 닦는데...”
“크허험! 커험! 계속 말해라.”
호른 경이 주군의 체통을 주워 담아준 후 재촉했다. 허풍쟁이가 신나서 이야기했다.
“왕의 보물이라고 왕이 직접 넣고 빼고 쓸고 닦지는 않잖습니까요? 보물창고를 관리하는 시종이 있고, 그 시종 아래에서 일하는 하인이 있습니다요.”
연회에 참석할 신분이 아닌 하인, 시동, 종자들은 연회가 끝난 뒤 남은 술과 음식으로 자기들만의 파티를 열었다. 허풍쟁이 같은 용병도 종종 초대받았다. 로벨과 호른 경에게 다소 낯선 이야기였다.
“술 창고나 주방 같은 후미진 곳에서 몰래 노는 거라 고귀한 나으리들 눈에는 띄지 않습니다요.”
“그건 아무래도 좋아. 그래서 성배는?”
이제 숨기지도 않고 성배를 찾았다. 허풍쟁이는 허풍을 위해 평소처럼 뜸을 들이다가 로벨과 호른 경이 칼자루를 쥐자 기겁해서 고속으로 말했다.
“처음에 말한 대로 입니다요! 서쪽 탑 4층 두 번째 방이요! 그곳이 왕의 보물창고 중 하나인데, 에드워드 3세 사후 줄곧 빼가기만 하다가 최근에 들어온 것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요!”
“성배인지 아닌지 모르고?”
“쇠로 된 상자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내용물은 모른다고 합니다.”
“자물쇠 따위 부수면 되잖아?”
“...그럼 하인의 머리통도 부셔지겠지요. 그리고 어지간한 보물보다 자물쇠가 비쌉니다요.”
보물지기가 묘사한 상자 크기가 딱 술잔 하나 크기였다. 시기, 장소, 생김새까지 거의 확실했다. 그러나 문제는 위치였다.
“서쪽 탑은 비밀스러운 장소입니다. 외부인이 쉽게 다가가기 힘듭니다.”
“경계가 심하오?”
“왕가의 보물을 보관하는 곳이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필시 왕실 근위대가 지키고 있을 겁니다.”
로벨은 허리춤에 달아놓은 파나케아 투구를 만지작거렸다. 로벨의 초인적인 감각과 신수(神樹)의 힘이면 어찌 될 것도 같았다.
“헤이스팅스 가문의 초대가 언제요?”
“사흘 뒤 저녁입니다.”
“그러면 공작은 제9시나 제10시쯤 움직이겠군.”
“귀빈으로 초대되었으니 그럴 겁니다. 그리고 폐하도 그때쯤 출발하셔야 합니다.”
영웅 소설에서는 기가 막힌 트릭으로 적을 속이고 목적을 달성하는데, 현실은 힘들었다. 로벨은 기상천외한 속임수 대신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초대는 잊으시오.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마지막에 불참을 밝힐 테니까. 서쪽 탑으로 가는 길과 주변 지형을 알아봐 주시오. 왕실 근위대의 근무교대 시간 같은 것도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의심을 살 수 있으니 무리하지는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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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궁성을 나서면 왕실 근위대장을 비롯해 근위대 절반이 따라 나갔다. 지휘관이 부재한 만큼 궁성에 남은 병사도 해이해졌다. 전(前) 근위대 출신 조지 솔트가 증언한 것이니 확실했다.
“이제 와서 할 말은 아니지만,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국의 왕이 솔선수범해서 도둑질하는 것이 이상했다. 신앙심으로 봐도, 기사도로 봐도 명예롭지도 않았다.
“싸움을 피하지 않고 승리하는 것이 기사의 명예요.”
“그 싸움이 이런 싸움은 아니지 않습니까?”
로벨은 필드 아머와 아밍 더블릿을 벗고 비교적 얇은 갬비슨을 입었다. 무게나 소음 때문은 아니었다. 로벨의 체력이면 풀 플레이트 차림으로 쉬지 않고 3마일쯤 달릴 수 있고, 몸에 딱 맞춰 제작한 갑옷은 앞구르기와 뒤구르기를 번갈아 해도 소음이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갑옷을 벗은 것은 누가 봐도 로벨 로드릭 왕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들키더라도 우리 정체를 몰라야 하오.”
그런 이유로 도둑질에 동참하는 호른 경, 허풍쟁이, 마녀 키르케도 평소와 다른 복장을 했다. 쇠와 가죽을 거의 벗어 시종 내지 하녀로 보였다. 진짜 시종과 다른 것은 가슴에 하나씩 품은 예리한 대거와 블랙잭(blackjack)이었다.
“여기서 서쪽 탑까지 거리가 500야드입니다. 중간에 발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설령 무사히 도착해도 서쪽 탑은 출입문이 하나라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성공 확률이 매우 낮습니다.”
그럼에도 동참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로벨 성격상 말려도 혼자 할 거란 확신과 정체를 들켜도 죽지는 않을 거란 믿음이었다.
“그래도 성공할 것이오. 갑시다.”
반면에 로벨은 자신만만했다. 옛 신의 가호나 수호자의 안배 따위를 기대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자신만만했다. 그래서 로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