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42화 (542/605)

542화. 남일

옛 신의 기사단이 작별인사 없이 떠나고, 볼프 사트로 후작군도 붉은 산 경계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로벨과 로벨의 기사들은 떠나갈 때 모습으로 돌아왔다.

“저기 불났는데요?”

“응... 모닥불이야.”

지나는 마을마다 작은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행사였다. 성 조지아의 축일을 맞이해 건강하고 풍성한 한 해가 될 것을 기도하는 행사였다. 봄 작물이 싹 트는 시기이기도 했다.

“병사들의 사기는 어떻소?”

로벨은 지휘막사에서 멀찍이 떨어진 봉신들의 막사를 힐끔 보았다. 억지로 끌려온 시골 농민도 있지만, 직업 용병을 포함해 한몫 잡을 생각으로 자원한 자유민도 많았다. 후자의 경우 수익이 적다 싶으면 적아를 가리지 않고 약탈했다. 로벨이 왕이라 해도 봉신들의 군대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차선으로 아예 마을 근처를 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로벨과 로벨의 벗도 저 멀리 모닥불의 어스름만 구경하고 있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페닝보다 고향 생각이 간절한 자가 많더군요.”

“옛 신의 기사단이 사람 잡는 것을 보았으니까요. 모처럼 윤리의식이 마사지 되었겠죠.”

“어... 그건 고마워해야겠네.”

살인하지 말지어다. 도둑질하지 말지어다. 남의 것을 탐한 자는 영겁도록 지옥불에 튀겨질지니. 교회에서 맨날 가르치는 것인데 지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옥은 샘 포클 이전에 이미 정원초과하지 않았을까. 아, 그래서 면죄부를 판매하는 걸까. 그만 좀 오라고.

로벨이 모닥불을 보며 영양가 없는 생각을 골똘히 하자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이 힐끔거렸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응?”

“옛 신의 교단이 무엇을 꾸미든, 악마추종자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이 호른이 목숨 바쳐 공왕 폐하를 지켜드리겠습니다.”

뭔가 오해한 듯했다. 좋은 오해라 정정하지 않았다. 로벨은 근엄한 생각, 근엄한 생각,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땅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호른 경은 자나 깨나 백성을 걱정하는 왕의 품격에 감격했다. 어린 집사가 ‘그거 아닌 거 같은데...’ 중얼거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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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이 된 길에 수레바퀴가 빠지고, 이상한 것을 주워 먹은 병사들이 복통을 호소하고, 겨울잠에서 깬 곰이 얼빠진 얼굴로 기사와 용병 앞을 가로막아 서로 기겁했지만, 그것 외에 큰 말썽이 없었다. 고유명사가 된 ‘북쪽 숲’을 크게 돌아 마침내 로드릭 시티에, 늑대성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기까지요. 남은 길도 살펴 가시오.”

“길가의 돌이 마르고 꽃이 피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늑대성에 머무는 기사는 많지 않았다. 기사 본인이야 전우들과 어울리며 무용담을 자랑하고 금칠을 주고받고 싶지만, 기사를 따라온 수십에서 수백 명의 수행원은 그렇지 못했다.

어린아이 10명만 거두어도 하루에 나가는 지출이 어마무시한데,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픈 병사 수백 명과 병사의 몇 배를 먹어 치우는 가축을 놔두고 한가로이 승전파티를 할 수 없었다. 일단 고향에 가서 부대를 해산하고, 가족과 주민들을 안심시킨 다음 최소 인원으로 올라오는 게 맞았다. 저 남쪽의 구릉평야, 동부평야에 적을 둔 기사들은 최소 열흘을 더 가야 했다.

“집에 왔다!”

“뭐? 여기 우리 집인데?”

“어? 너도? 나도!”

그러거나 말거나, 로벨과 울프 용병단의 여정은 끝났다. 기나긴 원정의 끝은 달콤했다. 뒷말이 개운치 않지만, 정겨운 집 앞에서 인상을 찌푸릴 정도는 아니었다.

“인원 보고하고, 물자 정리하고, 전쟁 수당 받아 가라. 아, 개인적으로 추가된 수당은 오늘 지급 안 되니까 닷새 뒤에 어린 집사를 찾아가. 뭐? 임마. 페닝이 땅 파면 나오냐. 예산이란 게 있잖아. 어린 집사도 페닝 뽑아낼 곳을 찾아야지.”

가계부 개념조차 없는 하루살이 용병들이 불만을 가졌지만, 밀린 급료와 전쟁 수당만 해도 상당하여 오래 항의하지는 않았다. 성질이 더럽고 하는 짓이 얄밉지만, 약속을 어기지는 않는 어린 집사라 떼일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제대로 정리하고 가! 오늘만 살 거냐? 다음 전투에 써야 하니까 잘 말려! 냄비 차지 마! 여기 천막 지주 어디 갔어!”

로벨은 펄프 대장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아성으로 들어갔다. 컨틀렛을 벗고 진흙 묻은 사배튼을 그리브에 부딪쳐 털 때였다. 2층 계단과 주방 쪽문에서 털북숭이들이 달려왔다.

“컹! 컹!”

“크르릉-! 컹-!”

연로하신 분들이 나이를 잊고 몸을 던졌다. 로벨은 한 덩치 하는 두 마리 늑대에 휘청거렸다. 아니, 세 마리였다. 쓰러지지 않은 것은 두꺼운 허벅지와 마도의 능력 때문이다.

“키르케? 왜 그래? 뭔 일 있었어?”

“아니요? 애기들이 하니까 저도 하고 싶어서요.”

로벨은 목에 매달린 성숙한 마녀를 보며 난감해 했다. 풀 플레이트 아머 차림이라 살이 닿지는 않지만, 조금 남사스러웠다. 로벨은 조심스럽게 키르케의 팔을 풀어 바닥에 놓았다. 물고 빨고 핥아대는 늑대남매도 조금 떨어뜨렸다. 방법은 쉬웠다.

“저기 집사 있다! 어린 집사가 왔다!”

“컹컹! 컹!”

늑대남매는 즉시 표적을 바꿔 어린 집사에게 달려들었다. 개인짐을 한가득 들고 들어오던 어린 집사는 식충이들 기습에 발라당 자빠졌다.

“뭐야? 뭐야! 왜 그래? 미친 거야? 광견병이다!”

아무리 구박해도 가족인 걸까, 아니면 천성이 대인배, 아니 대랑배(?)인 걸까, 늑대 남매는 오랜만에 돌아온 어린 집사를 맹렬히 반겨주었다. 사슴가죽 신발과 소가죽 조끼를 벗겨 물고 도망가는 것이 참으로 훈훈했다.

“녀석들... 훗...”

“뭐가 훗... 이에요! 도둑이잖아! 도둑개 잡아라!”

어린 집사는 인정하지 않지만, 아야와 이야카는 귀여운 도둑이었다. 진짜 도둑 앞에서는 웃을 수 없었다. 로벨은 측근 중의 측근들만 대동하고 비고(秘庫)로 향했다. 지하 깊은 곳이 아니라 로벨의 집무실 두 번째 서랍이었다.

“...없어.”

로벨의 말에 여러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린 집사는 쌍심지를 켜고 누가 감히 어떻게 영주 집무실을 털 수 있냐고 화를 냈고, 호른 경은 성에 남아있던 페리 행정관, 리암 수사, 그람 형제 등등을 의심했다. 그러나 로벨은 시큰둥했다.

“마법이야. 예전에도 숨어 들어온 마법사가 있었어.”

최초의 드루이드이자 최후의 예언자라 자칭하는 둠 노릭스가 몰래 찾아온 적 있었다. 그보다 못할지라도 마법사의 왕이라 불리는 실력이면 가능할 것이다.

“그럼 위험하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주무실 때 몰래 잠입하면...”

“글쎄... 지금까지 그러지 않은 것 보면 하지 못하거나 할 생각이 없는 것 아니오?”

“앞으로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거처를 옮기고 경비병을 늘리시지요.”

로벨은 호른 경의 권유를 거절했다. 기사란 자가 적이 무서워 집을 비울 수 없었다. 그리고 마법사의 왕을 만났을 때 어렴풋이 자각한 것이 있었다. 인지의 힘으로는 로벨을 해칠 수 없었다. 뱀파이어 군주가 말한 동화 속 주인공 이론과 비슷할 것이다.

“그것보다 성배가 사라진 사실을 교단 본부에 알려야 하오. 더글라스 경이 이미 고했겠지만, 당사자가 확인을 해줘야지.”

“으... 늙은 사제들이 노발대발하겠죠?”

“그래도 다행이잖아. 사라진 게 가짜라서.”

순진한 마녀가 “진짜 성배를 딴 데 숨겼어요?” 물었지만, 정치와 외교로 타락한 호른 경과와 어린 집사는 겨울 뱀처럼 웃었다.

“그건 그렇죠. 지들이 화내면 어쩔 거야?”

“어차피 가짜라 책임을 물을 수 없겠지요.”

약속을 못 지킨 것은 미안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교회도 중요한 물건을 잃었으니 책임지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로벨은 서랍을 닫고 상큼하게 말했다.

“아쉬운 쪽이 도움을 청할 거야. 그때까지 밀린 일이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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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신의 교단과 악마추종자 외에도 할 일이 산더미였다.

봄 농사가 시작되어 작년에 휴경지였던 춘경지를 살펴야 했다. 잡초를 골라내고 부실한 싹을 솎아내고 고랑을 깊이 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새싹이 나기 시작한 목초지와 기지개를 켜는 벌통을 확인하고 운동부족으로 비실거리는 농마와 올해 새끼 친 양들을 돌보았다.

“그런 일은 리암 수사나 그람 형제한테 맡기시라고요!”

“그치만... 농장도 중요한걸...”

봄 농사가 중요하긴 한데, 왕이 발 벗고 나설 일은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전쟁 뒤처리 문제가 산더미였다.

“잉그비아 왕국 대사가 발정난 돼지처럼 쒹- 쒹- 거리며 왔다 갔어요. 포로 대우가 너무 열악하다고요.”

사실 포로 때문이 아니지만, 솔직담백한 로벨과 어린 집사는 음흉한 잉그비아 정치가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로벨은 흙 묻은 손을 구유통에 씻으며 말했다.

“하긴, 기사를 지하 감옥에 두면 좀 그렇지?”

“그럼 어디에 둬요? 여관? 지미가 싫어할 텐데요?”

늑대성은 그리 큰 성이 아니었다. 개인 서재와 침실을 다 합쳐도 방이 열 개가 되지 않았다. 기사 포로 22명을 재울 공간이 없었다. 로벨의 개인적인 비밀도 문제였다.

“숲지기의 오두막으로 보내자. 비좁긴 해도 지하감옥보단 나을 거야.”

“아, 맞다! 숲지기 오두막이 비었죠?”

도망갈까 봐 가둔 게 아니라 빈방이 없어서 가둔 것이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호송을 위해 불려온 외팔이가 도망가면 어떡하냐고 묻자 로벨과 어린 집사, 심지어 마녀 키르케까지 깔깔 웃었다.

“명예를 아는 기사가 비겁하게 도주할 리 없잖아.”

“무기와 갑옷을 빼앗고 땡전 한 푼 주지 않았는데 어딜 도망가요?”

“옆 동네도 아니고 잉그비아 왕국인데요. 배고파서 쓰러져요.”

재수 없으면 목이 잘리는 농민 포로와 달리 기사 포로는 안전하고 안락했다. 적국 기사가 아니면 아예 손님처럼 지내기도 했다. 귀족간의 원한은 깊지 않고, 깊어서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막말로 사돈의 팔촌까지 따지면 한 식구인데 막대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다.

“공왕 폐하의 기사들이 작정하고 찾아올 거예요. 춘궁기 핑계로 초대를 미뤘지만, 계속 모른 척할 순 없어요.”

국왕부터 농민까지 모두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명예지만, 그중에서도 광적으로 집착하는 집단이 기사였다. 전쟁에서 세운 전공을 치하하지 않으면 단단히 삐질 것이다.

“보리가 열릴 때쯤 초대하자. 수확 시기면 여유가 있으니까.”

“그때까지 금화를 마련해야겠군요. 으... 포로를 빨리 팔아치워야 하는데...”

페닝 장만하기가 빠듯한 것은 잉그비아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볼탄 반도보다 사정이 안 좋았다. 늑대성에는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지만, 북해 입구 랑트 항에 잉그비아 왕국 전함이 집결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끝난 제2차 북해전쟁에 당황했으나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제3차 북해전쟁이 예고되었다. 그러나 당장은 남일이었다.

“이안 선장의 함대도 수리해야 해요. 가마우지 호가 가라앉아서 손해가 막대하다고요. 가만, 이것도 잉그비아 왕국에 배상하라고 청구하죠.”

“가마우지 호보다 선장과 선원을 잃은 게 슬퍼. 전부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로벨이 죽은 사람을 떠올리며 침울해하자 페닝부터 생각한 어린 집사가 무안해 했다.

“전쟁이잖아요. 안 죽고 끝날 수 없어요. 오히려 이만해서 다행이죠.”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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