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화. 민요
로벨이 전선에 복귀했으니 포클랜드 후방은 안전해졌다. 그러나 포클랜드 기사들의 이탈은 계속되었다.
우선 7천의 병력이 4천 대로 줄어 파장(罷場) 분위기였다. 휑한 막사가 텅 빈 초소가 전투 의욕을 꺾었다. 7천 명으로 이기지 못한 싸움을 4천 명으로 당해낼 수 있겠냐는 말이 나오자 이탈이 더욱 가속되었다.
그리고 애초에 소득이 없는 전쟁이었다. 국왕이 소집하여 응하긴 했으나 땅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포로가 잡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적무패를 꺾으며 자자손손 자랑할 명예가 생기겠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것도 가능성이 없었다.
“그래서 공격이 뜸하구만.”
펄프 대장이 억울한 투로 말했다. 공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거의 생색내기 수준이었다. 발가락 슈미츠가 성벽 밖으로 침을 뱉고 말했다.
“무적무패 왕이 버티고 있는데 대가리 밀어 넣을 용병놈이 어디 있겠소? 급료 안 떼이려고 시늉만 하는 거지.”
용병이라 용병 심리를 잘 알았다. 전쟁에서 이겨도 온갖 핑계로 안 주는 게 급료인데, ‘너희는 한 거 없잖아?’ 소리 들을 상황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 겨울이 코앞이라 저들도 절박했다.
“깃발이 더 줄었군. 열흘만 지나면 알아서 와해되겠소.”
반면, 기사들은 기사에게 관심이 많았다.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깃발을 숨기지 않을 테니 정말 떠난 것이었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참 오합지졸이었다. 자비에 후작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 후작도 공왕 폐하 손에 처단되었소. 후작이 살아 돌아온들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요.”
머를 브릭 경이 엉성한 수염을 만지며 어설프게 아는 척했다. 존 도너반 경, 렌치 도너반 경, 나마르 아자르 경 등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브릭 가문은 로드릭 가문의 가장 오랜 봉신이라 검은 숲에서 입지가 대단했다. 시답지 않은 이유로 반목할 필요 없었다.
“지난 일은 모르겠고, 지금 꼴을 보니 수일 내로 협상이 있을 거요. 다들 준비하시오.”
유일하게 로드릭 가문 소속이 아닌 고르크 슐츠 경이 한 마디 쏘았다. 브릭 경이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공왕 폐하와 함께 용을 처치했다는 기사에게 덤빌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험. 험.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 판단이 옳았다. 전쟁놀이 같은 전쟁이 사흘째 되자 포비아 국왕의 전령이 도착했다. 펄프 대장이 백기를 힐끔 보고 돌아 서서 물었다.
“어찌할까요?”
“어찌하기는. 왕의 전령이잖아.”
성문(Citadel)을 열어 맞이했으나 성(Kepp)으로 들이지는 않았다. 기사와 용병이 우르르 나와 에워쌌다. 겁을 줄 의도였으면 절반쯤 성공이었다. 전령의 수행원이 목을 움츠리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왕의 전령은 아니었다. 고른 왕가의 인장이 찍힌 양피지를 높이 들며 말했다.
“국왕 폐하를 대신해 볼탄 반도 형제들에게 전하오. 오해에서 비롯된 전쟁을 멈추고 지난 우정을 회복했으면 하오.”
“오해?”
“우정?”
머를 브릭 경과 고르크 슐츠 경이 함께 비웃었다. 그러나 포클랜드 궁정백이라는 전령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그렇소. 오해요.”
오해로 하자는 말이었다. 성질 급한 자는 눈꼬리를 올리고 생각 깊은 자는 입꼬리를 올렸다. 로벨은 둘 다였다.
“무엇으로 우정을 증명할 것이오.”
어린 집사의 교육이 빛을 발했다. 혹은 아무리 로벨이라도 피 값은 받아내야 속이 풀렸다.
“공왕이 포클랜드 영주에게 입힌 손해를 묻지 않겠소.”
“그건 당연한 거고.”
존 도너반 경이 조롱하며 말을 끊었다. 궁정백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어 말했다.
“전사한 병사 한 명당 100페닝을 지불하겠소.”
용병들이 크게 기뻐했다. 영리한 개수작이었다. 울프 용병단의 전사자는 서른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배상금을 위해 피해규모를 과장하면 로벨의 체면이 깎이고 포클랜드의 체면이 올라갔다. 700명이 다 죽어도(?) 7만 페닝이니 충분히 감당할 만했다. 로벨이 화를 내듯 말했다.
“도마 성이 입은 피해도 보상하시오.”
예의상 참석한 도마 경이 깜짝 놀랐다. ‘왜 또 나야?’ 하지만 로벨은 진지했다.
“가을 농사를 망친 대가와 성과 마을의 수리비, 그리고 망가진 대포 다, 다섯 문의 비용을 내시오.”
마지막 대사가 좀 어색한데, 나름 타당한 요구였다. 궁정백은 국왕의 임명장을 품에 넣고 잠시 고민했다.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소. 그러나 최대한 보상하도록 하겠소.”
로벨은 비로소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우정으로 환영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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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비아 왕국의 사실상 항복이었다. 7천 명이나 동원하고 땅 한 조각 점령하지 못한 포클랜드 기사들에게 조롱이, 10배 많은 병력을 격퇴한 로벨 로드릭 왕에게 찬사가 따라왔는데, 기대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무적무패 왕이 이겼다는데?”
“역시 그렇구만.”
“그 나으리들은 질 걸 뻔히 알면서 왜 자꾸 덤비는 거야?”
로벨이 별명값을 120%해서 놀라지도 않았다. 로벨이 져서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나와야 깜짝 놀랄 것이다.
“아니, 아니, 700명으로 7,000명을, 그것도 일방적으로 이겼다니까? 대단하지 않아?”
“뭐, 무적무패 왕이잖아.”
“새삼스럽게 왜 저러는 거야?”
전시에 흔히 나오는 사재기, 피난가기가 없는 것은 다행이지만, 어째 시원섭섭했다. 형식적인 개선식 후 추수가 시작되었다. 북쪽 지방이라 다소 늦은 가을 추수였다.
황금빛 밀밭을 손잡이 두 개 달린 대형 낫으로 쓱쓱- 지워가는 광경은 30여 년을 지켜보아도 장관이었다. 거대한 괴물 쥐가 거대한 치즈를 베어 먹는 것도 같고, 펄펄 끊는 용암을 조금씩 밀어내는 것도 같았다.
“배상금을 두둑이 받은 것은 좋은데...”
로벨의 감수성이 유난히 예민한 걸까, 어린 집사가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걸까, 가슴 벅찬 장관 앞에서 일 이야기를 꺼냈다. 로벨은 베어낸 밀을 조심스럽게 쓸어 담는 아낙과 아이들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난 최선을 다했어! 진짜야! 대포값도 받아냈다고!”
“...혼내는 거 아니에요.”
구박 받는 가장이란 게 이런 걸까. 어쩐지 서글펐다. 어린 집사는 헛기침하고 말했다.
“잉그비아 왕국하고 손잡은 게 문제잖아요. 그 문제를 짚고 넘어갔어야 한다는 거죠.”
“그건... 음...”
어린 집사의 말이 옳았다.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다.
“뭐, 이번에 혼쭐이 났으니 생각을 고쳐먹을지도 모르죠. 안 고쳐도 할 수 있는 게 없고요. 그냥 좀 찝찝하다는 거예요.”
로벨도 괜히 찝찝해졌다. 그러나 불쾌함은 금방 사라졌다. 성 아랫마을에서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노랫가락이 전해졌다.
“Kalt ist's im Oberland, drunten ist's warm; oben sind d'Leut so reich, d'Herzen sind gar net weich(윗동네는 춥고, 아랫동네는 따뜻해요. 윗동네 사람은 부자지만, 마음이 가난해요)”
“Aber da unten 'rum, da sind d'Leut arm, aber so froh und frei und in der Liebe treu(아랫동네는 가난하죠. 하지만 즐겁고 자유로워요. 서로를 믿고 사랑해요)”
로벨의 얼굴이 서서히 펴졌다. 경쾌하면서 가슴 따뜻한 노래였다. 에르나 왕국에서 전래된 웅장한 궁중음악과 달랐다. 음유시인 모임 미네젱거(Minnesanger)에 의해 전파된 볼탄 반도 전통 민요였다. 어린 집사가 입술을 삐죽였다.
“난 저 노래 싫어요.”
“왜? 좋잖아?”
“가사가 별로예요. 마이스터징거(Meistersinger)는 슈바벤 지방의 이야기라 하는데, 사실은 언덕 위의 영주와 언덕 아래의 농민들 이야기라고요.”
로벨은 노랫말에 귀를 기울이고 납득했다. 농민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라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가사를 다르게 하면 되잖아. 음... 옹달샘 같은 걸로?”
“뜬금없이 무슨 옹달샘이에요?”
“예를 들면 그렇다고.”
그리 진지하지 않았다. 로벨은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하는 앞뒤 문맥 없는 가사로 바꿔 흥얼거렸다. 전통 민요에 저작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무튼, 추수가 시작되고 추수제가 다가오자 잉그비아 왕국이건 포비아 왕국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일 중 먹고 마시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뭐예요? 맥주가 왜 이거밖에 없어요?”
“그게, 여름 농사를 망쳐서 보리가 부족했잖습니까요.”
“보리 농사를 여기서만 하는 것도 아니고, 뉴 로드릭 마을이랑 호프 마을이 있잖아요? 양조세도 감면해 줬는데 뭐 했어요?”
“그쪽 맥주는 로드릭 상회에 저당 잡혀서 쓸 수 없습니다요. 이미 판매처가 있다고요.”
“그럼 어쩌자고요? 술 없이 춤추고 노래 부를까요? 눈알 뒤집힌 기사 양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해 볼래요?”
“화, 황금 보리 수도원에 벌꿀주가 있으니 그걸 쓰는 게 어떻습니까?”
눈알 뒤집힌 기사 대표 로벨 로드릭이 벌꿀주란 말에 참았다. 몇 년간 꾸준히 투자한 양봉업이 제값을 할 때가 되었다.
“목초지에 들려야 하니 겸사겸사 수도원도 가보죠.”
어린 집사는 내일 아침까지 맥주 20배럴을 가져다 놓으라고 닦달한 후 술 찌꺼기에 눈독 들이는 철부지 공왕 폐하를 질질 끌며 술도가를 떠났다.
“올해는 조촐하게 치르기로 했잖아? 왜 이리 신경 쓰는 거야?”
로벨이 작게 트림하며 물었다. 기어이 한 잔 얻어먹어 기분이 좋았다.
“그러려고 했는데, 할 짓 없는 기사들이 승리를 축하한다고 몰려올 테니까요.”
“그게 무슨 문제야? 내가 손님을 안 받으면 되잖아?”
“...입장 바꿔서 다시 말해 보세요.”
기사의 몸뚱이는 8할이 자존심으로 이루어졌다. 상대가 공작이든 후작이든 문전박대 당하면 화를 낼 것이다. 로벨은 곰곰이 생각한 후 말했다.
“벌꿀주가 많았으면 좋겠다.”
“그렇죠?”
술에 진심인 리암 수도원장은 벌꿀주뿐만 곡주, 과일주, 시험적인 증류주까지 다량 보유하고 있었다. 괜히 ‘리암 수사표’가 브랜드가 된 것이 아니었다.
“나, 나도 맛봐도 돼?”
숲 속에서 과자집을 발견한 헨젤과 그레텔이 저러할까. 로벨의 두 눈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리암 수도원장은 기꺼이 술독을 개방했다.
“동방에 다녀온 순례자분들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쌀로 담근 술도 있다는데, 기회가 되면 시도해볼까 합니다.”
“쌀이요? 그거 사치품이잖아요? 열에 여덟은 농사짓다 망하는 걸로 아는데요?”
“그건 아마도 치수 때문입니다. 유라피아 대륙은 강수량이 적으니까요.”
어린 집사와 리암 수도원장이 지식을 견주었다. 세속의 지식인과 수도원의 연구자가 교류하는 올바른 사회현상이었다. 반면, 세속의 왕이자 수도원의 후원자는 각종 과일주를 한잔 씩 마시고 얼큰하게 취했다.
“이걸로 하자. 이거 맛있어. 이것도 좋아. 앗, 이것도.”
“...저 화상이 진짜...”
어린 집사는 헛소리하는 고용주를 창고 밖으로 쫓아내고 구두로 계약을 치렀다. 늑대성이 최고 후원자인 만큼 값은 거의 원가였다.
“일 좀 시키려고 데려왔더니 짐이네. 짐이야.”
어린 집사는 모닝스타와 뽀뽀하는 공왕을 못 본 척하고 목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빈말로도 반갑지 않은 손님과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