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46화 (546/605)

546화. 회항

여름이 깊어갔다.

햇살을 먹은 과일은 고운 빛깔로 자신을 치장하고, 이슬 맺힌 가을 작물이 겸손하게 허리를 굽혀갔다. 개울가에는 더위를 잊은 아이들이 물장구치고 술도가에는 술향이 그윽했다.

로벨은 우플랑드의 펑퍼짐한 소매를 걷고 허리에 늘어진 흐룬팅 칼집을 살짝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정지했다.

태양이 가장 높은 하늘에 오르고 바람이 가장 작은 풀잎에 부서져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점점 알 수 없다니까. 저게 무슨 훈련이야?”

아야와 이야카가 혀를 찼다. 어린 집사 말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털가죽 때문이다.

로벨의 훈련은 일종의 복기(復記)였다. 그동안 치른 싸움을 하나하나 되뇌고 있었다. 늑대왕, 불사신, 바다사자, 볼프 후작, 그렉 페럿 경, 기타 등등 이름 모를 기사들. 제자리에서 뛰고 바위를 던지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되었다.

“후우...”

로벨은 칼을 갈무리했다. 뽑지도 않은 칼을 어떻게 정리하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한데, 분명 갈무리였다.

“이제 끝났어요?”

“...응.”

어린 집사가 수건을 주었다. 땀 닦으라고 준비했는데 땀이 나지 않아 먼지떨이로 사용되었다. 어린 집사는 새삼 신기했다.

“이 날씨에 왜 그리 멀쩡해요? 안 더워요?”

“음... 가만히 서 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옛날에는 덥다고 수시로 물 뒤집어썼잖아요.”

로벨은 어린 집사 손에 들린 수통을 보았다.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불쑥 손을 뻗었다. 어린 집사는 화들짝 놀라 피했다.

“그때가 좋다는 게 아니구요! 하지마요! 안 돼요!”

“...그냥 마시려는 거야. 안 더워. 안 뿌려.”

로벨은 미심쩍은 수통을 받아 얌전히 마시기만 했다. 나이를 먹어 점잖아진 것은 아야와 이야카만이 아니었다.

“공왕 폐하, 페리 피터입니다.”

페리 행정관이 평소의 조용한 목소리로 다가왔다. 여름 수확이 끝나 한가할 법한데, 몰골이 영 좋지 않았다.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에르나 왕국 해군이 잉그비아 해군에게 패배했습니다.”

로벨은 무심코 하늘을 보았다. 올해 장마 구름은 서쪽에서 오는 듯했다.

@

실제 전투가 벌어진 것은 32일 전이지만, 바람이 남쪽으로 불지 않아 이제야 소식이 전해졌다. 여기서 바람은 은유가 아니라 진짜 바람이었다.

“여름이라 동남풍이 불지요.”

늑대성의 유일한 해전 전문가 이안 선장이 해도를 펼치고 운을 뗐다. 육지 지도와 달리 선이 수평으로 복잡했다.

“전투가 벌어진 포츠담 해협은 남북으로 길고 좁아 우회가 어려운 곳입니다. 바람을 등지면 더욱 그렇지요.”

“이렇게 크고 넓은데 우회가 어렵다니? 무슨 말이오?”

펄프 대장이 해협을 손뼘으로 재며 물었다. 해도 보는 법은 모르지만, 시골 꼬마들의 보물지도가 아닌 이상 로드릭 시티 몇 개가 들어갈 공간이 분명했다. 이안 선장은 40년 경력의 지상전의 달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사람이 아니라 선박이 다니는 길입니다. 그것도 수십 척이 동시에 지나가지요.”

워낙 험상궂은 얼굴이라 웃어도 무시무시했다. 펄프 대장은 헛기침으로 한발 물러났다.

“그리고 배라는 녀석은 사람처럼 제자리에서 돌지 못합니다. 범선이냐 갤리선이냐, 첨저선(尖底船)이냐 평저선(平底船)이냐 따라 선회반경이 차이나지만, 수십 척이 뭉친 곳에서는 최소한의 거리가 확보되어야 합니다.”

영리한 기사와 용병은 그냥 이해한 척했다. 의문을 제기한 펄프 대장만 몹쓸 노인이 되었다.

“측풍이 불면 그나마 수월하지만, 시기가 안 좋았습니다. 해협에 들어온 에르나 왕국 함대는 배후를 습격 받았습니다.”

이안 선장이 모형 배를 이리저리 옮겼다. 에르나 왕국의 거대 선박들을 해협에 밀어놓고, 뒤쪽에 잉그비아 왕국 배를 두었다.

“잉그비아 왕국 지휘관은 똑똑한 자입니다. 작고 빠른 해적선을 이용해 전투가 아니라 사냥을 시작했습니다. 기습전에 도가 튼 놈들이니 재주야 말할 것 없지요. 그리고 에르나 왕국 제독의 실책도 컸습니다.”

앞에 가는 에르나 왕국 함대의 뱃머리를 조금 돌렸다. 전부는 아니고 반만 돌렸다.

“후위에 배를 희생하더라도 해협을 벗어나는 것이 좋았을 것을, 무식하고 용감하게 반격을 시도합니다. 안 그래도 좁은 해역에서 바람을 거슬러 싸우려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자기들끼리 충돌하여 침몰한 배도 꽤 있을 겁니다.”

절반쯤 돌린 모형 배를 그대로 넘어트렸다.

“거함거포를 제일로 아는 에르나 왕국 해군을 제대로 엿 먹였지요.”

활약하는 장소가 다르지만, 전략전술로 비슷한 감이 있는 로벨이 감탄했다.

“잉그비아 왕국 지휘관, 그러니까 제독이 누구야? 이 작전을 세운 기사 말이야.”

“프랜시스 드레이크 남작입니다. 본래는 서드 컨티넨트에서 활동하는 사략해적인데 전쟁 직전에 기사 작위를 받고 참전했다 합니다.”

로벨은 새로운 전설이 된 잉그비아 해군 사령관 이름을 두세 번 중얼거렸다. 마녀 키르케가 모형 배 하나를 슬쩍하며 물었다.

“이렇게 배가 많은데 전부 당했어요?”

이안 선장은 귀여운 마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펄프 대장한테 보인 것과 조금 달랐다.

“전투에서 피해를 입은 배는 사실 많지 않습니다. 공간이 협소하니 맞붙어 싸울 수 있는 배가 많지 않지요. 끽해야 7, 8척입니다. 그런데 하필 당한 배들이 보급선이었죠.”

“아...”

로벨과 마녀, 그리고 보급 문제에 예민한 어린 집사가 탄식했다.

“무기, 화약, 식량, 식수를 채운 배지요. 전투력이 급감하여 상륙할 엄두를 못 냈을 겁니다. 계절풍 탓에 회항도 못하지요. 계속 북상하여 잉그비아 섬 최북단에서 반대 해안으로 남하를 시도했습니다. 어리석은 짓이지요. 악명 높은 잉그비아 해적들이 고이 보낼 리 없으니까요. 제가 잉그비아 국왕이면 현상금을 걸었을 겁니다.”

여기서 터지고, 저기서 터지고, 쫄쫄 굶으며 도망가 간신히 도착한 곳이 볼탄 반도 북해안이었다. 따라서 바람 탓이 맞았다.

“그럼 지금 어디 있어?”

여기서부터는 페리 행정관 소관이었다. 북쪽 영주들이 보내온 공문서를 해도 위에 올려놓았다.

“중형 이상의 갤리어스 7척과 선원 277명입니다. 네일 공국쪽으로 흘러간 배도 있고, 뒤처진 배도 있다 하니 시간이 지나면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로벨은 손가락을 꼽아 계산한 후 물었다.

“사람이 너무 적지 않아? 에르나 왕국 전함은 엄청 크잖아?”

“전투 중에 죽은 선원이 많고... 아사한 자들도 다수 있다고 합니다.”

끔찍한 죽음이라 다들 인상을 찌푸렸다. 페리 행정관은 헛기침하고 말했다.

“지금은 멀쩡해져서 배를 수리할 자금을 빌리고 있습니다. 선원이 아닌 자들은 육로로 귀국을 희망하고 있고요.”

“그 말을 전한 것은 도와달라는 거겠지?”

“공왕 폐하께서 북부대로의 주인이시니까요.”

비공식적이지만 동맹을 맺은 이유도 있었다. 일반 병사는 몰라도 수뇌부들은 알고 찾아온 것이다

“뭐, 도와줘야지. 호킨 페럿 경과 약속했으니까.”

“쳇. 폐하는 그쪽 집안한테 너무 잘 해줘요.”

어린 집사가 조금 투덜거렸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죽다 살아난 사람을 다시 죽일 만큼 모질지 않았다. 에르나 왕국에 빚을 달아두면 훗날 도움이 될 거란 계산도 있었다. 국가는 그리 쉽게 망하지 않았다.

“옛 신의 기사들은 어떻게 됐어?”

빚을 달아둘 집단이 하나 더 있었다. 성배를 찾아 떠난 자들이다.

“강철같은 자들이 아닙니까. 단단하고 무겁지요.”

웃지 못할 농담이었다. 땅 위에서는 대적할 자가 없으나, 물 위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로벨은 더글라스 경을 비롯해 안면 있는 기사들을 걱정했다. 기왕이면 전부 살았으면 좋겠다.

“사트로 시티에 사람을 보내서 귀국 희망자를 이쪽으로 후송해. 강철갑옷 호에 태워 보낼 테니까.”

“하긴, 육로로 가는 것보다 안전하겠군요.”

로벨은 이것저것 지시하다가 얼마 전 연회장에서 치러진 결투를 떠올렸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승부는 알 수 없었다.

“무적무패의 비밀을 알려줄까?”

무적무패 왕이 그리 말하자 모두가 돌아보았다. 로벨은 진지하게 말했다.

“적이 없으면 무적이고, 싸우지 않으면 무패야.”

실없는 소리라 생각한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은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녀 키르케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것은 전쟁사에 한하여 진리였다. 가장 좋은 무기는 완벽한 상태를 유지한 채 고물이 되는 거라는 말도 있으니까. 다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워온 로벨이 말해서 설득력은 다소 떨어졌다.

@

울프 용병단 북군 2개 소대가 에르나 왕국 패잔병을 후송해 왔다. 일반 선원은 거의 없고, 귀족과 자유민, 그리고 옛 신의 사제들이었다.

“더글라스 무리엘 경!”

영광스러운 갑옷을 버린 채 비무장으로 생환한 옛 신의 기사도 있었다. 로벨이 모두 보는 앞에서 아는 척하자 불편한 듯 움찔했다.

“오랜만에... 다시 뵙습니다.”

볼품없는 꼬락서니가 부끄러워서인지, 300명의 형제를 잃은 것이 슬퍼서인지, 삐져서 인사도 안 하고 떠난 것이 무안해서인지 지난번보다 저자세였다. 그러나 로벨은 개의치 않았다. 구경꾼을 헤집고 나아가 전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깨끗한 옷이 지저분해져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공왕... 공왕 폐하?”

“소식을 듣고 걱정을 많이 했소. 혹여나 포로로 잡혔을까 말이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오.”

로벨은 거짓말을 못한다. 그것은 단점이 아니다. 진솔함보다 감동을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크흑... 큭...”

더글라스 경은 아랫입술 깨물고 고개를 위로 들었다. 지옥 같았던 항해가 이제야 북받쳐 올라왔다. 어머니 품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간 이후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이 젊은 기사의 눈물은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전해졌다.

로벨은 더글라스 경을 포함해 패잔병을 모두 환대했다. 기사로서, 그리고 집주인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라 했지만, 주위의 반응은 날카로웠다.

‘에르나 왕국과 로드릭 공국이 손을 잡은 것이 확실하군.’

‘옛 신의 교단까지 한통속이요.’

‘그렇다면 동맹 규모가 상당하지 않소!’

‘잉그비아 왕국이 잘못한 거요. 이 세상 바다가 다 자기 것인 양 구니 원...’

흥미본위로 구경하는 사람도 있으나, 발등의 불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두 세력 사이에 위치한 포비아 왕국, 정확히는 포클랜드 사람들이었다.

‘적국과 손을 잡다니요? 공왕이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잉그비아 왕국과 싸우느라 그런 것 아니겠소.’

‘아무리 그래도 300년의 적이오! 저들이 우리 땅을 침략한 것이 30번이 넘소!’

‘우리가 아니라 포클랜드요. 볼탄 반도는 침략받은 적 없잖소.’

연거푸 치러진 전쟁과 복잡한 동맹관계였다. 위기의식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정치감각이 둔한 어린 집사마저 이상기류를 감지했다.

“그냥 조용히 보낼 걸 그랬나 봐요.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우리가 싸울 때 방관한 자들이야. 신경 쓸 필요 없어.”

어린 집사보다 감이 떨어지는 로벨은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다. 승리에 취한 잉그비아 왕국과 성배 탈환에 실패한 옛 신의 교단이 어찌 나올지 더 신경 썼다. 그래서 포클랜드와 잉그비아 왕국이 손을 잡았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