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49화 (549/605)

549화. 탕아

연기, 울음, 먼지, 바람, 거친 숨소리...

로벨은 빨간 입술을 떼었다가 그냥 닫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하면 안 되었다. 이빨 빠진 성직자의 기도문이 귓가에 맴돌았다.

“옛 신이시여... 옛 신이시여...”

정오에 불타는 가을 밀밭은 기이하고 무서웠다. 열흘 넘게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탓에 기름 약간과 장작 몇 섶으로 불길이 크게 일어났다.

젊은이를 전장에 내보낸 노인들이 용기를 쥐어짜 낫을 들었다. 그러나 괴물 같은 전투마와 괴물을 부리는 억센 용병 앞에서 서푼짜리 용기는 서글픈 몸부림이었다.

“우리도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야. 공왕 폐하의 땅을 침범한 댁네 영주를 탓하라고.”

창칼로 찔러야만 살인이 아니었다. 세 치 혀로 찢어 죽이고, 세금으로 눌러 죽이고, 정치와 모략으로 굶겨 죽였다. 로벨은 자신이 죽인 죄 없는 사람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 귀리 농사를 짓는 수도원이 있습니다.”

과묵한 몬트가 말했다. 고저가 없는 탓에 그곳도 태우자는 의견 같았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순무와 메밀을 심으면 어느 정도 수확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위로였다. 말주변이 없어서 요상한데, 요약하면 ‘농민은 강하다’였다.

“성이 무너지고 왕이 바뀌어도 농민은 어떻게든 살아남습니다. 그러니 근심할 필요 없습니다.”

“저들도 고통을 모르진 않아.”

로벨은 소리 없는 원망을 보내는 노인과 겁에 질려 엉엉 우는 어린아이들을 한번 보고 다시 외면했다.

“이 정도면 됐어. 흉내쟁이를 불러.”

과묵한 몬트는 뿔나팔을 꺼내 힘껏 불었다. 횃불과 칼을 가진 기마 용병이 삼삼오오 모였다. 로벨만큼이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을에 창고가 하나 있습니다.”

“그건 그냥 둬.”

솔직히 말하면 약탈과 방화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하루에 20마일씩 달리는 강행군 때문이다. 로벨의 랜스라 불릴 만큼 충성심이 높은 기마 소대가 아니었으면 진작 탈주했을 것이다.

“다음 영지는 어디입니까요?”

흉내쟁이가 횃불을 잿더미에 던지고 물었다. 로벨은 확인차 물었다.

“여섯 번째지?”

“어제 묵은 목장까지 이미 일곱입니다요.”

식량만 조금(?) 징발하고 지나친 곳이라 작전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았는데,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서인지 행군이 싫증나서인지 숫자를 늘렸다. 로벨은 그냥 넘어가 주었다.

“그럼 본대로 돌아가자.”

“어... 어? 진짜입니까요?”

로벨은 모닝스타를 재촉해 마을에서 멀어졌다. 농민들의 눈빛이 불편한 탓도 있고, 저들이 들어서 안 되는 탓도 있었다.

“우리가 불태운 영지의 주인은 물론이고, 그 주변 영주들도 이탈을 시작했을 거야.”

고향 땅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로벨을 사로잡아 명성을 높이기 위해서 각자 행동하는 기사들이 나올 것이다. 겨울에 굶어 죽는 농민을 줄이기 위해서란 대답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적의 지휘관이 어떻게 나올까?”

흉내쟁이 이하 일반 용병에게 어려운 질문이었다. 투구 아래로 이마를 긁었다.

“글쎄요? 병력이 줄었으니까 일단 후퇴합니까요?”

세 자릿수 이상의 사람을 모아본 적 없는 용병의 대답이었다. 로벨은 금전적으로, 정치적으로 지출을 치른 지휘관의 심리를 꼭 짚었다.

“더 줄어들기 전에 공격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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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용병단의 최고참이자 최고 지휘관 펄프 대장은 죽을 맛이었다.

펄프 ‘대장’이라 불리고, 실제로 대장 노릇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대장 대행이었다. 울프 용병단은 로벨이 만든 용병단이라 로벨이 고용주인 동시에 사령관이었다. 그러나 말 타고 달리기 좋아하는 사령관은 툭하면 단독 작전을 나가니 생때같은 새끼들을 건사하는 것은 항상 대장 대행이었다.

“포병대! 뭐하냐! 쏴! 빨리 쏴! 후발대 오잖아!”

겁쟁이 데비의 포수들이 횃불을 흔들고 후다닥 쭈그려 앉았다. 펄프 대장이 있는 성벽 회랑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짧게 자른 심지가 맹렬히 타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용병도 권장하지 않는 단심이지만, 1분 1초가 긴박한 상황에 안전 따위를 챙길 시간 없었다.

콰과과광-! 쾅-!

조금 늦게 불붙인 한 대 빼고 거의 동시에 포성이 터졌다. 용암 같은 불꽃과 함께 외팔이의 주먹만한 포탄이 날아갔다. 성탑을 뒤덮는 뿌연 연기는 그다음이었다.

쿵- 쿵쾅- 콰강-!

직격만 하면 인마(人馬)가 쪼개지지만, 명중률이 낮아 재수 없는 놈을 골라내는 용도로 쓰였다. 소규모 전투에서는 비싼 화약만 날리는 경우가 흔해 있어도 안 쓸 때가 많았다. 그러나 천 단위 전쟁에서는 달랐다. 포탄에 찢겨지는 직접적인 희생자는 열이 채 안 되지만, 그 ‘찢어지는’ 광경이 워낙 충격적이라 백이 겁을 먹고 천이 주춤거렸다. 슬금슬금 접근하는 포비아 왕국군 후발대가 발을 멈췄다.

“좋아! 좋아! 지금이야! 앞에 놈들 몽땅 치워! 사다리! 사다리 치우라고!”

“거참! 영감탱이! 위험하니까 몸 내밀지 말라고!”

크로스보우맨이 장전된 쿼럴을 날리고 여장 아래 숨으며 한마디 했다. 연세에 비해 열정이 넘쳐서 걱정이었다. 그러나 펄프 대장은 위기감보다 책임감, 사명감이 컸다.

“공왕 폐하가 돌아오실 때까지 성을 지켜야 한다!”

전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집 나간 공왕 폐하가 일을 잘 하는지 하루가 다르게 숫자가 줄긴 하는데, 그래도 아직 5천 명 이상이 남았다. 가죽 후드에 쇠스랑 하나 주워온 농민만 빠지고 그럴싸한 무장의 용병은 남아 골치였다. 도마 성이 고성답지 않게 튼튼하고, 수비에 특화된 크로스보우 중대가 분전해서 그나마 버티고 있었다.

“적이 물러간다! 후퇴한다!”

“당연히 그래야지! 야! 놀지 말고 계속 쏴! 한 놈이라도 줄여야 한다!”

못 버티고 도망가는 포비아 왕국군 뒤통수로 쿼럴이 날아갔다. 낑낑거리며 파비스를 챙기는 놈들이 먼저 맞고, 발이 꼬여 넘어진 놈들이 다음으로 맞았다. 마지막으로 재장전이 끝난 팔코넷이 불을 토했다. 콰과광-! 콰앙-!

세 발은 엉뚱한 땅거죽을 뒤집었지만, 한 발은 억세게 운이 없는 포클랜드 용병의 머리통을 터트리고 껑충 튀어 뜀박질하는 앞줄 용병의 다리를 절단했다. 전설 속의 하피 저리 가라 비명을 지를 테지만 함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왜 세 발 한 발이야? 한 발 어디 갔어?”

펄프 대장은 파비스를 치우고 성탑을 보았다. 겁쟁이 데비가 무어라 외치는데 역시 함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손짓발짓으로 추측건대 대포 한 대가 깨지거나 녹은 모양이다. 한숨이 나왔다.

“어린 집사가 잡아먹으려고 하겠군.”

어린 집사보다 걱정해야 할 것은 내일 치를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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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의 기사들은 펄프 대장만큼이나, 아니, 그것보다 3배쯤 화가 났다. 샘 포클 시절에 지은 낡아빠진 성에 무슨 짓을 했는지 사흘 연속 공격해도 끄덕하지 않았다.

“공성병기! 공성병기가 필요하오!”

“그걸 누가 모르오? 어디서 나무와 바위를 구해온단 말이오?”

“어떻게든 구해야지! 그거 말고 수가 있소? 있으면 내놔 보시오!”

검증된 필승 공략법 ‘포위 후 굶겨 죽이기’가 있으나 시절이 안 좋았다. 무적무패 왕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농작물을 불 싸지르니 자기보신에 투철한 기사들이 온갖 핑계를 대며 이탈했다. 오늘만 해도 전사자보다 이탈자가 더 많았다.

“성을 점령하고 무적무패 왕의 부하를 잡아 협상해야 하오.”

“고작해야 용병인데 공왕이 협상에 응하겠소? 차라리 공왕을 추격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어떻소?”

“그랜드 챔피언을 잡는다고? 그게 가능할 것 같소? 차라리 늑대성을 공격하자고 하시지.”

“...지금 뭐라고 했소?”

“응?”

기사들이 서로를 보았다. 갑자기 그럴듯한 작전이 나왔다.

“빈집털이는 공왕의 전유물이 아니잖소? 우리도 볼탄 반도를 공격하는 것이 어떻소?”

“그러면 전면전이 되는데... 그쪽 기사들이 가만 있을까?”

“지금 싸우는 것은 전쟁 아니오?”

“잠깐, 뒤를 내주고 갈 수 없으니 일단 눈앞에 적을 치워야...”

“아군 병력이 5천이오. 전부 남길 필요 없잖소? 2천 정도 빼도 충분하오.”

“그럼 누가 갈지 정해야겠군.”

어린 집사나 마녀 키르케가 들었으면 감탄했을 것이다. 기사 머리에서 나온 작전으로 최고였다. 한 사흘 정도 일찍 실행했으면 말이다. 전략은 타이밍이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두...

촛불이 흔들리고 발바닥을 간질거렸다. 평생을 말(馬)과 함께 지낸 기사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상황을 깨달았다.

“이 시간에 누가... 설마, 적습인가!”

“이런 제기랄! 모두 나가시오! 병사를 챙기시오!”

머리 쓰는 것은 서툴러도 싸움에는 밝은 기사들이다. 소음의 크기와 방향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경악했다.

“서, 서쪽에서? 로벨 로드릭 왕이 돌아왔나?”

“공왕의 호위병은 스무 명이라 하지 않았소! 이것은, 이것은 못해도...!”

떠들 시간이 아까운 기사는 기사 종자의 말고삐를 빼앗다시피 낚아채 올랐다. 그러나 멀리 가지 못했다. 기마 무리가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깃발 하나가 유난히 크게 펄럭였다.

“로드릭 깃발! 무적무패 왕이다!”

깃발은 하나가 아니었다. 기마의 숫자도 최초 보고 받은 것보다 몇 배 많았다. 고삐를 당기고 두 눈을 부릅떴다. 랜스 끝에 매단 작은 깃발 하나를 간신히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은 새... 검은 숲의 새... 맙소사...”

로벨 로드릭이 돌아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하얀 늑대를 따르는 까마귀 무리와 함께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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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라고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작전을 세우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 운이 좋았다. 어린 집사도 인정하는 영리한 봉신이 전장 가까운 곳에 있으며, 마침 주인을 돕기로 결심했으니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까마귀 성의 존 도너반 자작이 뱀의 계곡의 기사들과 함께 시기적절이 합류했다. 머를 브릭 경, 고르크 슐츠 경, 나마르 아자르 경 등등 기사만 13명이고, 기사 종자와 수행원이 총 37명이었다. 로벨의 호위 랜스를 합치면 총 71명이었다. 전진을 흔들다 못해 뒤집기 충분했다.

로벨은 기쁨을 감추지 않고 선두에서 돌격을 강행했다. 최강의 기사가 이끄는 기마돌격이었다. 그 위용은 길게 서술하면 활자 낭비라 지탄받을 것이었다.

“달려라! 밟아라! 뚫어라!”

“히리야아앗-!”

로벨은 머를 브릭 경에게 빌린 랜스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어설프게 저항하는 병사 셋을 차례로 뚫은 후 지면에 꼿꼿이 세웠다. 무적무패가 왜 무적무패인지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괴, 괴물이다!”

“로벨 왕이다!”

로벨의 무명이 또다시 빛을 발휘했다. 로벨의 정체를 깨달은 병사들은 싸우기를 포기했다. 독전병 역할을 할 기사가 자리를 비워 아무도 막지 못했다. 경전에 기록된 선각자의 기적이 그러할까, 로벨 앞으로 핏빛 바다가 갈라졌다. 자잘한 파도는 뒤따르는 까마귀 성의 기사가 잠재웠다.

“공왕! 이대로 수뇌부를 치겠소?”

슐츠 경이 가까이 붙으며 외쳤다. 로벨은 고개를 저었다. 갤럽(gallop)으로 시작한 돌격이 캔터(canter)로 줄어 있었다.

“성으로! 성으로 갈 것이오!”

로벨의 기사는 아니지만, 우정과 신뢰로 기꺼이 복종했다. 슐츠 경은 워 다트를 옆으로 뿌리고 다시 거리를 벌렸다. 길을 열 것이다.

“공왕 폐하다! 공왕 폐하가 오셨다!”

“성문 열어! 빨랑 열어! 우아악! 더 빨리!”

성 안의 울프 용병단 역시 난리가 났다.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온 고용주 모습에 미쳐 날뛰었다. 펄프 대장은 무거운 책임감을 벗어놓고 중얼거렸다.

“허참,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왕의 귀환? 영웅의 집결?”

진짜 무거운 방패를 가진 조지 솔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돌아온 탕아라 합시다. 유산을 준비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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