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3화. 고집
율리오 추기경은 적당히 살집이 있는 70대 노(老)사제로 고귀한 직위에 비해 몹시 예의가 발랐다.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온 늙은 몸종을 이리 성대히 맞아주어 감사하오.”
“그것은 뭐... 그보다 계속 그렇게 갈 생각이오?”
“옛 신께서 두 다리를 만들어준 이유를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소이다.”
얼마나 예의가 바른지 로드릭 시티 남문에서 늑대성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추기경 얼굴을 보겠다고 모인 시민들은 좋아했으나, 로벨과 로벨의 호위 랜스는 곤욕스러웠다.
기사 된 신분으로 걸어가는 것은 체면이 상하고, 추기경을 모시며 말을 타는 것은 무례했다. 로벨은 장고 끝에 모닝스타에서 내렸다. 어째 추기경 의도에 말려든 듯한데, 무례한 것보단 나았다.
어린 집사, 펄프 대장, 과묵한 몬트 이하 울프 용병단도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렸다. 왕과 왕의 호위 병사가 멀쩡한 말을 끌며 걸어가는 진귀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늙은 추기경이 빙그레 웃었다.
“과연 공왕께서는 대단하오.”
“무엇이 말이오?”
로벨이 못마땅하게 물었다. 억지로 끌어내려진 느낌이라 좋지 않았다. 만약 옛 신이 선물한 두 다리의 사용법 어쩌고 하면 화를 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추기경의 뜻은 달랐다.
“첫째로 왕관을 쟁취했음에도 겸손함을 보일 줄 아는 것이 대단하고, 둘째로 그것을 곡해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신망이 대단하오.”
로벨에게 다소 어려운 말이었다. 거리를 걸어도 누구 하나 길을 막거나 조롱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린 집사는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결코 왕의 병사가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길가에 모인 사람은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시하고, 말과 당나귀를 탄 사람은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안장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렸다. 절대왕권을 누린다는 동방대륙에서는 어떤지 모르나, 유라피아 대륙에서는 진심 어린 호의와 존경심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 기묘한 순례는 늑대성 안마당에 이르러 끝났다. 성 앞까지 따라온 구경꾼을 막기 위해 과묵한 몬트가 화급히 성문을 닫았다. 추기경의 순례자까지 버려졌으나 어차피 성내에 수용할 수 없으니 따로 머물 곳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추기경은 거친 숨을 쉬며 땀을 닦았다. 노구를 이끌고 오르기에 가파른 늑대성 언덕이었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추기경의 마차로 오지 못했다. 말을 타거나 작은 수레를 이용해야 하는데, 그건 그것대로 우스웠다.
“시원한 맥주를 한 잔 하시겠소? 아니면 포도주?”
로벨이 자기 수준으로 위로했다. 그래도 진심은 통하는 법이라 추기경은 웃으며 사양했다.
“그것보다 잠시 쉴 공간을 내어줄 수 있겠소? 혹여 잔치를 준비했다면 늦은 저녁으로 미루고 싶소.”
손님으로 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퍽 무례하지만, 신성(神聖) 앞에 켕기는 게 많아 타박하지 않았다. 꼭 그게 아니어도 로벨의 성품이 고귀한 신분의 노인을 괴롭힐 만큼 모질지 못했다.
“그럼 그렇게 하겠소. 객실로 안내할 테니 편히 쉬시오. 아, 깜박했군. 늑대성에 온 것을 환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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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오 추기경의 기행 아닌 기행은 계속되었다.
저녁시간이 되자 잔치상으로 준비한 술과 고기를 모두 치우게 하고 보리빵과 귀리죽을 요구했다. 어제 아침부터 마을 아낙을 닦달해 잔치 준비한 어린 집사가 테이블보를 씹어 먹었다. 고기와 술은 보잘것없는 순례자와 도시 빈민에게 돌아갔다. 잠자리 역시 까다로워 푸짐히 깐 짚을 말먹이로 주게 하고, 새벽 기도를 함께할 것을 요구했다.
어지간한 기사라면 추기경이건 추깃물이건 같이 못 놀겠다고 박차고 나갈 텐데, 의외로 로벨은 할 만 했다.
평소에도 보리빵이나 귀리죽을 즐겨 먹기에 딱히 불편하지 않고, 3경이 지나기 무섭게 일어나 남몰래 아침 훈련하기에 새벽잠이 많지 않았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어지간한 수도사보다 경건하고 검소했다. 그것이 추기경 마음에 쏙 들었다.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여겨왔으나, 오늘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소. 공왕은 진정 신실한 기사요.”
사흘째 아침 기도가 끝나자 새로운 말이 나왔다. 추기경은 옛 신의 성물을 놓은 임시 재단을 등지고 사과했다.
“지금까지 무례를 용서하시오. 이 늙은 종이 예의를 모르고 의심이 많아 공왕을 시험하였소.”
그리고 ‘너도 슬슬 눈치 채지 않았냐’는 그윽한 눈길을 보냈다. 로벨은 뻔뻔하게 ‘당연히 그렇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아무 생각이 없는 표정인데, 로벨 로드릭이란 인간을 모르고 보면 그럴듯했다.
“공왕께 간곡한 부탁이 있소. 교황 성하와 교회를 대신하는 성사(聖事)이니, 오직 볼탄 반도의 왕만이 들어줄 수 있는 일이오.”
서두가 거창하니 하품이 나오다가 들어갔다. 로벨은 추기경의 간절한 눈빛을 읽고 좌우로 손짓했다. 비슷하게 하품을 참는 중에 외팔이, 허풍쟁이, 흉내쟁이 등이 메인 홀 밖으로 나갔다. 달빛이 드리운 고요한 성채에 왕과 사제만이 남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말씀하시오.”
추기경은 성호를 그어 작은 성지를 만든 후 솔직하게 말했다.
“잉그비아 왕국의 악마추종자가 강탈해간 옛 신의 성배를 되찾아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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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신의 교단은 공식적으로 성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공식적인 외교 루트로 성배 반환을 요구할 수 없다.
에르나 왕국군과 손잡고 힘으로 되찾으려 한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3개 규모 기사단의 괴멸도 치명적인데, 세속 군주의 전쟁에 끼어들었다는 불신과 불명예도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잉그비아 왕국 소속 교구를 통해 비밀리에 협상하거나, 입이 무거운 용병을 고용해 도둑질하거나, 잉그비아 내정에 영향력이 있는 어떤 왕에게 부탁하거나...
“그러니까 신앙심이 깊고 잉그비아 왕국에 협상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 로벨 로드릭 왕이 딱이군요.”
로벨이 반나절 동안 고민한 것을 어린 집사는 듣자마자 간파했다. 로벨은 진작에 깨워서 물어본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무슨 협상? 전쟁 포로도 돌려보냈고, 배상금도 받았는데?”
“지난 일은 청산되었지만, 앞으로 일은 아니잖아요. 잉그비아 왕국이 포츠담 해전 승리 후에도 외해로 진출하지 못하는 게 누구 때문이죠?”
“에헴! 나 때문이지.”
어린 집사는 나이트캡을 벗고 이불을 치웠다. 레이디 출신(?)인 로벨보다 섬세해서 잠옷 세트를 갖추고 있었다. 본인은 쥐 때문이라고 우기는데, 로벨 이하 늑대성 식구들은 난방비 아끼려는 좀생이 기질이라 생각했다.
“공왕 폐하가 불가침조약을 내세워 금전적인 요구를 하며 쾌히 들어줄 거예요. 서드 컨트넨트의 가치는 황금 열 수레보다 높으니까요. 진품으로 인정받기 힘든 납잔 하나 끼워서 받는 것은 뭐, 어렵지 않겠지요.”
“서드 컨트넨트를 주고 성배를 받아? 손해잖아!”
“...어차피 공왕 폐하 땅도 아니잖아요? 에르나 왕국 땅이지. 아니다. 원주민 땅인가?”
어린 집사는 소문 무성한 신대륙 원주민을 생각하다가 머릿속에서 지웠다. 죽을 때까지 만날 일 없는 머나먼 외지인이었다.
“어차피 우리 것도 아닌데, 그거 주고 황금과 성배 받고 교회와 협상하여 정통성까지 챙기면 남는 장사죠.”
“그럼 그렇게 할까?”
“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어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10년 뒤나 20년 뒤를 생각하면 잉그비아 왕국의 힘이 세지는 것이 꺼림칙하죠.”
“그럼 하지 말까?”
“포클랜드를 이용해서 우리를 견제하고 외해로 빠져나갈 꼼수를 부린 거 보면, 다음에는 네일 공국이나 아이란드 왕국을 이용할지 몰라요. 어차피 그럴 거면 챙길 거 챙기고 전쟁은 피하는 게 좋을 것도 같아요.”
“그럼 하는 게 맞는 거지?”
로벨의 팔랑귀는 바람개비 같았다. 어린 집사가 한심하게 보다가 다시 말했다.
“사람들을 모아서 의논해 봐요. 사실 진작했어야 할 논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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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오 추기경 일행은 황금 보리 수도원으로 숙소를 옮겼다.
성직 생활의 고민을 들어주고 신자들을 축복하기 위함이라는데, 사실은 로벨과 로벨의 측근들이 고민한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역시 아무나 추기경 하는 게 아니었다.
모처럼 늑대성의 식구가 한자리에 모였다. 로벨,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펄프 대장, 애꾸눈 볼포스, 외팔이 더치, 허풍쟁이 제이콥, 리암 수사, 헨리 상회장, 페리 행정관, 그람 형제, 쓸모는 없지만 소외받기 싫은 아야와 이야카로 식당이 가득 찼다.
“잉그비아 왕실이 아니라 악마추종자가 가져간 게 아닙니까?”
“하얀 탑에 보관 중이라 하니까 왕실이 가진 게 맞습니다.”
“그럼 왕실과 악마추종자가 한통속이군요.”
“흑태자 에드워드가 급사했을 때 짐작한 일이죠. 공동의 적이었을 테니까요.”
똑똑한 사람이 많이 모이니 대화 속도가 빨랐다. 외팔이들만 모였으면 개요를 설명하는데 최소 한나절이었다.
“그럼 리처드 2세와 협상하여 되찾는 게 맞겠군요.”
“잠깐만요. 잠깐만. 그 전에 협상할지 말지부터 결정이 안 났는데요?”
“당연히 해야 하지 않습니까? 잉그비아 왕국과 교회에 빚을 지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그 결과는 후손들한테 맡기고요?”
“미래는 모르는 겁니다. 혹시 압니까? 서드 컨티넨트의 이주민이 홍차를 바다에 던지고 독립만세를 외치거나 볼탄 반도가 하나로 통일되어 위대한 겔몬족을 부르짖으며 포클랜드를 점령하고 유라피아 대륙을 통치하거나...”
“뭐지? 뭔가 허무맹랑한데 꼭 일어날 거 같은...”
“아무튼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금화와 더 높은 정통성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모두 획득할 기회입니다.”
페리 행정관이 강경하게 주장했다. 옛 신의 교단에 두 발 모두 걸친 리암 수사도 동조하는 듯했다. 펄프 대장과 그람 형제는 대세를 따르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였고,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대화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결정권이 로벨에게 돌아왔다.
“어떻게 할까요?”
로벨은 이미 결정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단계를 고민했다.
“잉그비아 섬에 누가 가면 좋을까?”
협상여부와 내용보다 더 큰 고민거리였다. 누가 간들 좋은 대접은 받지 못할 것이다. 마녀 키르케가 전례를 바탕으로 제안했다.
“호른 기사님?”
“안 돼!”
최고 권력자의 즉각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다. 기사의 나라라 자부하지만, 왕을 대신할 권위와 능력, 신용과 명성을 모두 갖춘 기사는 드물었다. 비공식적으로 성배를 되찾아야 하니 조건이 몇 배 더 까다로웠다. 로벨이 조심스럽게 후보를 거론했다.
“내가 갈까?”
“미쳤어요?”
어린 집사가 펄쩍 뛰었다. 양국 관계를 생각하면 자살시도였다. 그러나 용맹무쌍한 기사왕의 생각은 달랐다.
“저쪽 왕실도 체면이 있는데 손님을 해치진 않을 거야. 악마추종자 역시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고.”
“안면몰수 한 번으로 서드 컨티넨트와 볼탄 반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요?”
“나 하나 없다고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땅이면 지킬 가치도 없어.”
“방금 한 말은 핑계에요. 사실 이깟 볼탄 반도보다 공왕 폐하가 소중하다고요!”
어린 집사의 남사스러운 고백이었다. 마녀 키르케는 입을 가리고 ‘어머! 어머머!’ 소리쳤고, 펄프 대장과 중후한 중년들은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했다.
“그, 그게 아니라, 그렇잖아요? 공왕 폐하가 없으면 늑대성도, 로드릭 가문도 끝장이라고요! 보, 볼탄 반도보다 가문이 중요하단 뜻이에요! 거기! 이상한 소리내지 마요!”
어수선한 분위기 탓에 로벨의 장거리 여행 여부는 보류되었다. 그러나 말 못하는 아야와 이야카도 알고 있었다. 왕이 고집부리면 아무도 꺾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