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7화. 눈빛
에르나 왕국의 ‘자칭’ 무적함대를 격파한 잉그비아 왕국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드 컨티넨트가 있는 외해로 뻗어갔다. 기세만 보면 신대륙 전체를 식민지로 삼고 남았다. 기세만 보면 말이다.
잉그비아 왕국의 위풍당당한 원정함대는 외해의 작은 섬을 몇 개 점령했으나 서드 컨트넨트 해안에는 이르지 못했다. 에르나 왕국이 지난 몇 년 동안 쌓은 해안 요새들 때문이다. 좀 더 냉철하게 말하면 요새를 점령할 병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빌어먹을! 본국의 지원은 왜 이리 늦는 것인가!”
“보나마나 의회의 잡것들이 발목을 잡고 있지 않겠소!”
숙적 에르나 왕국의 함대가 사라진 지금이 서드 컨티넨트를 장악할 기회였다. 잉그비아 섬을 위협하는 최악의 적만 아니면 말이다.
어린 왕과 기사들은 볼탄 반도에서 패배한 일을 잊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로벨 로드릭 왕이 무서웠다. 흑태자 시절부터 계산하면 7전 1승 6패였다. 알량한 자존심 빼고, 지상전만 따지면 전패(全敗)였다.
“무적무패 왕이 바다를 건너 잉그비아 섬에 상륙하면...”
“절대! 절대 북해를 비울 수 없소! 절대로!”
제1, 제2왕립해군을 북해에 묶어두고, 조잡한 외해함대만 운영하니 지리멸렬한 것은 당연했다. 덕분에 녹다운 된 에르나 왕국은 간신히 숨을 돌렸고, 기회를 엿보던 포클랜드는 협상의 우위를 가져갔다.
로벨이 아무 생각 없이 추수제를 준비하는 사이 일어난 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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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해 식민지 주인이 누가 되든 관심 없고, 잉그비아 섬을 정복할 생각도 한 적 없었다.
그런 것은 세상 사는 게 심심하거나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가 하는 것이지, 로벨처럼 게으르고 보리빵 하나에 행복한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뻔질나게 찾아오는 사절들도 통 이해되지 않았다.
“또 왔다고? 어제 다녀갔잖아?”
“그건 에르나 왕국 사절이고요. 오늘은 포비아 국왕 사절단이에요. 사흘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그렇게 오래전 일은 기억 못해!”
“...아침에 먹은 음식은 기억하세요?”
로벨은 국제적인 관심에 진저리쳤다. 에르나 왕국, 포비아 왕국, 잉그비아 왕국, 네일 공국, 아이란드 왕국, 심지어 남부 자유도시의 도제(Doge)들까지 사람을 보내왔다. 핑계는 다양했다. 패잔병을 돌봐준 감사 사절, 포로송환을 위한 협상 사절, 관세 품목을 논의하는 교역 사절, 정기적인 우호 사절 등등. 그러나 진짜 목적은 동일했다. 사람 대하는 것이 서툰 로벨조차 눈치 챌 정도였다.
“우리가 싸우길 바라나 봐.”
“그쪽이 반이고, 싸울까봐 걱정하는 쪽이 나머지 반이죠.”
어린 집사는 기분이 좋았다. 국제적인 관심 때문이 아니라 부가적인 수입 때문이다. 명색이 사절인 만큼 빈손으로 오는 자는 없었다. 금은보석이 세공된 공예품, 여우 꼬리가 그대로 붙어 있는 최고급 모피, 후추, 계피, 사프란 등의 값비싼 향신료와 동방의 신비로운 음료-증류주 따위가 가득 쌓였다. 로벨의 취향을 적극 고려해 쇠붙이를 바친 사절은 ‘실세’ 눈에 벗어났다. 정보력이 애매한 경우였다.
“히히힛! 내년 봄까지 품위 유지비는 걱정 없겠어요.”
로벨이 생각하는 품위는 페닝이 아니었다. 그래서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그냥 솔직하게 싸울 생각 없다고 하면 되지 않아? 계속 시간 끌면 오해할 텐데?”
“무슨 말씀을! 오해하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야 뇌물이 생기니까?”
“그건 당연한 말씀... 이 아니라, 이게 다 국제정세를 위해서예요.”
여우 꼬리를 양 볼에 비비며 말하니 설득력이 없었다. 아야와 이야카가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우리가 평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면 잉그비아 왕국은 즉시 서드 컨티넨트 정복에 나설 거예요. 해상전력이 괴멸하다시피 한 에르나 왕국은 식민지를 몽땅 잃겠죠. 그럼 어떻게 될까요?”
“음...”
로벨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 집사가 답답해서 소리를 조금 높였다.
“세상의 중심이 북해가 된다고요.”
서드 컨티넨트의 막대한 자원이 잉그비아 왕국으로 흘러 들어가면 가능성이 있었다. 인어해 교역이 주력이며, 잉그비아 왕국과 북해 지배권을 두고 싸우는 늑대성 입장에서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이며 말했다.
“공왕 폐하 말대로 잉그비아 왕국과 싸울 수 없죠. 누구 좋으라고 피와 피 같은 페닝을 흘려요? 그치만 안 싸운다고 광고할 필요도 없어요. 가만히 숨만 쉬고 있으면 알아서 눈치 보는데, 계속 숨만 쉬자고요.”
로벨이 작게 박수쳤다.
“와! 우리 집사 똑똑해!”
“어험. 험. 그런 얘기 자주 듣죠.”
그러나 세상일은 한쪽 의견만으로 굴러가지 않았다. 어린 집사보다 똑똑한 사람과 정반대로 멍청한 사람도 결정권이 있었다. 애초에 정치, 외교에 멍텅구리인 로벨과 어린 집사가 판단해서 안 될 일이었다. 에르나 왕국과 볼탄 반도를 견제하기 위해 잉그비아 왕국과 포비아 왕국이 손을 잡았다.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에 집결하는 7천 명의 포클랜드 병력이 그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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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나 왕국&볼탄 반도 동맹을 동서동맹이라 칭하고, 잉그비아 왕국&포비아 왕국 동맹을 남북동맹이라 칭했다. 다시 말해 두 세력의 협력이 반박의 여지없이 공개되었다는 뜻이다.
“포비아 국왕이 왜...? 우리가 뭘 잘못 했는데?”
로벨 입장에서 퍽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포비아 왕국의 입장도 이해는 되었다. 에르나 왕국과 볼탄 반도가 손잡으면 포비아 왕국은 지정학적으로 샌드위치 꼴이 된다. 네일 공국과 검은 숲은 볼탄 반도에 우호적이고, 사트로 가문은 사실상 로드릭 가문에 종속되었으니, 잉그비아 왕국 외에 도움을 청할 세력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 의사를 물어볼 만하잖아?”
의사를 물으러 온 사절들을 홀대했다. 그래도 로벨네 잘못만은 아니었다. 1, 2차 북해전쟁 당시 지원요청을 무시하여 제 발 저린 탓도 있었다. 즉, 포비아 왕국이 볼 때 로벨 왕은 포클랜드에 심히 유감을 가지고 있으며, 에르나 왕국과 함께 공통된 적을 칠 태도를 취한 것이다. 그러니 함께 ‘공통된 적’으로 분류된 잉그비아 왕국과 손잡는 것은 당연했다. 어린 집사가 간신히 분석을 끝내고 두 손 들었다.
“이해했어요. 다 이해했는데, 가을 추수를 앞두고 군사 행동하는 것은 선을 넘었잖아요?”
당면한 문제는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에 모인 7천 명의 군사였다. 리암 수사가 조심스레 의견을 꺼냈다.
“우리도 군사를 모으면...”
“그건 어렵습니다. 어린 집사 말대로 농번기고, 겨울과 봄에 의무 종군을 강요한 터라 아무도 동참하지 않을 겁니다.”
페리 행정관이 냉정하게 말을 막았다. 적이 볼탄 반도로 들어오면 위기의식이 생겨 동조하겠지만, 포스트 포레스트는 엄밀히 포클랜드 지방이었다. 충성 계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로벨은 흰머리의 펄프 대장에게 물었다.
“울프 용병단만으로 견제할 수 있을까?”
울프 용병단의 총병력은 1천 33명이지만, 성을 지키고, 광산을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고, 가도를 순찰하는 등의 일을 해야 하기에 최대로 동원해도 700명 이상 움직이기 힘들었다. 포비아 왕국군의 10분지 1일이었다. 펄프 대장이 말이 없자 어린 집사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추가로 프리랜서를 고용해도 되니까. 중요한 것은 용병들의 사기잖아? 못 하겠다고 죄다 빼지만 않으면...”
“싸울 수 있습니다.”
펄프 대장이 조용히 대답했다. 어린 집사, 리암 수사, 마녀 키르케 등은 감탄하면서도 울프 용병단의 사기가 그렇게 높은가 의심했다. ‘열 배가 넘는 적과 싸울 거라고요? 진짜요?’ 펄프 대장이 자세를 바꿔서 추가 설명했다.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가능합니다.”
“무슨 조건? 급료? 무기? 방어시설?”
로벨이 전술적 가치를 나열하자 펄프 대장이 전략적 가치로 바꿔주었다.
“공왕 폐하께서 직접 지휘하시면 싸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 무적무패는 신화였다. 신앙이었다. 울프 용병단은 로벨이 있으면 이긴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놀랍게도 복무를 오래한 용병일수록 신앙심이 깊었다.
“하긴, 공왕 폐하가 없는 곳에서는 지다가 공왕 폐하가 나서면 기적처럼 이기곤 했죠.”
“아무리 그래도 7천 명의 대군과 싸울 수 있습니까?”
펜과 종이를 기가 막히게 다루지만, 전장에는 나선 적 없는 페리 행정관이 의문을 표시했다. 펄프 대장이 웃으며 말했다.
“어디 우리 애들뿐이겠소?”
“우리 애들? 그럼 울프 용병단 말고 누가 또 싸웁니까?”
“적이 싸울 거요. 포비아 왕국군 말이오.”
펄프 대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로벨과 마녀 키르케조차 의아해했다. 그러나 늙은 용병은 지혜로웠다. 당사자가 당사자라 알지 못하는 것을 제대로 보았다. 로벨이 전장에 나서는 순간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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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포레스트의 밋밋한 평야. 가을 추수를 앞둔 노란 밀밭을 좌우에 두고 소름 끼치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로벨 로드릭 왕이닷!”
로벨은 자신의 이름을 비명처럼 외치는 무례한 적을 찾았다. 신수(神樹)의 힘으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무, 무적무패 왕이야! 그랜드 챔피언 나이트야!”
“괴물 살해자! 잉그비아인 학살자! 도시를 태우는 자!”
어째 고향에서보다 호칭이 다양했다. 그냥 떠들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모닝스타가 장난스럽게 몇 걸음 나가자 포비아 왕국군 용병이 우르르 뒷걸음쳤다. 선두의 일부는 발이 걸려 넘어지기까지 했다. 로벨은 어이가 없어서 펄프 대장에게 물었다.
“왜들 저래? 싸우러 온 거 아니야?”
펄프 대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공왕 폐하의 무명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드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린 집사가 들으면 ‘그야말로 경천동지군요!’ 어쩌고 아는 척했을 텐데, 원정 규모가 작아 따라오지 않았다. 그 대신 700명의 울프 용병단이 겁쟁이 적을 향해 야유를 쏟아 부었다.
“이 자식들아! 우리 공왕 폐하가 무섭냐?”
“우린 저런 폐하를 맨날 보고 산다! 우린 안 무섭냐!”
“...내가 무슨 사람 잡아먹는 괴물도 아니고...”
로벨은 자신을 팔아 위세를 부리는 울프 용병단을 슬프게 보았다. 그래도 놀라울 만큼 효과적이었다. 일선에 병사들뿐만 아니라 포클랜드 기사들까지 동요했다. 깃발 몇 개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전령이 다급히 뛰어다녔다.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어? 저것들이 후퇴하는데요?”
허풍쟁이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매일 가까이서 보아 몰랐는데, ‘로벨 로드릭 왕’의 이름이 대단하긴 대단했다.
“가만, 10배 많은 적을 눈빛만으로 쫓아내셨네요? 그럼 눈빛왕? 눈깔왕? 눈깔대마왕?”
“이상한 별명 늘리지 마!”
이기긴 이겼는데, 이상하게 기분 나쁜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