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책임
잉그비아 왕국군은 북서쪽으로 후퇴하여 오물 늪이라 불리는 저지대에 자리했다.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괴멸하지는 않아 아직도 5천 명 이상의 기사와 병사가 남아있었다. 잉그비아 왕국 출신의 조지 솔트가 덤덤히 말했다.
“도망갈 곳 없는 자유민이니까.”
볼탄 반도 농민 출신 허풍쟁이가 의아하게 물었다.
“그 반대 아니오? 말 그대로 자유민이잖수?”
“고향에 물려줄 땅과 재산이 있다. 가진 게 제 몸뚱이뿐인 용병하고 다르지.”
로드릭 가문에 장기고용, 종신고용 된 울프 용병단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그러했다.
잉그비아 왕국군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볼탄 반도 연합군이 전진했다. 저들과 반대로 숫자가 크게 늘었다. 로벨 로드릭 군 3,000명에 옛 신의 기사단 300명, 볼프 사트로 후작군 1,200명이 가세해 총 4,500명이 되었다. 이 중 700여 명이 중무장 기사들이니 양측의 전력이 완전히 뒤집혔다. 그러나 아직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젊은 마튼 경이 중얼거렸다.
“이름만 들어도 냄새날 것 같은 지명이오.”
기사들이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가 ‘늪’이었다. 기사의 네 다리는 덩치에 비해 정강이가 약했다. 산이나 숲보다 진창에서 부상을 많이 입었다. 본인의 무거운 갑옷 탓도 일부 있었다.
“실제로 악취가 심한 곳이오. 아직 땅이 녹지 않아 덜하겠지만...”
“날씨가 풀리기 전에 진격합시다! 승리가 코앞 아닙니까!”
젊은 기사와 공훈이 급한 기사가 공격을 주장했다. 그러나 대다수 기사들은 미지근했다. 오래된 늪은 수렁이 깊고 기이한 열기-부패열이 있어 겨울에도 꽁꽁 얼지 않았다. 왕이기에 앞서 기사인 로벨도 내키지 않았다.
“이곳은 우리 땅이니 시간도 우리 편이오. 서두를 것 없소.”
로벨이 입술을 떼자 소속불문 자칭타칭 기사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세력, 명성, 작위, 실력 등등 모든 분야에서 맞수가 없으니 당연했다.
“볼프 사트로 후작, 적의 보급로를 끓을 수 있겠소?”
후작의 체면을 고려해 ‘질문’했지만, 보급로를 끊으라는 명령이었다. 볼프 후작이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북해안의 섬을 탈환하는 것은 어려우나, 오물늪으로 가는 길목은 차단할 수 있소.”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북군 지휘관 애꾸눈을 보았다.
“검은 성에서 올 때 대포를 가져왔지?”
“예. 구포 2문과 소형 팔코넷 12문입니다.”
“전부 전방에 배치하고 시간마다 순차 포격해.”
어린 집사가 움찔했다. 눈알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화약값을 계산하는 듯했다.
“이른 아침에는 쏘지 말고, 늦은 오후부터 자정까지만. 무슨 말인지 알지?”
애꾸눈이 안대를 만지며 웃었다.
“겁에 질려 밤새 떨게 하겠습니다.”
로벨은 페르젠 백작, 헤르만 백작, 기타 100인 이상의 부대를 이끄는 제후들을 차례로 보며 말했다.
“적이 기습하거나 도주할 가능성이 있으니 경들은 자리를 지키며 방어시설을 갖추시오. 앞서 말했듯 시간은 우리 편이오. 조급할 필요 없으니 천천히 적을 압박하시오.”
볼탄 반도 왕의 명령이 떨어졌다. 기사, 용병, 성직자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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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작전은 절반만 맞았다. 정확히는 3분지 2 정도 맞았다.
“하아...”
시간은 볼탄 반도 편이고, 포위와 압박이 승리의 열쇠란 것은 옳았다. 그러나 성질 급해서 뛰쳐나가는 것은 잉그비아 왕국의 기사가 아니라 볼탄 반도의 기사였다.
“이래서 기사들이란...”
“볼탄 반도 것들이란, 이 아니고요?”
좋은 일은 인종 따지고, 나쁜 일은 직업 따졌다. 훗날 큰 피를 부를 민족주의 자세였다. 아무튼 사고가 터졌다. 페르젠 가문 휘하의 기사들이 혈기를 참지 못하고 적진을 습격, 보기 좋게 두들겨 맞아 포로가 되었다. 어린 집사가 황당해서 따졌다.
“아무리 셈을 못 해도 그렇지. 꼴랑 스무 명이서 오천 명한테 덤빈 게 말이 돼요?”
“그러니까 기사라니까. 난 안 그러지만.”
“저도 안 그럽니다.”
“저도...”
“이하 동문이오.”
로벨, 호른 경, 켈트 경, 더글라스 경 등등이 선을 긋고 페르젠 ‘주니어’ 백작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서른 줄이 절반 넘은 백작 얼굴이 붉어졌다.
“보, 본인이 시킨 거 아니오! 본인도 몰랐소! 진짜요!”
“그것도 딱히 자랑할 일은 아닌데...”
휘하 기사를 통제하지 못한 책임이 있었다. 물론, 그리 따지면 페르젠 백작의 주인인 로벨 역시 책임이 있으니 깊이 거론하지 않았다.
“저쪽에서 요구가 있소?”
“포격을 멈추고 군사를 3마일 밖으로 물리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요구요. 거절하시오.”
“예. 저들도 기대하진 않았을 겁니다.”
기사 7명과 종자 12명. 무시 못 할 신분이지만 전쟁의 승리와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몸값으로 되찾는 게 좋겠지.”
“저들이 받을까요? 금화도 씹어 먹어야 할 상황일 텐데요?”
볼프 후작이 보급로를 끊은지 여드레가 지났다. 붉은 모래 요새에서 급하게 철수했으니 가져간 식량이 많지 않을 테고, 겨울이라 사냥도 시원찮을 테니, 지금쯤 군영의 식량이 바닥났을 것이다.
“그럼 역시 먹을 것을 요구하겠지.”
로벨 이하 제후들은 기사와 식량의 가치를 저울질했다. 그냥 식량값이 아니라 ‘전쟁이 길어지는 비용’이었다. 젊은 헤르만 백작이 운을 띄웠다.
“어젯밤에 비가 왔습니다.”
“본인도 보았소.”
옷섶을 겨우 적시는 이슬비였다. 전장에 큰 영향은 없었다. 그러나 ‘비’란 것이 중요했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열흘이 지나면 땅이 녹고, 다시 열흘이 지나면 싹이 나기 시작할 겁니다.”
“저 멍청이들이...”
페르젠 백작이 적진의 포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올해 봄농사를 망치면 그놈들 탓이다. 로벨이 장고 끝에 결정했다.
“식량을 주시오.”
“공왕 폐하?”
“어찌됐든 소집에 응한 기사들이오. 보리 몇 섬이 아까워 충직한 기사를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소.”
어린 집사가 장탄식했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세인들은 오해하기 쉬웠다.
“그럼 얼마나 내어 줍니까?”
“저들이 요구하는 만큼 주시오.”
“그것은 좀... 흥정이 수치스러운 일이라 하지만...”
로벨이 통 크게 허락하자 호른 경 이하 깨우친 기사들이 조심스럽게 주인을 만류했다. 그러나 황새의 뜻은 깊고 넓었다.
“그냥 주시오. 어차피 다 먹지 못할 테니까.”
“그게 무슨 뜻... 아?”
“포로를 돌려받은 직후 공격할 것이오. 병사들을 무장시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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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협상은 금방 성사되었다. 서로의 처지를 잘 아는 만큼 간 보고 맛보고 할 것 없었다. 귀리와 보리를 서른 수레 보내 무장해체된 기사와 기사 종자를 돌려받았다. 전후 몸값에 비하면 싸게 치렀지만, 전략적 손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적진을 살핀 것은 도움이 되오.”
5천이란 숫자를 세지 못하는 바보 멍청이지만, 한 번 지나간 길을 까먹을 만큼 생존 능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적 병영의 위치를 비교적 소상히 알아 왔다.
로벨은 옛 신의 기사단을 우익으로, 울프 용병단을 좌익을 삼아 제후들과 함께 본진에서 기다렸다. 신호는 따로 필요 없었다. 오랜만에 폭식하게 된 적이 알아서 신호를 줄 것이다.
“공왕 폐하, 연기입니다.”
앙상한 늪지 나무 위로 하얀 연기가 피어났다. 빵을 구울 시설과 연료가 없어 소부대 단위로 죽을 끓이는 듯했다. 적진의 위치를 자세히 알 수 있으니 좋았다.
“포로협상 당일에 공격할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요.”
“그렇게 말하니까 비겁하게 들리는데...”
로벨이 뾰족한 턱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제후 일동은 명예밖에 모르는 바보 주인이 공격을 취소할까 화급히 말을 돌렸다.
“더글라스 무리엘 경이 이동합니다.”
“전원 하마(下馬)했군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까까머리들이란...”
말을 타는 것은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고, 정체를 밝히는 것은 명예를 높이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말에서 내려 싸우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행동이다. 낙마가 패배를 뜻하는 마상시합의 영향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수행원을 거의 두지 않는 수도회 기사들은 도보전에 거리낌이 없었다. 애초에 진짜 기사가 아니라 신앙심 외에 기사도를 가지지도 않았다. 로벨이 옛 신의 기사단을 옹호했다.
“우리도 말에서 내려야 하오.”
“공왕 폐하?”
“그게 무슨!”
“푸릉?!”
기사들과 모닝스타가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기사 중의 기사가 한 말이라 더욱 충격이었다.
“적진까지는 돌격해도 좋소.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면 하마하시오. 진창에 빠져 낙마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오.”
로벨이 그렇다는데 로벨 이하의 기사들이 토를 달 수 없었다. 꼬우면 시합장에서 이겼어야 한다. 펄프 대장이 웃음을 삼키고 말했다.
“울프 용병단을 보낼까요?”
클레이모어, 롱소드, 하프 소드, 풋맨즈 플레일 등으로 무장한 기사단이 사슴뿔 같은 나무 사이로 스며들었다.
로벨은 신중하게 거리를 가늠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펄프 대장이 작은 깃을 꺼내 흔들자 북군의 애꾸눈과 남군의 발가락이 손짓발짓으로 휘하 부대를 움직였다. 이제 로벨의 역할은 끝났다. 병력 배치는 최고 지휘관이 하지만, 현장 지휘는 소대장의 일이었다.
로벨은 수많은 이단자를 척결한 더글라스 경과 십수 년간 동고동락한 울프 용병단을 믿었다.
“공격이 시작되면 즉시 적의 심장부를 칠 것이오. 긴장을 놓지 마시오.”
로벨이 라이트 랜스를 위로 올리며 말했다. 제반 조건이 마음에 안 들지만 공훈을 세울 전투였다. 기사들은 바이저를 닫고 병장기를 꺼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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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한 잔 느긋하게 비울 시간이 지나자 기다리던 비명이 울렸다. 최초의 비명이었다.
기사들의 호흡이 빨라졌다. 주인의 흥분이 전염된 듯 전투마도 발을 굴리며 콧김을 뿜었다. 마른 가지 저편에서 비명이 불길처럼 번져갔다.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최초의 공격은 애꾸눈의 기습 저격이었을 것이다. 표적이 지정되자 크로스보우 중대가 일제사격을 가하고, 쇳덩이를 두른 옛 신의 기사와 맨앳암즈가 돌격을 감행했을 것이다.
“모처럼의 식사가 엉망이 되었겠군.”
조단 랭스터 경이 사납게 웃었다. 휘하의 동부 평야 기사들이 따라 웃었다. 지금껏 후방에서 보급 임무만 맡아 전공에 목말랐다. 로벨은 숫자를 100까지 세아린 후 모닝스타 고삐를 살짝 당겼다.
“적진에 돌입하면 즉시 말에서 내려 뭉치시오. 주변 지형을 알 수 없으니 결코 흩어져서 안 되오.”
고집불통에 단순무식한 기사들이지만, 싸우는 법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전투에 돌입하면 본능적으로 로벨을 따를 것이다. 로벨이 바라는 것도 딱 그 정도였다. 파나케아 투구의 바이저를 닫고 라이트 랜스의 창대를 높이 들었다.
“볼탄 반도의 영광을 위해!”
“무적무패 왕을 위해!”
“공왕 폐하 만세! 볼탄 반도 만세!”
로벨이 박차고 나가자 호른 경을 비롯한 330기의 기사가 뒤를 따랐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본디 기사가 있어야 할 곳은 명예와 죽음이 맞닿은 경계선 어딘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