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화. 확답
로벨은 평야에 나온 전군을 전진시켰다. 기사와 농민을 제외한 용병들로 숫자가 1,500명이나 되었다.
잉그비아 왕국군은 크게 당황했다. 후방을 교란하는-온화한 표현이다- 기사들을 막아야 할지, 전방에서 밀려오는 용병들을 막아야 할지 선뜻 판단이 되지 않았다.
로벨의 말대로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수의 병력이라도 뒤를 내주는 순간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적무패 왕은 해냈다.
“예비대가 후퇴하면 저 3천 명은 고립되지.”
거리가 200야드로 좁아지자 잉그비아 왕국 사수들이 산발적으로 활을 쏘았다. 재수에 옴 붙은 용병 몇 명이 가슴, 허벅지, 기타 말 못할 부위를 움켜잡고 쓰러졌다. 그러나 빈 자리는 곧장 메워졌고, 피해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거리가 150야드로 줄어들자 울프 용병단의 사수들이 쇠뇌를 앞으로 기울였다. 이제 반격의 시간이었다. 수일 전부터 갈고 닦은 최고의 쿼럴을 몸체에 올렸다.
“발사!”
파파팡-! 파앙-!
활대가 펼쳐지며 살의가 쏘아졌다. 빚진 분노를 되돌려 받을 시간이었다. 잉그비아 왕국 사수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기계장치가 없는 용병들은 사격이 끝난 크로스보우맨 사이로 계속 걸어 나갔다. 자연스러운 선두 교체였다.
거리가 80야드로 접어들자 적이 덩어리에서 낱개로 보였다. 좋은 현상이었다. 어디를 찔러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창 앞으로!”
“창 세워!”
어깨에 기댄 창을 앞으로 기울였다. 크고 무겁다고 투덜거린 롱 스피어의 길이가 안정감을 주었다.
거리 40야드. 잉그비아 왕국군도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 뼘에서 두 뼘 길이의 창날이 아군을 겨냥했다. 저 앞으로 계속 걸어가는 것이 미친 짓 같았다. 아니, 미친 짓이다. 자살하고 무엇이 다른가. 북극섬 어디에서 무리지어 절벽을 뛰어내리는 짐승하고 똑같았다. 헌데, 전쟁은 본디 미쳐야 하는 것이다. 두 세력이 충돌했다.
“찔러!”
“죽여랏!”
옛날이야기처럼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지도, 사방팔방에 칼질하지도 않았다. 창을 들고 창을 든 상대에게 걸어가 찌르고 찔린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한 가지 묘사는 정확했다. 시체가 산이 되고 피가 강을 이루었다. 삽시간에 백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마구잡이로 찌르는 듯해도 강약이 있었다. 무장이 좋고 사기가 높은 쪽이 조금씩 밀어붙였다. 한 명 죽일 때 한 명 죽다가, 점차 둘, 셋씩 죽이며 전진했다. 그렇게 한계점을 넘는 순간 승패가 갈렸다. 잉그비아 왕국군의 진형이 와르르 무너졌다.
“자리를 지켜라! 도망가지 마라! 싸우란 말이다!”
곰 모양의 멋진 갑옷을 입은 잉그비아 왕국 기사가 소리쳤다. 로벨이 어린 집사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랜스.”
어린 집사는 한숨을 푸욱- 쉬고 해비 랜스를 가져왔다. 창 자루를 올리며 눈빛을 보냈다. ‘그냥 냅두면 안 돼요?’ 로벨은 바이저를 살짝 올렸다가 닫는 것으로 답했다. ‘응. 안 돼.’ 승기를 잡았을 때 쐐기를 박아야 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3배 많은 적이 어찌 반격할지 알 수 없었다.
로벨은 창 자루로 모닝스타 엉덩이를 때리고 옆구리에 걸었다. 기마 돌격할 거리가 아니지만, 평생을 단련한 승마술과 하프 유니콘의 네 다리를 믿었다. 그 믿음은 배신하지 않았다.
세 걸음에 최고속도를 내어 헝클어진 진영을 돌파했다. 아군은 짓밟지 않게 피했으나 바다 건너 병사까지 배려하진 않았다. 머리로 박아서 하나 치우고 무릎으로 차서 하나 자빠뜨리고 뒷발로 즈려밟으며 나아갔다. 숨 한번 크게 들이쉴 시간에 적장을 붙잡았다.
“이런 건방진...!”
적진 한가운데 뛰어들어 적장을 노리는 짓은 충분히 건방졌다. 전쟁 전에 펄프 대장이 말했듯 죽기 딱 좋은 짓이었다. 항상 '예외'가 붙는 무적무패가 아니면 말이다.
“...덤벼랏!”
기사 서임을 꽁으로 받은 게 아닌 듯 왼쪽 어깨의 두꺼운 론던쉬(Rondanche:어깨에 붙이는 방패)를 내밀고 오른손의 롱소드를 뒤로 당겼다. 마주 달려야 하는 주스트 경기가 아니니 제자리에서 공격을 흘려보낸 후 롱소드로 반격할 작정이었다. 썩 괜찮은 계획이었다. 과거 늑대의 왕과 비견되는 ‘로벨 로드릭’이 아니면 말이다.
창이 방패에 닿는 순간 흘리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무자비하게 폭발했다. 포플러나무로 만든 시합용 창도 이렇게 산산조각 나지는 않을 것이다. 오우거의 힘과 로벨의 창술이 합쳐진 완벽한 끊어치기였다. 랜스가 터지는 충격은 고스란히 갑옷 너머로 전해졌다. 잉그비아 왕국의 기사는 어깨가 끊어지는, 아니, 터져나가는 고통 속에서 비명과 함께 낙마했다. 반격은 너무 큰 꿈이었다.
“무적무패! 무적무패 왕이 잉그비아 왕국의 대장을 죽였다! 적의 대장이 죽었다!”
처음부터 쭉 지켜본 펄프 대장이 힘차게 소리쳤다. 체력은 줄었어도 목청은 여전했다. 기합과 비명과 욕설과 울음으로 소란스러운 전장을 단숨에 뒤덮었다. 잉그비아 왕국 출신 얼굴에 공포가, 볼탄 반도 출신 얼굴에 환희가 교차했다.
“무적무패! 무적무패! 무적무패!”
“남은 놈들을 모조리 쓸어라!”
지휘관의 부재는 통제의 상실이다. 통제의 반대말은 자유다. 지휘관이 없으니 도망쳐도 머리통이 쪼개질 일은 없었다.
“도, 도망가자!”
“이제 틀렸어! 다들 튀어!”
잉그비아 왕국군은 가진 무기를 버리고 몸을 돌렸다.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병사도 있었는데, 이제 없었다. 머리에 피가 쏠린 전투 현장에서 곧장 항복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펄프 대장의 경험담이 또다시 맞았다. 승패가 갈린 전장에서 칼솜씨는 의미 없었다. 뒤통수에 눈이 없고 어깨관절이 360도로 돌아가지 않는 탓에 대충 찔러도 픽픽- 쓰러졌다. 전사자의 7할이 패전 후 도주할 때 생긴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공왕 폐하!”
호른 경과 기마 용병이 쫓아와 로벨 주위를 에워쌌다. 진영이 무너져 ‘사냥’이 된 지금이 어떤 의미로 가장 위험했다. 혼란 탓에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호른 경은 주군이 무사한지 빠르게 스캔한 후 말했다.
“펄프 대장을 불러서 추격을 막겠습니다!”
로벨은 부러진 랜스를 앞뒤로 돌려본 후 바닥에 버렸다. 이제 바바 야가의 창이 필요 없게 느껴졌다.
“아니오. 그냥 두시오.”
“하오나 적은 아직...”
“적의 예비대는 이쪽을 신경 쓰지 못하오.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니 숫자를 줄여두는 편이 좋소.”
호른 경은 마른 침을 삼켰다. 평소에는 순하디순한 주군인데, 싸울 때는 거침없고 잔혹했다.
로벨과 호른 경이 몇 마디 하는 사이에 전선이 수백 야드 멀어졌다. 철제 군화가 짓밟고 지나간 자리에는 잉그비아 왕국군 시체와 망가진 병장기만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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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 못지 않게 옛 신의 기사단도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 최소 700명의 적을 사살하고, 그 이상의 부상자를 남겨주었다. 중무장한 기사 300명의 위용이었다. 전투마가 지쳐 헐떡이지 않았으면 5,000명의 적군을 모두 괴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긴 항해와 급속행군으로 지쳐 오래 싸우지 못한 것이 통한이었다.
“그것 보았소? 으하하핫! 어디서 지들만한 말을 타고 와서 쫓아오지도 못하더이다!”
“잉그비아 섬놈들이 원래 그렇잖소. 음험하고 음흉한데 실속은 없는 거.”
“교황 성하의 말씀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놈이오! 이번 기회에 제대로 혼을 내줘야지!”
승리의 기쁨과 흥분은 거룩한 기사단도 다르지 않은 듯 크게 웃고 떠들었다. 성직자라 술을 못 마시는 것이 다행이었다. 이 분위기에 술주정까지 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볼탄 반도의 기사들은 여전히 용맹하군요.”
옛 신의 기사단의 '임시' 단장이 찻잔을 들며 말했다. 저스티스 기사단, 성십자 기사단, 검은 형제 기사단 등등 여러 수도회의 기사단이 합쳐진 탓에 대표를 따로 선발했는데, 그가 바로 로벨이 잘 아는 더글라스 무리엘 경이었다. 로벨은 차를 마시는 시늉하고 말했다.
“경이 기사단장일 줄은 몰랐소.”
“저 역시 시골 남작이 볼탄 반도의 왕이 될 줄 몰랐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다는 뜻일까.
“그리고 '그것'을 찾아내실 줄은 더욱 몰랐지요.”
그냥 본론을 꺼내기 위한 빌드업이었다.
로벨은 쓰기만 한 동방차를 저리 치우고 자세를 잡았다. 몇 마디 안 나눴지만 많은 것이 오고 갔다. 로벨이 이해한 것이 많다는 뜻은 실제로 요구가 끝났다는 뜻이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야 하지 않소?”
이해가 짧은 탓일까, 아니면 무례한 탓일까. 질문이 다소 거칠었다. 세속 기사 수준에 익숙한 더글라스 경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연히 가짜입니다. 확인할 필요도 없지요.”
“...뭐라고 했소?”
로벨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이해가 짧은 쪽이었다. 더글라스 경은 원래 하면 안 되는-그러나 하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되는- 설명을 덧붙였다.
“진짜는 옛 신의 유일한 사도이신 교황 성하께서 간직하고 계시니, 공왕 폐하께서 발견하신 것은 분명 가짜입니다.”
“그럼 가짜를 얻으려고 이 먼 곳까지 온 것이오?”
더글라스 경이 한숨 쉬었다. 로벨도 아주 깡통은 아니라 뒤늦게 이해했다. 로벨이 찾은 것은 공식적으로 가짜여야 했다. 역대 교황들이 가짜 성배로 즉위하고 축사한 것이 알려지면 단순 웃음거리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저희가 이곳에 온 것은 잉그비아 국왕의 폭정에 신음하는 볼탄 반도 형제자매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더불어 사소한, 아주 사소한 계기로 성물이라 오해받는 유물을 회수하여 진의를 밝히고자 합니다.”
어린 집사가 팔짱을 끼었다. ‘그런 식으로 처리하시겠다?’ 무적무패 왕은 몰라도 늑대성의 귀재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성유물이 아니면 굳이 교회에 맡길 필요가 없네요?”
더글라스 경의 눈썹이 좁혀졌다. 세속의 신분을 벗은 옛 신의 기사지만, 기사 가문 출신도 아닌 자가 대화에 끼어드는 것은 불쾌했다. 그 의도가 훼방이면 더욱 그러했다.
“시동 교육을 다시 시켜야겠습니다. 주인과 손님 대화에 끼어들다니, 무척 무례하군요.”
어린 집사가 그냥 시동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모욕과 함께 대화에 끼지 못하게 차단했다. 로벨의 성품을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어린 집사는 시동이 아니오. 본인의 벗이자 늑대성의 조언자요. 무례한 발언을 삼가 주시오.”
기사의 정통성을 중시해온 로벨 왕이 기사 출신이 아닌 자를 이리 옹호할 줄 몰랐다. 어린 집사가 콧대로 치켜올리고 ‘히힛! 들었죠? 난 시동이 아니라구요!’ 표정을 지으니 짜증 나서 냉정해졌다.
“성물이 아니라 해도 성물로 오해 받은 물건이면 응당 교회에서 회수해야 합니다. 자칫 이단의 상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전에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다. 빈틈이 없었다. 그러나 떡을 줄지 말지는 떡장수 마음이었다.
“그런데 어쩌죠? 그 ‘가짜 성물’은 늑대성 지하 아주아주 깊은 곳에 있어서 당장 드릴 수가 없는데요?”
“사람을 보내 가져오게 하면...”
“그곳은 로드릭 왕가의 비고(秘庫)라 공왕 폐하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요.”
로벨이 ‘우리 성에 그런 곳이 있었어?’라고 묻기 전에 발등을 밟았다. 아슬아슬했다. 더글라스 경의 눈썹이 반대쪽으로 벌어졌다.
“그럼 어찌해야 줄 수 있소?”
“공왕 폐하가 돌아가야 줄 수 있죠. 그런데 뭐, 보시다시피, 지금 좀 바쁘네요. 잉그비아 국왕이 볼탄 반도의 형제자매를 괴롭히니까요.”
더글라스 경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단숨에 비웠다. 입천장이 걱정되어 살짝 놀랐는데, 날씨가 차서 이미 식어 있었다.
“형제자매의 고충을 모른 척 할 수 없지. 공왕 폐하께서 무사히 돌아가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확답을 받은 것에 만족했다. 사실 기사단도 그 정도 딜은 각오하고 왔기에 부담이 없었다.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이었다. 역시 정치와 모략은 교회가 몇 수 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