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41화 (541/605)

541화. 설마

이번 전쟁에 악마추종자가 개입한 것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한 직후에, 그것도 옛 신의 기사가 300명이나 모인 곳에서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한 가지 정정해주시오.”

로벨은 칼자루를 쥐고 마법사의 왕이라 자칭하는 사내를 보았다. 커다란 샤프론 아래 오밀조밀한 얼굴이 가지런히도 자리하고 있었다. 과거 네일 공국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가 바란 것은 공왕 폐하의 승리요. 정확히는 무적무패로 신격화되어가는 ‘로벨 로드릭 왕’의 승리지.”

“볼탄 반도 각지에 몬스터를 풀고, 1만 가까운 병력으로 쳐들어 왔으면서?”

“역경은 영웅의 역사이자 본질이오. 사실 닭이냐 달걀이냐 차이인데, 인과로 따지자면 필연이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로벨은 어젯밤 깨끗이 닦은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이렇게 바로 피를 볼 줄 알았으면 비싼 정향유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자, 잠깐! 할 말은 마저 하게 해주시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양손으로 잡고 검술학회의 교본 같은 수평베기를 실천했다. 그러나 상대는 오백 년간 존속되어온 사악한 마법사 집단의 수장이었다. 칼날이 닿기 전 안개처럼 흩어져 일곱 걸음 뒤에 나타났다. 익숙한 재주였다.

“뱀파이어?”

“뱀파이어의 마법을 잠깐 빌렸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 죽이려고 했잖아?”

마법을 본 주위 반응이 다채로웠다. 랭스터 경 이하 시시덕거리던 울프 용병단은 기겁해서 병장기를 꼬나들었고, 마법사 주변의 포로들은 포박을 잊은 듯 온몸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 재주도 여러 번 쓰지 못할 테지.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을까.”

반면에 마법, 신비, 괴물, 저주 따위에 익숙한 로벨은 성큼성큼 다가갔다. 마법사의 왕은 뒷걸음치며 빠르게 말했다.

“저, 저번에 만났을 때와 다르시군. 그때는 좀 더 이성적이지 않았소?”

“그때는 외국이었고, 협상자리였으니까.”

로벨의 예상대로 여러 번 변신하지 못했다. 혹은 그렇게 확신한 ‘로벨 로드릭’의 마법일지도 모른다. 신비란 본디 그렇게 믿는 자의 것이니까.

마법사의 왕은 끔찍하게 강해진 로벨의 힘에 당황했다. 마도(魔道)에 발을 담갔으니 범상치 않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것은 기존 수호자 이상이었다. 그나마 본인이 자각을 못해 다행이었다.

“성배! 성배가 아직도 있을 것 같소?”

겨우 로벨의 발을 잡았다. 이 자리에서 할 말이 아니었는데, 딱히 방법이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로벨이 칼을 내리자 크게 안도했다. 인지의 세계에서 벼려낸 칼은 현세의 칼보다 위협적이었다.

“진리를 깨우친 자 앞에 완벽한 비밀이란 없소. 세상 곳곳에 눈과 귀가 있으니 천 개의 벽을 세우고 천 길의 지하에 숨어도... 아, 잠깐이라니까! 그 망할 칼 좀 치우고! 지금 설명하는 중 아니오!”

“잉그비아 왕국인이란...”

로벨은 자꾸 딴소리하는 마법사의 왕이 못마땅해 칼자루를 올렸다 내렸다 반복했다. 그동안 희생된 볼탄 반도 사람들을 생각하면 당장 죽이는 것이 옳았다.

“옛 신의 성배는 우리 회원이 가져갔소. 지금쯤이면 잉그비아 왕국의 백색탑으로 옮겨졌겠지.”

“그 낡은 술잔이 뭐 그리 대단해서?”

“...성배니까?”

“그게 의미 있어? 세상 사람은 교황이 가진 것이 성배라고 믿는데?”

로벨의 지적이 마도의 핵심을 찔렀다. 진짜 성배를 보여줘도 믿지 않으면 평범한 골동품일 뿐이다.

“신비의 힘이 없어도 나름 쓸모가 있소. 그대도 요긴하게 써먹지 않았소?”

때맞춰 ‘요긴한’ 기사단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단재판이 본업인 자들답게 마법이란 단어에 예민했다. 마법사의 왕은 더욱 급해졌다.

“성배를 되찾고 싶으면 나를 보내주시오.”

“싫다면?”

“성배는 파괴될 것이오. 그러면 옛 신의 가증스러운 종놈들이 가만 있지 않겠지. 지금 결정하시오. 이 하찮은 학자의 목이오, 교회의 종잡을 수 없는 분노요?”

기사들이 가까워질수록 마법사의 말이 빨라졌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당겼다가 풀었다.

“다음에 보이면 죽일 거야.”

위대한 수호자의 허락이 떨어졌다. 마법사의 왕은 화색이 되어 자리에서 사라졌다. 로벨은 뒤늦게 ‘내 허락이 필요했나?’ 의심했지만, 들이닥친 더글라스 경 이하 기사단원 탓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법사! 조금 전의 마법사가 어디로 도망간 것이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사악한 마법사놈이...!”

기사단의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로벨은 사실을 말하면 화낼 것 같아 주저했다. 그래도 금방 들킬 일을 속일 수 없었다.

“저기, 더글라스 경? 본인 잘못이 아니니 진정하고 들어주겠소? 일단 칼을 넣으시고... 아, 본인도 넣을 것이오. 경이 넣으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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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생각대로 기사단은 매우 화를 냈다. 신실한 수도사들답게 사악한 마법사를 욕했지만, 일부는 로벨을 겨냥해 투덜거렸다.

“그러게, 그것을 왜 성에 두고 와서...”

로벨이 괜스레 미안해하자 호른 경이 대신 화를 냈다.

“상대는 마법사의 왕이라 불리는 자요. 어디에 놔둔들 안전할까.”

“진즉에 교회에 맡겼으면 되잖소?”

“그 ‘가짜’가 뭐 대단하다고 교회에 보낸단 말이오? 설마 가짜가 아닌 거요?”

거짓말이 크면 잡아먹힌다는 속담이 있었다. 옛 신의 기사단은 할 말이 없어 아랫입술을 뻐금거렸다. 속물적인 기사단원은 성배를 내주기 싫어 지어낸 이야기 아닌가 의심했는데, 로벨의 체면과 현장 목격자의 진술을 고려해 티 내지 않았다. 로벨이 말문을 열었다.

“그자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으니 내일 아침이 밝는 대로 늑대성으로 회군하겠소.”

“그 마법사의 말이 사실이면 어찌할 것이오?”

더글라스 경이 진중하게 물었다. 지금 가장 속이 쓰린 사람은 더글라스 경일 것이다. 로벨이야 어차피 교회에 기증할 물건이었으니 잃은 게 없었다.

“그것은... 음...”

옛 신의 기사들이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성배를 찾기 위해 차디찬 북해를 건너 잉그비아 섬으로 진격하기를 바라는 걸까. 그것은 성전(聖戰)이었다. 자고로 성전이라 불린 전쟁치고 결말이 좋은 전쟁은 없었다.

“포로교환 때 협상하겠소.”

“협상... 이오?”

“그거 말고 뾰족한 수가 없잖소? 아니면 교단 본부에 연락해서 재판을 거는 것이 어떻소?”

“......”

잉그비아 왕국군 7, 8천 명을 격파했지만, 북해를 장악한 왕립해군이 멀쩡하고 본토의 기사들이 멀쩡했다. 흑태자 때처럼 내부 지원이 있으면 모를까, 원정 전쟁은 불가능했다.

“그렇군. 왕의 입장을 잘 알겠소.”

더글라스 경이 이해해주었다. 그것이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경멸 어린 시선을 잠깐 보냈다.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이 욱해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두 사람이 한마음 한뜻이 된 게 참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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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은 예정보다 일찍 남쪽으로 회군했다.

승리의 기쁨이 방광을 통해 빠져나가고, 솟구친 혈압이 아침 공복 수준으로 낮아지자 머리가 차가워졌다. 기사를 포로로 잡고, 병장기를 다량 회수했지만, 소모된 시간과 물자를 생각하면 큰 적자였다. 기사들의 불만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어린 집사가 모처럼 기사들에게 동조했다.

“그야 그렇죠. 전쟁에서 이겼는데 밭뙈기 하나 못 받으면 기분이 좋겠어요?”

“어쩔 수 없잖아. 하사할 봉토가 없는데.”

“폐하가 물러서 그래요. 후작한테 땅을 뜯어내거나 페닝을 받아내야죠.”

“에이, 벼룩의 간을 구워 먹지.”

“저렇게 큰 벼룩이 어디 있어요? 어촌 몇 개쯤 뺏어도 벼룩 씨 안 죽어요.”

로벨과 어린 집사가 티격태격하자 벼룩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런 이야기는 당사자가 없을 때 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 아니오?”

볼프 후작의 수행기사가 크게 헛기침했다. 기사에게 큰 모욕이긴 한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구명 받은 처지라 화를 못 냈다. 로벨이 어린 집사의 등을 꼬집고 사과했다.

“후작을 모욕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소. 이야기하다 보니까 그만... 미안하오.”

“아니오. 은혜를 갚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니 할 말이 없소.”

어린 집사가 ‘못 갚는 게 아니라 안 갚는 거겠죠! 하고자 하면 뭘 못해요?’ 따지다 한 번 더 꼬집혔다.

“기사들의 불만은 늑대성에서 해결할 수 있소. 그 정도 여력은 있으니.”

어린 집사는 멍든 곳을 더듬느라 끼어들지 못했다. 로벨은 품위 없이 땅바닥을 구르는 소꿉친구를 못 본 척하고 계속 말했다.

“차후 협상으로 북해안의 섬을 돌려받을 것이오. 그러나 청옥성 함대가 큰 피해를 입어 치안이 우려되오.”

해전에서 침몰한 갤리선 7척 중 4척이 청옥성의 배였다. 기함 바다사자 호도 반파되어 도크에 올랐으니 잉그비아 해군은 고사하고 동네 해적을 막을 전함도 부족했다.

“연합함대를 계속 유지하자는 뜻이오?”

“최소한 올해까지는.”

제2, 제3의 강철갑옷 호를 완성하면 늑대성의 해군력으로 청옥성과 인어해를 지킬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는 검은 성의 항구와 함대와 꼭 필요했다. 볼프 후작과 기사들도 지성이 있고 양심이 있어 거절하지 않았다. 청옥성 함대 재건을 성의껏 돕겠다는 입 발린 약속도 했다.

전후 문제가 계속 나오지만, 승리한 가문들답게 분위기는 훈훈했다. 어린 집사의 계속되는 불손함을 위트로 여기는 것이 증거였다. 그러나 목적 달성에 실패한 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공왕 폐하! 공왕 폐하!”

왕과 후작이 모인 자리에 다소 무례한 방문객이 찾아왔다. 호른 경과 후작의 수행기사가 한 걸음 나서 제지했다. 거칠게 때려잡지는 않았다. 나름의 명성이 있는 몰트 도나반 남작이었다.

“옛 신의 기사단이! 옛 신의 기사단이 진영을 이탈했습니다!”

로벨은 조그맣게 한숨 쉬었다.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서쪽이오, 북쪽이오?”

“서, 서쪽입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북쪽이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소.”

“왜요? 서쪽에 뭐가 있는데요?”

어린 집사가 의문을 띄웠다. 영리한 집사인데 군사적인 부문은 관심이 없어 가끔 답답했다. 로벨은 볼프 후작 패거리를 힐끔 보고 그냥 비밀을 밝혔다.

“이 자리에 없는 우리 편이 하나 더 있잖아.”

“이 자리에 없는... 후작님하고 기사단을 빼면...”

호킨 페럿 경의 이름이 스쳐 지나가고, 이어서 에르나 왕국의 거대한 전함들이 머릿속을 메웠다.

“지금쯤 출정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거기에 기사단이 그럴듯한 명분을 던져주겠지.”

“으아아... 진짜 성전인가요?”

로벨은 턱을 괴고 마법사의 왕을 떠올렸다. ‘왜? 왜 성배를 훔쳐 적을 늘리는 걸까? 그것이 ‘로벨 로드릭’의 영성과 관계가 있나?’ 어린 집사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옛 신의 교단이 성전을 선포해서, 우리도 코 꿰여 가는 것은 아니겠죠?”

“에이, 설마. 유라피아 대륙에서 성전이라니. 성배가 아무리 귀하고 악마추종자가 아무리 괘씸해도...”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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