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56화 (556/605)

556화. 저울

잉그비아 왕국의 심장이자 린딘 시티의 상징. 42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궁성 ‘하얀 탑’에 이르렀다.

“이쪽은 에드워드 1세 폐하 때 확장한 외곽 뜰이고, 저 안쪽은 리처드 1세 폐하 때 증축한 안뜰이고, 지금 보시는 곳이 윌리엄 폐하 때 지어진 이너모스트 워드(innermost ward)의 하얀 탑입니다.”

왕실 근위대장 윌리엄 경은 보기보다 말이 많았다. 로벨 일행의 정신을 빼놓을 목적이면 어느 정도 성공했다. 기사와 학자 중 상당수가 넋을 잃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반면, 로벨과 호른 경은 왕위복권전쟁 당시 이미 둘러본 곳이라 새삼스럽지 않았다.

“...병사가 많습니다.”

호른 경이 몸을 기울이며 나직이 말했다. 두 개의 달이 비스듬히 비추는 2경 초였다. 횃불이 없어도 반짝이는 금속이 잘 보였다.

“우리 때문에 급하게 소집한 모양이오.”

“그렇다고 해도 숫자가...”

호른 경이 호위 책임자답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일과 후에 긴급 소집된 저 근위대원이 알면 억울할 오해였다. 1만 명의 원정군을 단칼에 해치운 악명 높은 볼탄 반도의 왕, 로벨 로드릭 왕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기겁해서 불려 나온 참이었다.

하늘로 솟은 콧대를 주체 못하던 소대장들은 북극 빙하처럼 얼어서 손발 같이 내밀며 부대원을 인솔했고, 궁성이 제집인 양 으쓱대며 잔소리하던 궁내부 시종들은 속된 말로 쫄아서 정원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쉬지 않고 쫑알대는 근위대장 윌리엄 경의 노고가 새삼 대단했다.

“그런데, 그, 죄송합니다. 늦은 시간이라 국왕 폐하를 뵙기는 곤란합니다.”

한겨울에 2경이면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해가 일찍 저물어 밤 시간이 늘어난다-, 잉그비아 국왕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해되었다. 설령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사악한 꼬마 왕이라도 존 섭정과 각 부처의 대신들, 의원들, 가문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시간에 방문한 본인의 잘못이니 괘념치 마시오.”

로벨이 관대하게 이해해주자 윌리엄 경의 표정이 풀렸다. 아닌 척해도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유난히 말이 많은 것이 증거였다.

“그럼 쉬실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궁성의 중심인 하얀 탑에서 멀지 않은 동쪽 탑이었다. 호른 경이 다시 속삭였다.

“외국 사절이 머무는 곳입니다.”

로벨의 명령으로, 정확히는 어린 집사의 명령으로 파견되었을 때 지낸 곳이었다. 왕가의 손님이 한둘이 아닌 만큼 평소에는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데, 오늘은 로벨 일행을 위해 건물을 통째로 비웠다. 기사와 용병은 물론이고, 비전투원까지 모두 머물 만했다.

“하인들을 이곳으로 보낼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그럼 내일 아침에 찾아뵙겠습니다.”

로벨의 침소를 따로 정해주지 않았다. 보통은 무례한 일이지만, 적대국 왕을 모실 때는 섬세한 배려였다. 조루아 경이 20대의 초라한 수염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호위를 떼어내지 않고, 숙소를 강제하지 않는다라... 저쪽도 적대의사가 없음을 보이는군요.”

“그렇게 안심시키려는 수작일 수도 있소. 잉그비아 왕국인은 속이 시꺼멓고 말하는 것이 음흉하니 방심하지 마시오.”

호른 경의 30대 수염이 훨씬 굵고 억셌다. 로벨은 수염쟁이들을 차례로 보고 모닝스타에서 내렸다.

“배려를 무시할 필요는 없지. 각자 방을 잡고 먹을 것과 씻을 물을 받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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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그비아 궁성 ‘동쪽 탑’은 늑대성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깨끗하고 평안하고 따뜻했다. 늑대성에서 나고 자란 로벨에게 늑대성보다 좋은 곳은 옛 신이 기거하는 하늘나라 어디 밖에 없으니 사실상 최고의 대접이었다.

물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것은 로벨과 마녀 키르케, 성직자, 학자들뿐이고, 기사들과 용병들은 3개 조로 철통같은 경비를 서야 했다.

“편히 쉬셨습니까.”

아침식사를 어찌할까 고민할 때 윌리엄 경과 처음 보는 중년 남자가 찾아왔다. 왕실 재무관 겸 궁내부장이라 하는데, 대강 어린 집사 포지션인 듯했다.

‘그럼 이쪽이 펄프 대장인가?’

근위대장, 궁내부장 하면 딱딱한데,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라 하니 한결 친숙했다. 잉그비아 왕국판 어린 집사가 말했다.

“국왕 폐하께서 간밤에 무례를 사과하며 조찬에 초대하셨습니다. 참석하실 수 있으신지요.”

아침은 편히 먹고 싶은데, 쉽지 않았다. 거절도 마찬가지였다.

“곧 준비하겠소.”

평화 사절단을 환영하는 정식 연회는 오찬으로 예정되어 있으니, 이것은 로벨과 로벨의 측근에게 간단히, 그리고 솔직히 밀담하자는 뜻이었다. 기사들과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힘든 대화가 오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저 예상이었다.

“으앙- 으아앙-!”

로벨은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가 무례한 것 같아 슬그머니 내렸다. 콧물 흘리는 철부지 시동이나 흙 퍼먹는 동네 꼬마라면 신경 쓰지 않겠지만, 300만 명의 잉그비아 왕국을 통치하는 국왕이라 그럴 수 없었다. 호른 경이 해명하듯 속삭였다.

“국왕이라고 하지만 이제 겨우 10살입니다.”

“어린 집사는 저 나이에 세금 걷어서 영지를 운영했는데...”

“그 친구도 정상은 아니잖습니까.”

“...도? 누가 또 정상이 아니오?”

잉그비아 정통 복식으로 비단을 칭칭 감은 꼬마왕 리처드 2세는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엉엉 울며 투정 부렸고, 결국 유모 품에 안겨 연회장을 벗어났다. 식탁에 남은 이는 수치심에 얼굴이 시뻘게진 무슨무슨 궁정대신 3인방과 국왕의 삼촌 되는 존 곤트 공작이었다.

존 공작은 국왕을 팽개친 나이프를 주워 시종에게 손짓했다.

“철이 덜 든 조카를 대신해 사과하오. 그래도 일정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오.”

잉그비아 왕국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과시하는 태도였다. 로벨 입장에서도 칭얼거리는 꼬마왕보다 야심 많은 섭정이 거래상대로 적당했다.

두 나라의 지배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이름과 명성은 풍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직접 칼을 맞대지는 않았지만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전적은 로벨이 높았다.

“올해 마흔 살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젊어 보이시오.”

로벨, 호른 경, 마녀 키르케까지 모두 뜨끔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이 ‘진짜 로벨’은 40대가 되었다. 지금의 로벨도 생일이 지나 36살이었다. 그러나 외모만 보면 잘 쳐줘야 20대 중후반이었다. 진짜 로벨과 캡을 생각하면 단순히 동안(童顔)수준이 아니었다.

“옆에 아가씨는 마녀요?”

“마녀 아니고... 마법산데요...”

마녀(Hag) 역시 주름살투성이의 꼬부랑 할머니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존 공작은 왕과 마녀를 번갈아 보고 혼자 납득했다.

“이해하오. 허나, 교회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오. 적당히 조절하기를 권하오.”

“으응? 무슨 말이오?”

로벨이 무심결에 되묻자 공작은 ‘인정하지 않는 것도 이해하오’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의 힘으로 젊음을 유지한다 생각한 모양이다. 호른 경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공작께서는 마법을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남 몰래 총애하는 마법사라도 있습니까?”

공수가 교대되었다. 로벨 역시 떳떳하지 못하나 악마추종자와 손잡은 존 공작만큼은 아니었다. 저쪽은 흑태자 시해까지 저질렀다.

“그저 오래된 이야기를 주워들은 정도요. 이렇게 보란 듯이 마녀를 데리고 다니는 볼탄 반도 왕 앞에서 자랑할 일은 아닌 듯하오.”

그쪽도 떳떳하지 못하면 닥치라는 말을 한 바퀴 돌려 말했다. 잉그비아 왕국 귀족다웠다.

로벨과 공작이 으르렁거리자 궁정대신들이 슬그머니 빵을 놓았다. 소화기관이 좋지 않은 고령이라 체하기 십상이었다.

“대략적인 것은 문서로 보았지만, 허어, 그래도 확인이 필요하군요. 종전... 입니까?”

로벨은 애초에 음식을 들지 않았기에 편히 말했다.

“전쟁은 올봄에 끝났소. 포로를 돌려보낸 것이 그 증거요.”

유서 깊은 가문들이 휘청하는 몸값을 뜯어내긴 했으나 구태여 거론하지 않았다.

“오늘 제안하는 것은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평화요.”

호른 경과 마녀 키르케가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세상에나! 그렇게나 어려운 단어를!’ 당연하지만 어린 집사가 일러준 말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존 공작은 측근들의 반응을 기묘하게 여겼다.

‘사전에 합의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야기가 복잡했다. 강력한 힘으로 볼탄 반도 제후들을 거느리고 있으나, 고대 왕국이나 동방대륙의 황제처럼 절대권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로벨이 독단으로 맺은 평화협정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전쟁은 만민을 병들게 하니, 평화만큼 좋은 것이 없소.”

충성심을 시험 받는 것은 잉그비아 왕국 쪽도 마찬가지였다. 궁정대신들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 존 공작을 쳐다보았다. 정권을 뒤집고 숙청의 칼을 휘두르며 원정전쟁을 두 차례나 일으킨 작자가 할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라 하나를 꿀꺽할 수완을 가진 자는 낯가죽도 두꺼웠다.

“그러나 우리가 거저 받는 것은 태양과 바람과 옛 신의 무한한 사랑뿐이오. 공왕께서는 무엇을 내어줄 수 있으시오.”

마녀 키르케가 로벨의 팔꿈치를 잡았다. 습관적으로 칼자루를 쥘 뻔했다. 로벨은 눈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말했다.

“첫째는 잉그비아 왕국의 안전이오.”

“오만한 말이오.”

“북해의 파도가 사납다 하나 볼탄 반도의 용맹에 비할 바가 아니오. 그것은 그대들의 오랜 숙적 네일 공국이 증명할 것이오.”

존 공작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반대로 무적무패 명성에 조심하던 궁정대신 얼굴은 뜨거워졌다. 너희가 거절하면 네일 공국과 손잡겠다는 협박이었다.

“둘째는 무엇이오?”

“서드 컨티넨트의 식민지요.”

존 공작이 실소했다. 진짜 웃겨서는 아니었다.

“그대의 것이 아닌 걸로 선심 쓰지 마시오.”

“본인의 허락이 없으면 그대 또한 갖지 못할 것이오.”

존 공작 표정이 바뀌었다. 한 줄로 요약하면 ‘이놈 봐라?’ 표정이었다. 전쟁과 마상시합을 즐기는 무식한 기사 왕이란 평을 고쳤다.

“혹시 셋째도 있소?”

“옛 신의 교단과 화해를 중재하겠소.”

“우리는 교회와 척진 일이 없소만...”

존 공작이 진심으로 의아하게 물었다. 옛 신의 기사를 여럿 수장시키긴 했지만,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고, 교회가 공식적으로는 기사단을 파견한 것도 아니라 책임은 없었다. 로벨은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본인은 그대들과 달리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오. 그러니 알아서 은유적으로 이해하시오.”

“알아서 은유적...”

“교황과 교단 본부는 그대들이 악마추종자와 손잡을 것을 알고 있소. 경우에 따라 수위가 다르나, 최소 파문을 고려 중이오.”

로벨의 측근들은 한 번 더 놀랐다. 로벨이 거짓말을 못 하는 것을 알기에 더욱 놀랐다.

“최소 파문이면, 최대는 무엇이오?”

“성전(聖戰)이오.”

“잉그비아 왕국인을 모두 죽이겠다?”

“그렇기야 하겠소? 다만, 이 탑에 있는 사람은 죽어야겠지.”

존 공작은 나이프를 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로벨은 궁정대신들의 두서없는 질문에 답하며 기다려주었다. 하얀 빵이 딱딱하게 굳은 때쯤 말했다.

“공왕 입장에서 나쁜 일이 아닐 텐데, 왜 중재한다는 것이오?”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라 시험이었다.

“공작이 겁먹지 않은 이유와 같소.”

혹은 자존심이었다.

에르나 왕국의 무적함대가 사라진 지금, 어느 나라 어떤 세력도 잉그비아 왕국을 상대로 필승을 장담할 수 없었다. 교황이 성전을 선포한다고 승리가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로벨 혼자 싸우는 것보단 승산이 높고, 그만큼 잉그비아 왕국의 부담도 컸다. 전쟁의 저울은 눈금부터 무게추까지 무엇 하나 정확하지 않았다.

“그렇게 솔직히 말씀하니 화를 못 내겠소.”

궁정대신 중 유난히 소심한 자가 ‘무적무패 왕에게 화낼 셈이었소?’ 하고 노려보았는데, 소심해서 금방 그만두었다.

“공왕이 줄 것은 충분히 알았소. 그럼 이제 가져갈 것을 말해보시오.”

로벨의 두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이제부터 진짜 협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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