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48화 (548/605)

548화. 영웅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은 중립적인 곳이었다.

행정적으로는 볼탄 반도 공국에 속하지만, 역사적, 지리적으로는 포비아 왕국에 속했다. 지배계급 또한 포비아 국왕과 볼탄 반도 공왕 양쪽에 골고루 충성하여 섣불리 한쪽을 편들지 않았다.

“작년에도 오시고... 왜 또...”

“그렇게 되었소. 이해해줘서 고맙소.”

“아직 이해 안 했...”

그러나 힘없는 중립은 존중받지 못하는 법이다. 로벨은 7,000명 같은 700명의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안면 있는 도마 가문 성터에 눌러앉았다. 첫 전투(?)는 손쉽게 이겼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맞긴 한가?’

군사행동을 하여 군사로 대응했으나, 직접적으로 '전쟁'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물론, 7천 명이나 되는 병사를 훈련 삼아 모았을 리는 없으니 심각한 상황은 분명했다. 사실 진짜 심각한 것은 아르노 도마 경이었다. 작년에 300명 끌고 온 것도 끔찍했는데, 올해에는 두 배 넘게 데리고 왔다. 가을 추수가 코앞이라 망정이지, 자칫 재앙이 될 수 있었다.

“차, 창고에 있는 거 전부 내와.”

“벌써 다 내갔습니다요. 콩 한 쪽 남지 않았구만요.”

“제길... 아랫마을 가서 저장 식량 싹 다 긁어와.”

“주민들이 싫어할 텐데요? 뭐, 왕이랑 왕의 병사가 있으니까 반항은 안 하겠지만, 나중에 어찌 나올지...”

“가을걷이가 끝나면 갚는다고 해!”

위에서 누르고 아래에서 찌르는 중간직의 고통이었다. 주종관계가 복잡한 동네라 더욱 그러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공왕 폐하의 위명에 겁을 먹은 것은 맞지만, 그것만으로 순순히 물러갈 리 없습니다.”

펄프 대장, 애꾸눈, 겁쟁이, 발가락, 과묵한 몬트 등 울프 용병단의 실질적인 지휘관이 모여 머리를 맞대었다.

“7천 명이면 사실상 포클랜드의 총력(總力)입니다. 농사일을 팽개치고 모인 만큼 쉬이 흩어지지 않을 겁니다.”

애꾸눈이 전황을 분석했다. 그 정도는 쉽게 예상할 경력자 모임이라 그저 주의를 환기하는 발언이었다. 외팔이가 툴툴거렸다.

“뭘 바라는 게 있으니 저러는 것 아니겠습니까요? 그냥 들어주고 돌려보내시죠.”

“그건 안 돼. 공왕 폐하 체면이 깎이잖아.”

“체면도 체면이지만 얕잡아 보이면 기회가 될 때마다 무력시위하겠지.”

머리 좀 커진 용병들이 반대했다. 평범한 용병이 할 말은 아니었다. 싸우지 않고 페닝을 버는 게 제일이니까. 외팔이가 짧은 팔로 마른세수하고 말했다.

“저쪽도 싸울 생각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우? 공왕 폐하와 한바탕할 작정이면 진작 볼탄 반도로 들어왔겠지.”

기사와 용병이 모두 경악했다.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에... 너 외팔이 맞아?”

“도플갱어다! 도플갱어야!”

“네 이놈! 진짜 외팔이를 어디 두었느냐!”

로벨을 보자마자 후퇴한 이유와 수레바퀴 잘 굴러가는 북부대로를 놔두고 입지가 애매한 포스트 포레스트에 장기 주둔한 이유는 뻔했다. 앞서 말한 대로 총력을 다한 무력시위였다. 앞서 말한 건데 놀란 이유는 그저 ‘외팔이’가 이해했기 때문이다.

“나를 얼마나 바보로 아는 거요!”

“난 아니야. 아야와 이야카보단 똑똑하다고 생각했어.”

“네발 동물 수준이란 겁니까요!”

로벨은 눈알을 슬쩍 피했다. 모닝스타 다음이라 말하지 않아 다행이다.

“그... 체면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요.”

허풍쟁이가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저만한 규모면 국왕이, 그러니까 고른 왕가가 주도한 도발 아니겠습니까?”

“아마 그렇겠지?”

“그럼 저쪽도 체면 때문에 먼저 제안 못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요?”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시위였다.

“하긴... 난 포클랜드의 후작이기도 하니까.”

볼탄 반도의 독립과 별개로, 로벨은 포비아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작위를 하사받은 귀족이었다. 이것은 겔몬족의 오랜 관습-종사제도에 의거한 문제라 상당히 복잡했다. 로벨은 고민 끝에 국왕의 체면을 살려주기로 했다.

“내일 아침 저쪽에 다녀올 사람?”

시선이 천장과 바닥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전령의 생환율을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위험한 일이란 것은 알았다.

“이곳 성주인 도마 경을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응?”

발가락이 헛기침을 섞어 말했다.

“용병 나부랭이보다 기사 나으리가 찾아가는 게 그럴듯하고, 지역민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포클랜드 귀족 나으리들도 함부로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로벨은 잠깐 고민하고 흔쾌히 허락했다.

“그래! 도마 경을 보내자!”

당연히 도마 경의 의사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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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아래에 이어 좌우로도 끼이게 된 아르노 도마 경은 죽상이 되어 양측 군대를 오갔다. 그래도 한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이자 명예 비슷한 것이 있는 기사라 험한 꼴은 당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로벨의 결정은 옳았다.

“에르나 왕국과 맺은 군사동맹을 철회하고, 잉그비아 왕국과 평화협정을 맺어라?”

로벨은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컨틀렛을 벗지 않아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도마 경은 부친이 물려준 통짜 마호가니 테이블이 상할까 힐끔힐끔 보았다. 족히 400페닝은 하는 고급 가구였다.

“웃기는 소리야.”

로벨의 손가락이 멈췄다. 펄프 대장과 고참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권이니 내정간섭이니 하는 개념이 없어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불쾌함은 알았다.

“그리 못하겠다면 어쩔 것인지 물어봤소?”

도마 경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힘으로 그리하게 만들어주겠노라...”

쾅-! 400페닝이 최소 반값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사실 7천 명이나 모아왔으면 그만한 소리는 할만했다. 과거 에르나 왕국과 싸울 때 병력이 그 정도였으니, 포클랜드의 절반, 포비아 왕국 전체로 보면 5분지 1밖에 안 되는 볼탄 반도 정도는 위협할 수 있었다.

“공왕 폐하의 그림자만 봐도 줄행랑치는 것들이 감히?”

“개나 소나 모아온 잡병 따위 무섭지 않습니다요!”

그럼에도 울프 용병단은 겁을 먹지 않았다. 펄프 대장 말대로 ‘무적무패’ 신앙을 믿었다. 로벨은 부담을 털어내고 차분히 명령했다.

“무기와 갑옷을 정비해. 전투마를 배불리 먹이고 대포를 닦아. 언제든지 싸울 수 있게 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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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적보다 많은 병력으로 싸운 적이 거의 없었다.

가난한 세습 기사 출신이라 풍족함과 거리가 멀었다. 백작이 되고 공작이 되어도 주위의 적이 항상 더 크고 강성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승리를 가져갔으니 과연 무적무패라 칭송받을 만했다.

‘암만 그래도... 10배 많은 적은 처음인데...’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란 것이 평소 지론이지만, 그것도 2배나 3배 차이일 때 이야기였다. 무기, 사기, 지형, 속임수 따위로도 10배는 커버하기 힘들었다. 병사가 7천 명이면 기사가 못해도 140명인데, 로벨의 20명 남짓한 랜스(=호위기병)로 감당이 안 되었다.

‘겁쟁이 소대가 있어서 다행이야.’

로벨은 수레에 실린 소형 청동대포-팔코넷 5문을 보았다. 겨울에 쓰고 남은 화약도 되는대로 가져와 쌓아 놓았다. 저걸로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기사를 견제할 수단은 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로벨은 실현 가능한 전략, 전술을 수십 개 짜내고 폐기했다. 승산이 떨어지거나 피해가 너무 크거나 명예롭지 못했다. 십년지기 펄프 대장이 고충을 이해했다.

“가장 안전한 것은 이 성에서 수비하는 겁니다.”

도마 경이 들으면 산채로 잡아먹을 소리였다. 다행히 로벨이 반대했다.

“수비가 아니라 고립이야.”

추수가 끝나 식량을 성 안에 들였다면 겨울까지 버텨서 승리를 꾀할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성 안에 갇힌 사이 적들은 들판에 널린 가을 작물로 잔치를 벌일 것이다.

“그럼 먼저 공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공왕 폐하의 명성에 겁을 먹고 있으니 강하게 나가면 도망칠 겁니다.”

“그건 도박이잖아.”

“승률이 높으면 도박도 할 만 하지 않습니까?”

“그 승률이 절반 이하야.”

시야가 트인 개활지라 기습이 어려웠다. 새벽녘에 이동하여 동이 틀 때 공격하면 성공 가능성이 있지만, 그걸로 7천 명을 와해시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전통적인 영주들의 군대라 수십 개 부대로 쪼개져 있었다. 한두 곳을 무너트려도 전력차가 뒤집히지 않았다. 펄프 대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로벨은 예의상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다가 깨달았다. 진짜 도움이 되었다.

“전통적인 영주들의 군대...”

로벨의 표정이 바뀌었다. 펄프 대장은 닦달하지 않고 기다렸다. 무언가 떠올린 모양이다. 칼자루 위로 올라가는 손이 그 증거였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폼멜을 만지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작고 예쁜 송곳니가 드러났다.

“영주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뭐지?”

“어... 어려운 질문이군요. 세금을 못 걷는 걸까요? 아니면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거?”

“그래. 맞아.”

로벨은 펄프 대장의 작전을 반반으로 받아들였다. 성을 수비하면서 공격에 나선 것이다. 혹자는 과감하다고 말하고, 혹자는 미쳤다고 말하는데, 어느 쪽이든 ‘로벨 로드릭답다’는 평에 이견이 없었다.

로벨은 적은 병력을 더욱 적게 만들어 장점으로 삼았다. 7천 명의 채로 잡히지 않는 작은 기병으로 추수를 앞둔 적의 본진‘들’을 기습했다. 전문적이고 고상한 명칭이 따로 있는지 모르지만, 로벨의 지난날을 비출 때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이름이 있었다.

“빈집털이야!”

무려 16년 역사의 뿌리 깊은 빈집털이범이 제 버릇을 못 고치고 날뛰기 시작했다. 무적무패의 막연한 두려움을 현실로 체험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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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포레스트의 성은 작지만 단단했다.

3백 명에 숙련된 크로스보우맨과 5문의 최신식 대포와 40년 경력의 노련한 용병대장이 더해지면 난공불락에서 ‘난공’은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로차드 영지의 저장창고가 잿더미가 되었소!”

“뭣이? 어제 브란스 영지의 밀밭이 습격 받았다지 않았소?”

“하, 하루만에 23마일을 돌파해서... 그럼 내 영지도 안전하지 않은데?”

엄밀히 말하면 ‘공(攻)’조차 불확실했다.

“진정하시오! 아무리 무적무패 왕이라도 20여 기의 기병으로 성을 넘지는 못하...”

“경의 밀밭에는 성벽이 둘러졌소이까? 저 망할 공왕이 가을 작물을 불 싸지르지 않소이까!”

포클랜드 각지에서 모은 군대가 성을 포위했으나, 공격받는 것은 군대의 본진이었다.

“아, 안 되겠소. 본인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지금 종군 맹세를 어기겠다는 것이오?”

“국왕 폐하의 허락이 있으면 가능하지 않소. 그러니 본인이 포클랜드 시티로 가서...”

“경의 영지가 그쪽이니까 하는 말이잖소!”

포비아 왕국군의 또 다른 문제는 구심점이 없다는 것이다. 국왕은 왕성에 숨어있고, 한때 12기사의 후예라 불리던 영웅들은 날개가 꺾였으니 새 시대의 새로운 영웅을 막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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