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화. 악연
하얀 숲의 신수(神樹) 파나케아의 힘으로 전장을 보았다.
옛 신의 기사단이 습격한 동쪽 진영은 방호용인지 방한용인지 구분이 안 되는 누비옷 차림의 자유민 부대였다. 숫자가 1천여 명이나 되지만, 무장이 부실하고 무리를 짓지 못해 작정하고 들이닥친 기사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무기조차 들지 못하고 쓰러지는 이들이 다수였다.
울프 용병단이 일제사격 후 들이닥친 서쪽 진영은 몸뚱이에 붙인 금속 비율이 꽤 되는 전문 용병들이었다. 용병대장을 따라 끼리끼리 모인 만큼 결속력도 강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전투에 선공(先攻)까지 빼앗겨 우왕좌왕했다. 일부 소대가 분전 중이지만, 당장은 전세를 뒤집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인즉 로벨과 볼탄 반도 기사들을 막을 병력이 없었다.
“히랴-! 히랴아앗-!”
“주군을 쫓아라!”
기사들을 막겠다고 나름 바리케이드와 말뚝 함정을 놓았는데 소용이 없었다. 무른 땅에 썩은 나무라 발목을 잡기는커녕 부러지고 뽑혀졌다. 그마저도 자재가 부족해 몇 개 되지 않았다. 극 일부 빼고는 저항 없이 방어진을 돌파했다.
“로, 로벨 로드릭이다! 로벨 로드릭 왕이 왔다!”
“우아아아악-! 무적무패 왕이 쳐들어왔다!”
하얀 투구와 하얀 말은 아무래도 눈에 많이 띄었다. 누가 소개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모셨다.
로벨은 랜스를 역수를 쥐고 어깨 위로 올렸다. 도보로 뿔뿔이 흩어지는 적을 치기에는 카우치드보다 오버 암이 어울렸다. 방패를 이불처럼 끌어 올린 병사를 처치하기에도 적당했다.
“꿰에엑-!”
유언이 비명이면 서글프다. 추한 비명이면 특히 그러하다.
로벨은 오른쪽 병사 어깨에서 창을 뽑아 왼쪽을 찔렀다. 짤막한 칼을 가진 병사가 일곱 걸음 앞에서 당했다. 리치가 깡패였다.
“음...?”
창날이 뼈 사이에 걸린 모양이다. 괴력으로 당겨도 뽑히지 않고 몸이 딸려왔다. 로벨은 절명한 병사의 시체를 좌우로 흔들다가 그냥 포기했다. 창을 버리고 시야를 최대로 넓혔다. 사방이 적이었다. 제대로 찾아왔다.
“말에서 내리시오! 전원 하마하시오!”
기사(騎射)의 장점인 속도를 잃었다. 전진도, 후진도 할 수 없으니 안장에 앉아서 이득 볼 것이 없었다. 로벨은 안장 뒤로 뛰어내려 모닝스타의 엉덩이를 때렸다. 안전한 곳으로 가라는 배려인데 무엇이 못마땅한지 큼직한 눈을 흘겼다.
로벨을 따라 볼탄 반도 기사들이 차례로 말에서 내렸다. 호른 경, 켈트 경, 랭스터 경, 바이란 경, 젊은 마튼 경, 메튜 경, 맥기 경, 페르젠 경, 오웬 경, 도너반 경 등등 하나 같이 이름 높은 기사들이었다.
고명한 기사들이 두 발로 서서 칼을 뽑자 그들을 따르는 ‘조금 덜 유명한’ 기사들도 허겁지겁 내렸다. 용병들처럼 연습한 것은 아니지만, 평생 보고 행한 것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 어깨를 맞대고 원형진을 구성했다.
“이런 싸움은 또 처음이군.”
기사의 역할은 보통 망치였다. 적의 진영을 쉴새 없이 두드려 부러뜨리고 흩어지게 한다. 그러나 오늘의 역할은 뜰채였다. 촘촘하게 뭉쳐서 적을 퍼 올리는 일을 맡았다.
“앞으로! 전진하시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양수로 잡았다. 숏 스피어를 꼬나들고 달려오는 잉그비아 왕국 기사-혹은 기사 종자-를 향해 비스듬히 뻗었다. 칼끝이 창날을 스치고 창대를 걷어 올렸다. 숏(Short)이라 부르지만 창 길이가 5~6피트였다. 한 번 틀어진 창끝을 회수하려면 몸 전체를 움직여야 했다. 포클랜드 공인 소드 마스터에게는 하품 나오는 긴 시간이었다.
“컥-!”
머리 위로 올라간 칼날을 그대로 두고 폼멜로 기사의 콧등을 뭉갰다. 말이 폼멜이지, 크기와 모양은 메이스였다. 코뼈와 함께 광대까지 함몰되었다. 눈알이 튀어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다.
로벨은 뒤로 쓰러지는 잉그비아 왕국 기사를 철제 신발로 지르밟고 세 걸음 전진했다. 로벨의 오른편을 지키는 호른 경과 왼편을 지키는 켈트 경이 조금씩 따라왔다. 칼과 칼이 부딪치고, 갑옷과 갑옷이 부딪치고, 피와 살점이 솟구쳤다.
“좋아. 성공이야.”
“하아. 하아. 무엇이 좋습니까?”
호른 경이 바이저를 올리며 물었다. 숨구멍으로 피가 스며들어 어쩔 수 없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 흐르는 핏물을 반대쪽으로 털어내고-켈트 경이 조그맣게 욕을 했다- 말했다.
“적이 도주하기 시작했소.”
1만 가까운 사람이 모였지만, 로벨이 보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신수의 힘만이 아니었다. 생일 파티보다 자주 치른 전쟁과 타고난 직감이었다.
“적의 우익이 무너졌소. 역시 옛 신의 기사들이오. 추격하지 않는 것이 아쉽지만, 저들로서는 피를 늘릴 이유가 없겠지.”
호른 경은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고 잉그비아 왕국군의 우익, 아군 기준으로 좌익을 보았다. 뒤엉킨 적병과 흩어진 말의 움직임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로벨은 발악하듯 덤비는 적을 발로 차 자빠트린 후 말했다.
“적의 좌익도 물러나고 있소. 감이 좋은 자가 있는 모양인데, 전선이탈이오.”
“그렇다면 잉그비아 왕국군은...”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역수로 쥐어 쓰러진 적병 가슴에 박아 넣었다. 이제 채를 떠올릴 때가 되었다.
“계속 밀어붙이시오. 승리가 바로 저 앞에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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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물 늪의 전투가 끝났다. 붉은 모래 요새 전투에 이어 로벨 로드릭 군의 승리였다.
적 지휘부는 난전 중에 북쪽으로 빠져나갔다. 늪에 빠져 익사한 기사와 전투마를 몇 구 찾았는데, 몰골을 보아 살아남은 자들도 멀쩡하지는 않을 듯했다. 에드워드 3세가 물려준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이만한 피해를 연거푸 입었으니 향후 10년 동안은 대륙을 밟지 못할 것이다.
승자는 승자 나름대로 정신없었다. 고결한 기사들은 전공을 부풀리느라 정신없고, 현실적인 용병들은 전리품을 수거하느라 정신없었다. 그 와중에도 시체를 모으고, 포로를 붙잡고, 도망간 전투마를 쫓으며, 버려진 병장기를 회수했다. 해가 지고, 뜨고, 깜박한 것처럼 다시 저물 때쯤 간신히 전장이 정리되었다.
“1,269명이 죽었습니다.”
산술에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일을 떠맡은 데이브 헤르만 백작이 피곤한 얼굴로 보고했다. 로벨은 멀건 수프를 놓고 물었다.
“구체적으로?”
“아군 전사자는 307명이고, 나머지는 잉그비아 왕국군입니다.”
어린 집사가 몸을 기울여 귓가에 속삭였다. ‘울프 용병단은 22명이요’ 뭉치지 못한 봉신들의 피해가 좀 더 컸다.
“그러니까 잉그비아 왕국쪽 피해가...”
어린 집사가 다시 속삭였다. ‘4배요. 4배.’ 로벨은 헛기침하고 말을 바꿨다.
“포로는 총 몇 명이오?”
“500명이 조금 안 됩니다.”
구체적이지 않은 이유는 부상자 때문이다. 한동안은 아침마다 숫자가 바뀔 것이다.
“그중에 기사는?”
“신원이 확인된 자는 22명이지만, 기사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더 있어 알 수 없습니다.”
기사 계급이지만 가난해서 장비가 부실한 자가 있고, 자유민 계급의 맨앳암즈지만 전리품으로 그럴싸한 장비를 갖춘 자가 있었다. 몸값을 낼 수 있으면 신분이 무슨 상관이냐 할 수 있으나, 고귀한 피의 가치관은 그게 아니었다.
“울프 용병단의 조지 솔트란 자를 데려가시오. 잉그비아 왕실 근위대 출신이니 그쪽 가문에 밝을 것이오.”
잉그비아 출신이라고 잉그비아 기사 가문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혈연관계와 주종관계를 따져 심문하면 가짜 기사는 쉽게 걸러낼 수 있었다. 원래 이 바닥이 두세 다리 건너면 다 연결되었다.
데이브 헤르만 백작이 목례 후 나가고, 더글라스 무리엘 경이 들어왔다. 로벨은 간신히 뜬 스푼을 도로 놓았다.
“식사 중에 미안하오. 공무로 찾아왔소.”
로벨은 사과를 받았다. 전투가 끝나고 이틀을 기다렸으니 많이 기다린 셈이다. 그러나 어린 집사 생각은 아니었다.
“그것은 늑대성에 있다니까요! 재촉한다고 뿅-! 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잖아요?!”
더글라스 경의 미간이 최대치로 좁아졌다. 옛 신의 기사 입장에서 그 귀한 것을 떼어놓고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암만 왕성이라지만, 주인 없는 곳에 도둑이 들면 어쩔 것인가.
“협상하려고 지어낸 말이 아니오? 진짜 비고(秘庫)가 있소?”
“그, 그럼요? 그깟 ‘가짜’가 뭐라고 거짓말 하겠어요?”
거짓말을 못하는 왕과 왕의 가솔이지만, 거짓과 진실이 섞여 있어 속내를 알기 힘들었다.
더글라스 경은 한발 물러났다. 300명의 기사단 형제가 있다 해도,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왕의 군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회군 일자를 알려주시오.”
“그건 군사기밀이고... 봉신들과 상의해야 해서...”
“대략적이라도 알려주시오. 아니면 우리가 먼저 늑대성으로 가도 되겠소?”
“주인 없는 집을 멋대로 찾아간다고요? 교단 본부에 항의할 거예요!”
영양가 없이 피곤한 입씨름 후 사흘 내 철수할 거란 확답을 주었다. 성배 회수가 지상과제인 기사단이니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만, 너무 피곤했다.
로벨은 차갑게 식은 고기 수프를 슬프게 바라보았다. 딱딱한 빵만 먹다가 모처럼 조리한 음식이었다. 어린 집사가 안절부절 못하며 물었다.
“다시 데어올까요?”
“아니야. 그냥 먹자.”
그냥 데여오는 게 나았을 것이다. 굳은 국물을 휘저어 한 숟가락 뜨니 바로 방해가 들어왔다.
“공왕 폐하, 서 랭스터입니다.”
역시 전쟁보다 전후처리가 힘들었다. 밥 한 끼 먹는 게 어려운 게 증거였다. 전쟁물자를 책임진 랭스터 경이라 쫓아낼 수도 없었다.
“...들어오시오.”
그래도 충직한 랭스터 경이라 앞서 온 기사들보단 경우가 있었다. 거의 그대로인 수프를 보고 흠칫한 후 송구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오. 아니오. 괜찮소. 다 먹었소.”
거짓말인 것을 알지만 사양하지 않았다. 가져온 물건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색 중에 좋은 물건을 찾았습니다. 누가 잉그비아 왕국인 아니랄까봐 귀한 포도주를 쟁여놨더군요.”
“아앗! 델 포니산 와인이군요? 키르케가 참 좋아하는 건데...”
로벨한테 바쳤는데 어린 집사가 좋아했다. 시선이 잠깐 모였다가 흩어졌다.
“적진에 이런 게 남아 있었소?”
로벨이 강철 단검을 꺼내며 물었다. 자칫 오해할 수 있으나 병마개를 뜯으려는 행동이었다. 랭스터 경이 어색하게 웃으며 해명했다.
“사실은 포로가 바친 물건입니다. 공왕 폐하의 아랫사람이 좋아할 거라더니, 뭘 알고 한 말인지 모르고 한 말인지 정확하군요.”
“헤? 키르케를 잘 아는 사람인가요? 하긴, 이런 고급 와인을 꼬불쳐 둘 정도면 지체 높은 기사겠죠.”
어린 집사가 어린 집사답지 않게 반응했다. 로벨은 칼질을 멈추고 랭스터 경을 쳐다보았다. 폭풍성의 주인은 콧등을 한번 긁적이고 말했다.
“기사 같지 않았습니다. 용병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름이 제퍼슨인가, 제니퍼인가, 공왕 폐하께서 기억하실 거라고...”
로벨이 벌떡 일어났다. 기억력이 나쁘지 않으니 당연히 기억했다. 실제로 만난 것은 한 번뿐이지만, 실로 질긴 악연이었다. 어린 집사가 당황해서 물었다.
“그게 누군데요?”
로벨은 단검을 빙그르르 돌려서 테이블에 꽂았다. 쾅! 랭스터 경이 움찔해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화난 로벨은 오랜만에 보았다.
“마법사의 왕. 악마추종자의 두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