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37화 (537/605)

537화. 예견

옛 신이 안배한 세상 만물이 다 그렇듯, 장점이 있으면 반드시 단점도 있었다. 잉그비아 왕국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7, 8천 명의 대군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루에 소모하는 식량과 연료가 수레 20대 분량이었다.

보급의 기본은 현지조달인데, 로벨 로드릭 왕의 발 빠른 대응으로 약탈이 어려웠다. 그나마 북해연안에 보급기지를 여럿 세워 물자를 비축했기에 버틸 수 있었다. 로벨이 진지하게 경고했다.

“오늘이나 내일, 아니면 모레나 글피나 그글피에 움직일 거야.”

“그게 뭐예요. 그런 말은 저도 해요.”

“그러니까 정확히 언제란 겁니까요?”

어린 집사 이하 최측근들이 심드렁하게 타박했다.

“내가 적장이 아닌데 어떻게 정확히 알아. 아무튼 공격할 거라고.”

“그야 공격하겠죠. 전쟁하러 왔잖아요.”

“먹고, 자고, 싸다가 이윽고 죽겠지요, 수준인뎁쇼?”

추운 날씨에 대치가 길어진 탓인지 '무적무패' 신용이 떨어졌다. 그래도 로벨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고향 땅을 지키는 쪽이 이 정도면, 공격쪽은 더욱 초조할 것이다.

“우리 쪽으로 올 거야.”

“검은 성이 아니고요?”

“거긴 성벽이 높잖아. 대포도 많고.”

악마추종자의 관심사가 ‘로벨 로드릭’인 이유도 있지만, 거기까지 밝히지는 않았다. 펄프 대장과 조지 솔트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었다.

“그럼 어찌합니까? 방어시설을 좀 더 보강할까요?”

“땅이 얼어서 말뚝 박기도 쉽지 않습니다.”

로벨은 요새 성탑의 천장과 기울어진 벽을 한 번씩 보고 말했다.

“이곳에 농민병을 두고 기사들과 함께 성 아래에서 싸울 거야.”

“성 밖이요? 회전을 한다고요?”

“농민병을 제외하면 2,000명이 안 됩니다!”

농민들이 이래저래 부실해도, 적의 공격을 막는 방패 역할은 충분히 했다.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때려도 무기와 체력이 소모되는데, 꼬챙이로 저항하는 사람은 말할 것 없었다. 좌우익 어디에 두어도 시간벌이가 되었다. 그들을 쓰지 않는 것은 방패 없이 싸우러 가는 격이었다.

“난 지는 싸움을 하지 않아. 나 무적무패잖아.”

“에이, 실제로는 여러 번 졌잖아요. 나중에 만회하고 시치미 뗐을 뿐.”

“이번이 마지막에 지는 첫 싸움일지도 모릅니다요.”

역시 신뢰가 많이 떨어졌다. 로벨은 잠깐 반성의 시간을 가진 후 고용주의 위엄을 되찾았다.

“시끄러! 내가 대장이야! 나가서 전투 준비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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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전략, 전술안은 훌륭한 편이라 대체로 잘 맞았다. 이번 역시 그러했다.

로벨의 장담대로 잉그비아 왕국군이 이동을 시작했다. 한 번에 움직이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 세 갈래로 쪼개졌는데, 이동방향을 보아 로벨 로드릭 군이 있는 붉은 모래 요새가 목표였다.

로벨은 기사들과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붉은 산 아래로 나갔다. 산기슭과 강이 맞닿은 좁은 평야라 대군을 운용하기에 좋지 않았다. 억지로 밀어 넣으면 3천이고 4천이고 배치할 수 있지만, 팔다리 간격이 좁으면 병장기를 휘두르지 못하는 것처럼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군대도 싸우지 못했다. 소수 정예로 나온 것이 옳았다.

“그래도 병력이 많으면 좋지. 교대로 돌릴 수 있으니까.”

잉그비아 왕국이 그러했다. 생각보다 좁은 전장에 갈등하더니 3천 명을 선발해 3개 진으로 배치했다. 그래도 남은 예비대가 5천 명이라 부담이었다.

호른 경이 잘생긴 코를 찡그리고 로벨을 보았다. 소수 정예라 해도 보다 많은 적을 연달아 격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람의 몸은 기계가 아니라 이겨도 피로가 쌓이면 싸우지 못한다.

‘숫자로 하는 게 아니라 해도, 숫자가 적으면 불리한 것이 전쟁인데,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인지...’

그런 걱정을 하는 것만 해도 대단했다. 대다수 기사들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기름칠로 광을 낸 무구와 배불리 먹여 윤기 나는 전투마가 마냥 화려했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헬름 틈새로 나오는 하얀 김이 안개로 보일 정도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로벨 역시 비슷했다.

호른 경은 바이저를 내리고 뭇 기사들을 본받았다. 눈앞에 적에게 집중했다. 일단 이겨야 다음도 있었다.

적의 진영과 편제는 전형적인 잉그비아 왕국이었다. 우익에 기사를 두고, 좌익에 경무장 보병을 두고, 중앙에 장궁병을 앞세웠다. 주목(朱木)으로 만든 잉그비아 특산 롱보우를 신나게 쏜 후 기사들로 마무리하는 작전이었다.

로벨 로드릭 군의 진영 또한 볼탄 반도의 그것이었다. 기사를 창으로, 맨앳암즈를 방패로 삼아 견고하게 몸을 굳혔다. 정직하지 않지만 정답에 가까웠다. 잉그비아 롱보우가 아무리 강해도 300기가 넘는 기사를 모두 제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일단 부딪치면 승리한다는 작전이었다.

서로가 승리를 확신하며 군사를 움직였다. 먼저 잉그비아 장궁병이 보폭을 맞춰 앞으로 나왔다. 거리는 약 250야드. 호른 경 이하 기사들은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드로우(Draw)-”

잉그비아 왕국 지휘관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최소 3년, 최대 30년 동안 시위를 당겨온 요먼 장궁병이었다. 활솜씨를 의심할 필요 없었다.

“방패 위로!”

“실드-월-! 실드-월-!”

파비스를 설치한 울프 용병단은 사정이 좋았다. 중장비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프리랜서들은 조잡한 나무 방패를 머리에 이고 웅크렸다. 인생에서 신앙심이 가장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루즈(Loose)-”

현실적으로 소리가 들릴 리 없는데, 긴장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바람 가르는 소리가 생생했다.

용감한 용병과 곧 죽어도 호기심이 앞서는 용병은 방패 틈새로 하늘을 보았다. 새까만 그림자가 하늘을 물들이는 것이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것은 살의로 점철된 구름이었다. 죽음의 비가 쏟아졌다.

퍽! 퍼퍽-! 깡-! 끄아악-! 내 다리이잇-!

북풍에 실려 온 쇠촉이 방패를 쪼개고 사람을 물었다. 실제 피해는 크지 않지만 임팩트가 대단했다. 겁에 질린 말들이 발을 굴리며 울부짖었다. 숙련된 기사들은 고삐를 틀어쥐고 제재했지만, 가끔 미숙한 자가 있어 기마대열을 헝클었다. 그래도 낙마하는 기사와 기사 종자는 없었다. 돌격하기도 전에 말에서 떨어지면 일평생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기사 앞으로.”

로벨이 아론다이트를 뽑아 전방을 가리켰다. 시리도록 하얀 칼날은 멀리서도 잘 보였다. 호수성의 백작 데이드 헤르만 경이 애마의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다그닥- 다그닥- 다닥- 다그닥- 돌격 거리가 아니라 서두를 필요 없었다. 창을 높이 세우고 조금씩 쐐기모양을 갖추었다.

그 사이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숙련된 장궁병이라 발사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기사들은 방패와 뱀브레이스로 머리를 보호했다. 겁을 상실한 일부 기사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그냥 걸어갔다. 가문의 재산 1호 풀 플레이트 아머를 굳게 믿었다. 그 믿음은 아주 잘못되지 않았다. 가난한 프리랜서를 울부짖게 한 롱보우지만, 열처리된 명품 갑옷을 상하게 하진 못했다. 어깨와 가슴에 맞아도 그냥 튕겨 나갔다. 머리에 스쳐도 충격에 움찔 한번 할 뿐이었다. 정말 재수 없이 말머리와 목에 화살이 꽂힌 기사만 통제를 잃고 낙마했다.

세 번째 화살은 없었다. 성격만큼 날카로운 헤르만 경이 창을 앞으로 기울였다.

“Charge!”

기병은 거리를 확보했을 때 최대 위력을 발휘한다. 잉그비아 왕국 좌익까지 약 120야드. 돌격하기 딱 좋은 거리였다.

“호수성의 젊은 백작이 제법이군요. 옛날 헤르만 같지가 않습니다.”

호른 경이 솔직하게 칭찬했다. 그러나 좌익 수비를 맡은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은 동의하지 않았다. 기사들을 이끌고 앞장서 돌격하는 영광을 빼앗겨 꽁했다.

“저것도 못하면 사람인가. 내 막내아들도 저 정도는 한다.”

“적의 우익이 이동합니다!”

잉그비아 왕국의 기사대가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페르젠 백작은 로벨이 있는 중앙을 한번 보고 휘하 용병들을 닦달했다.

“창병 앞으로! 자리 지켜라! 첫 돌격을 막으면 수당을 두 배로 준다! 기사의 헬름을 벗기면 세 배를 주겠다!”

역시 부자 백작이라 화끈했다. 어린 집사는 300명이 넘는 파도성 용병의 세 배 수당을 계산하고 어질했다.

‘무기 팔아서 페닝 좀 만졌다더니...’

아무튼 좋은 일이었다. 단기계약으로 긁어모은 프리랜서가 사기백배하여 무기를 꼬나들었다. 그러나 파도성 용병이 목돈을 만지는 일은 없었다.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은 말머리를 돌려 아군의 우익, 그러니까 헤르만 백작과 볼탄 반도 기사들의 뒤를 노렸다.

“뭐, 저런...!”

기사들을 백업하지 않은 로벨의 잘못이다. 기사를 돌격시킨 후 중앙군을 전진해 거리를 좁혀야 했다. 호른 경이 다급히 소리쳤다.

“공왕 폐하!”

지금이라도 가야 했다. 기사들이 고립되게 둘 수 없었다. 허나 롱보우의 소나기를 뚫고 접근하려면... 계산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최악의 경우 아군이 각개격파 되고, 최선의 경우도 두 번 싸우지 못할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적의 예비대가 5천 명인 시점에서 사실상 패배였다.

“걱정 마시오. 헤르만 백작은 잘 해낼 것이오.”

“저 상황에서 무엇을 해낸단 말씀입니까!”

항상 점잖은-척하는-호른 경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큼 상황이 안 좋았다. 하지만 로벨은 해명하지 않았다. 헤르만 백작이 경보병 위주의 적 좌익을 짓밟은 후 그대로 전장을 돌파했기 때문이다. 이제 잉그비아 왕국 지휘부가 ‘뭐, 저런...!’ 을 외칠 차례였다. 이쪽에서는 호른 경이 한 번 더 외쳤다.

“미친 건가? 어디까지 가는 것이야!”

적 후방에는 5천 명의 예비대가 있었다. 이대로 기습 공격하면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지만, 헤르만 백작과 기사들은 다시 복귀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위험을 감수해도 지원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로벨이 허리를 쭉 펴고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적이 이쪽으로 올 것을 아는데, 본인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을 것 같소?”

주위에 병사들 모두 들으란 외침이었다. 혼란이 조금 가라앉았다. 호른 경이 동의하지 못하고 기어이 되물었다.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아앗! 검은 성! 볼프 사트로 후작군을 부른 건가요?”

어린 집사가 기쁘게 추측했다. 그러자 호른 경이 평소 쌓인 감정으로 지적했다.

“검은 성의 군대가 움직이면 잉그비아 왕국군이 모를 리 없다! 천 명도 안 될 후작군을 격파한 후 그대로 사트로 시티를 점령했을 테니!”

눈뜬장님만 있는 게 아닌 이상 첩보 활동을 할 테니 당연했다. 로벨이 의도한 상호지원도 전투가 교착된 다음에 하는 것이지 사전에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로벨이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입술을 뗄 때 허풍쟁이가 소리쳤다.

“적 후방에 군대입니다! 깃발! 깃발을 보십시오!”

거리가 1마일쯤 되는데 눈도 좋았다. 새로 나타난 군대가 소란스러운 탓도 있었다. 호른 경이 눈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전원 기병인가? 뭐 저리 많지?”

최소 300기 이상의 기병대인데,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이 안 되었다. 만약 적이라면 헤르만 백작은, 아니, 로벨 로드릭 군은 희망이 없었다. 로벨이 파나케아 투구의 바이저를 올리고 말했다.

“옛 신의 기사단이야.”

“으악-! 적이잖아요!”

어린 집사가 비명을 질렀다. 교단이 기어이 뒤통수를 치러 온 것이다. 아니, 앞에서 나타났으니까 앞통수인가? 로벨이 답을 주었다.

“뒤통수 맞아. 우리가 맞는 게 아니니까.”

옛 신의 기사단이 창을 세우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거리가 멀어서 검은 점과 흙먼지가 대부분이지만, 상상의 나래를 더해 보면 장엄하고 장대한 연출이었다. 300기의 볼탄 반도 기사와 300기의 옛 신의 기사가 양쪽에서 기마돌격을 강행한 것이다.

“옛 신의 기사단이 왜 우리를... 그것보다 어떻게 이 타이밍에...”

로벨은 바이저를 닫고 얼빠진 부하들을 두드렸다. 적이 당황했을 때 총공격을 가해야 했다.

이 상황을 예견한 것은 로벨과 리암 수사, 그리고 강철갑옷 호의 신입 선장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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