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45화 (545/605)

545화. 확률

싸움 구경은 불구경과 더불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엔터테이먼트였다. 거친 삶이 자랑인 사람한테는 더욱 그러했다. 결투, 처형, 보복, 살인 등등 피 냄새가 짙게 나는 단어가 나오자 빠르게 흥분했다. 술잔을 집어던지고 손수 테이블을 당겨서 공간을 넓혔다.

그러나 선뜻 앞으로 나서는 기사는 없었다. 이름이 있는 기사들은 기사도 무엇도 아닌 사생아와 결투하는 것이 격이 떨어진다 생각했다. 이미 결혼을 했거나 물려받은 장원이 있는 기사도 손익계산 후 발을 뺐다. 서임 받은 지 얼마 안 된 젊은 기사와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시골 기사는 보다 현실적인 승산을 따졌다.

‘저 덩치는 부담스러운데...’

‘진짜 뮬러 경의 아들이면 검술도 배웠을 터, 어찌할까.’

서로 눈치를 보는 가운데,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자와 일단 지르고 보는 자가 나섰다.

“바그너 가문의 서 에르윈이요! 레이디의 명예를 위해 대신 싸우겠소!”

“서 침버만! 레이디의 검이 되어 옛 신의 정의를 실현하리라!”

뒤늦게 몇 명 더 칼을 뽑았지만, 기회는 물 건너갔다. 레이디 뮬러는 거의 동시에 나선 에르윈 경과 침버만 경을 보았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고, 방금 들은 이름 외에 아는 것이 하나 없었다. 그래도 선택해야 했다.

“에르윈 폰 바그너 경에게 제 명예를 맡기겠습니다.”

결투의 대리인이자 장래 남편이 될지 모르는 사내가 정해졌다. 선택 기준은 단순했다. 키가 2인치 정도 더 크고 튼튼한 가죽 더블릿을 입었다.

기사들은 경박한 웃음과 걸쭉한 트림으로 에르윈 경을 응원했다. 기사 낭만에 심취한 후대인이 보면 기겁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기사의 본래 모습인 것을...

에르윈 경은 레이디 앞에 무릎 꿇고 손등에 키스했다. 레이디는 미리 준비한 손수건을 건네주고 한발 물러났다. 이것으로 결투 자격이 위임되었다.

“내, 내 의사는...?”

유일하게 황당한 사람은 ‘사생아’ 뮬러뿐이었다. 기사가 되고 싶었으나 기사의 심리는 알지 못한 모양이다. 기사란 본디 분위기파였다.

“옛 신과 로벨 로드릭의 이름으로 공정한 심판을 약속하오. 결투인은 무기를 준비하시오.”

로벨은 약속대로 결투의 증인이 되었다. 로벨 외에도 300명이 넘는 기사가 입회인이었다. 식탁을 두드리고 발을 굴리며 싸움을 부추겼다. 로벨이나 페르젠 백작 같은 고귀한 분이 결투하면 나름 진지하겠지만, 풋내기 기사와 자칭 기사의 결투라 한없이 가벼웠다. 허나, 가볍다고 피할 수는 없었다. ‘사생아’ 뮬러는 두 눈을 질근 감고 허리에 찬 칼을 뽑았다. 기사 서임에 쓰려고 거금 주고 빌려온 롱소드였다. 이렇게 피를 묻힐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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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의 속된 말로 x밥... 아니, 하수들 싸움이 재미있다는 말이 있었다. 나름 일리 있는 것이 고수들은 칼질 한 번 걸음걸이 한 번이 치명적이었다. 평복 결투는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 승부가 났다. 그러나 하수들의 싸움은 길고 지저분했다.

“조금만 더 힘내시오! 거의 이겼소! 거의!”

“으하하핫! 저 친구 마스터가 누구요? 얼굴 좀 봅시다!”

응원인지 조롱인지 구분이 안 갔다. 에르윈 경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기사 서임을 받은 만큼 기본기는 있는데, 실전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평복으로 진검을 겨루는 것이 처음인 듯 과감하지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을 여러 번 놓쳤다.

‘사생아’ 뮬러의 꼴은 더욱 심각했다. 자수가 들어간 고급 더블릿은 거리 부랑자도 외면할 넝마가 되었고, 여러 장 덧댄 비단 브레는 피에 흠뻑 젖어 남사스럽게 달라붙었다. 체력이 바닥나 칼질 할 때마다 휘청거렸다. 숫제 칼이 사람을 휘두르는 꼴이었다.

“어린 집사가 두 배 반쯤 잘 싸우겠다.”

“...어중간하게 두 배 반이 뭐예요?”

그래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관객 때문인지 출혈 때문인지 더 이상 싸우기 힘들었다. 에르윈 경은 피에 젖은 롱소드를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공왕 폐하와 여러 기사들이 지켜보니 부끄럽지 않게 끝냅시다.”

‘사생아’ 뮬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대답할 힘이 없었다. 바닥에 뿌려진 피 중 8할은 뮬러의 피였다. 7살 때부터 기사로 교육받은 자와 30여 년을 무두장이로 살아온 자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옛 신께서 그대를 긍휼히 여길 것이오.”

지금껏 소극적이던 에르윈 경이 크게 발은 내디뎠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할 기세였다. 진작 그랬으면 보기 좋게 승부가 났을 텐데, 참으로 아쉬웠다. 여기서 ‘아쉽다’의 의미는 매우 컸다.

“아... 옛 신이시여...”

사생아가 오기로 흘린 피일까, 기사들이 야유하며 뿌린 술일까, 에르윈 경은 마루에 흥건히 고인 액체를 밟고 한 뼘쯤 미끄러졌다. 평소라면 조금 놀라고 조금 무안해 할 작은 사고였다. 그러나 살인도구를 맞댄 결투 중에는 끔찍한 사고가 되었다.

한껏 치켜든 칼은 엉뚱한 곳을 향하고, 아무 기대 없이 찌른 칼이 빈자리를 독점했다. 직관적으로 말해 ‘사생아’ 뮬러의 롱소드가 에르윈 경의 심장을 꿰뚫었다.

“결투의 결과는 옛 신만이 알기에 결투 재판이지만...”

에르윈 경의 승리를 미리 축하하기 위해 벌떡 일어난 기사도, 두 눈을 가리고 손가락 틈새로 훔쳐본 마을 아낙도, 청소 걱정이 더 큰 어린 집사도 모두 당황했다.

“옛 신이 사생아의 편을 들어주었다...?”

어떤 대결이든 실력이 좋다고 무조건 이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승률이고 확률이었다. 그래서 옛 신의 판결이었다.

“내가, 내가! 내가 이겼어! 내가 이겼다! 모, 모두 보았소? 옛 신께서 나의 손을 들어주었소!”

‘사생아’ 뮬러, 아니, 루이스 뮬러 경이 절명한 에르윈 경의 시체를 밀치고 소리쳤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이 온통 피투성이고, 얼굴까지 자상이 났지만 흥분해서 날뛰었다. 죽다 살아났을 뿐더러 승리의 영광까지 챙겼으니 그럴만했다. 반대로 레이디 뮬러는 조용했다. 베일에 가려 표정을 알 수 없으나 아마 웃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집사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이게 이렇게 되네요?”

“응... 세상일은 정말 알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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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윈 바그나 경의 죽음에 극소수 기사는 분개했으나 대다수 기사는 수긍했다. 옛 신이 개입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결과라 더욱 그러했다.

로벨은 재판 결과대로 루이스 뮬러를 서(Sir) 뮬러로 임명하고 서 막시밀리안 뮬러의 재산과 권리를 승계할 것을 승인했다.

메인 홀에 뿌려진 핏물 때문인지, 성 지하에 임시 안장된 동료 때문인지 승전축하연회는 찝찝하게 마무리되었다.

딸꾹질을 하면서도 끝까지 지켜본 악사들이 ‘기적의 뮬러 경’이란 별명을 지어 널리 퍼트렸고,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에르윈 경은 애도에서 조롱으로, 나아가 광대와 난쟁이의 희극 소재로 바뀌었다. 패자에게 가혹한 시대였다. 그리고 패배자는 한 명 더 있었다.

“이제 좀 지낼 만하시오?”

로벨과 어린 집사는 당초 계획대로 레이디 뮬러를 거두었다. 고향에 돌아가면 잘해야 유폐고 잘못하면 행방불명을 가장한 처형이니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공왕 폐하의 자비와 배려로 많이 좋아졌습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연회가 끝나고 사흘이 지나서야 베일을 벗은 레이디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기대한 게 없어 실망도 하지 않았지만, 아주 평범한 10대 후반 귀족 아가씨였다.

“루이스 경이 뮬러 가문의 주인이 되었다고 하나 레이디의 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오.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들을 낳아 복수할 권리 말씀이군요.”

아니, 정정하겠다. 머릿속은 평범하지 않았다. 선대 뮬러 경의 교육이 얼음이었는지, 일가족의 참변이 가시가 되었는지 말이 차갑고 뾰족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렇소.”

“그러면 왕께서 아들을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까?”

“푸훕-!”

아침 수프가 여기저기 뿜어졌다.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호른 경은 뜻밖의 정적에 당황하여 되물었다.

“공왕 폐하와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것이오.”

레이디 뮬러가 무표정하게 호른 경을 보았다. 아기의 탄생 비밀을 묻는 어린 조카를 보는 시선이었다.

“자식은 혼인하지 않아도 생깁니다. 젊고 건강한 남녀라면 어렵지 않지요.”

“축복받지 못한 아이라도 상관없다는 것이오?”

“저의 새로운 오라비를 보니 축복은 아무 의미가 없는 듯합니다. 왕의 핏줄이면 더욱 그렇겠지요.”

아무래도 원망이었다. 사생아를 기사로 임명한 원망이 분명했다. 로벨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결투 결과가 그런 것을 어쩌라고...’ 축복받든 저주받든 아이를 만들어 줄 재주가 없으니 오래 거론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혼처를 원하면 중매를 서 줄 수 있어요. 외가에 의탁하고 싶다면 호위를 붙여 보내드릴게요.”

레이디 뮬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대의 따뜻한 말이 나의 심장을 녹이는구나.”

어린 집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밀어(蜜語)도 아닌데, 주위의 여성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탓에 여성관이 이상하게 자리 잡았다.

“늑대성에 계속 머물고 싶으면 그래도 좋소.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적극 지원하겠소.”

로벨은 제안을 하면서도 적당한 혼처를 물색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고르크 슐츠 경이었다. 나이는 좀 있지만, 미혼이고 능력 좋고 마을과 광산을 다스리니 훌륭한 신랑감이었다. 루이스 뮬러 경이 무슨 짓을 해도 지켜줄 것이다. 레이디 뮬러는 그런 속마음을 읽은 듯 고개를 저었다.

“제 모습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연인들을 싸우게 하는 마법을 주문이 아니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아름다운 쉬르코 대신 마녀 키르케와 비슷한 꼬뜨를 입어 실제로 달라졌다. 그저 일상복을 입었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하긴, 왕이 식사에 초대했는데 편한 옷을 입을 리 없었다. -항상 편하게 다니는 마녀 키르케를 잠시 주목하자-

“레이디의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세간에서는 숙녀를 장난스럽게 지칭하는 말로 쓰이지만, 정식으로 ‘레이디’라 부릴 수 있는 신분은 고귀한 여인뿐이었다. 애초에 로드(Lord)와 동급인 호칭이었다.

“권리가 없는 고귀함은 그림으로 그려진 보석입니다. 화려하지만 아무 가치가 없지요.”

로벨은 즉시 이해했다. 로벨의 지난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자유민이 되면 여자도 재산을 가질 수 있다지요?”

크게 목청 높이지 않아도 강한 목소리가 있었다. 레이디 뮬러, 아니, 자유민 뮬러의 목소리가 그러했다. 로벨, 어린 집사, 호른 경, 펄프 대장이 서로를 보았다. 십수 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라 눈빛만으로 대화가 가능했다.

‘정말 멋진 레이디야.’

‘쫓아낼까요?’

‘당돌한 것이 큰 사고를 칠 겁니다.’

‘저 역시 돕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까지 함께한 세월이 참 무의미했다. 로벨이 대표로 말했다.

“헨리 피터 상회장을 소개해 주겠소. 레이디에게, 아니, 그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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