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화. 체스
로벨 로드릭 왕의 이름으로 소집령이 내려졌다. 자화자찬 같지만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너무 일찍 소환하면 군비부담이 늘어나고, 너무 늦게 소환하면 제때 오지 못하는 기사가 있을뿐더러 작전을 짤 시간이 부족했다.
새해를 하루 앞두고 37개 성의 기사가 모였다. 늑대성까지 깃발을 가진 기사(Knight banneret)만 221명이었으니, 그 휘하의 기사와 용병 숫자가 3,000명에 이르렀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 시절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였다.
“암만 겨울이라 한가하다지만, 닥치는 대로 모아온 모양이에요.”
“북해에서 진 탓도 있을 걸?”
자기 땅의 불로소득 외에는 관심이 없는 기사들이지만, 가끔, 아주 가끔 단합할 때가 있었다. 바로 외부의 적이 등장했을 때였다. 미우나 고우나 서약으로 맺어진 한 패거리라 자기들끼리 싸울 때는 비웃고 조롱해도 밖에서 두들겨 맞았을 때는 분노했다. 물론, 패거리 내에서 명예를 높일 기회이기도 했다.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잉그비아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선발대로 출발한 북군 지휘관 애꾸눈의 첩보에 의하면 현재 북해안에 상륙한 군사만 7천 명이었다. 제해권을 가졌으니 계속해 추가 병력을 보낼 수 있었다. 에드워드 3세 시절 군사력으로 추측건대 전체 병력은 볼탄 반도 연합군의 2배가 넘을 것이다.
“포클랜드와 검은 숲에 지원을 요청할까요?”
“볼프 후작이 이미 했을 거야. 아무 소용없었겠지만...”
볼프 사트로 후작은 포비아 왕가의 버려진 봉신이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자업자득이라 국왕을 욕할 수 없었다. 제멋대로(?) 독립한 로벨도 비슷했다.
“도움은 고사하고, 뒤통수 치지 않으면 다행이야. 우리랑 잉그비아 왕국이 싸우다 지치기를 바라고 있을 테니까.”
“어부지리란 거구요.”
“어부? 어부가 왜 나와?”
“잉그비아 왕국은 어부의 나라잖아요.”
어린 집사의 말은 종종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는 게 많아서 그런 모양이다.
로벨은 지난 가을에 수확하고 휴경지가 된 공터를 보았다. 울프 용병단 남군(南軍) 355명을 포함, 총 3,377명이 모인 군영이었다. 로드릭 시티 전체 주민의 절반이었다.
“오래 주둔시킬 수 없지.”
“오! 모처럼 옳은 소리예요.”
로벨은 새해 첫날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고기를 잡고 술독을 뜯으며 즐거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반평생 칼밥을 먹은 기사들도 대충 직감했다. 로벨은 커다란 육각막사에 빼곡히 들어찬 기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북쪽 바다의 꼬마들이 예의 바른 교훈을 잊고 다시 우리 땅을 침범했소.”
로벨의 농담에 웃음이 살짝 비쳤다. 그러나 진지한 표정이라 오래 웃지 않았다. 내심 크게 웃기를 바란 로벨은 머쓱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 알아들을 때까지 혼낼 수밖에 없소.”
“그렇습니다! 혼쭐을 내야지요!”
“잉그비아 놈들은 당나귀 같은 놈들이라 때려야 말을 듣습니다!”
역시 기사들이었다. 해전에서 패한 것과 숫자에서 밀리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껏 져 본 적이 없는 탓도 있었다. 로벨은 미리 세운 작전을 하달했다.
“호수성의 헤르만 백작을 우군 지휘관으로, 파도성의 페르젠 ‘주니어’ 백작을 좌군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조단 랭스터 남작에게 후방 보급을 맡기겠소. 첫 번째 집결지는 붉은 산 북쪽 붉은 모래 요새요. 만약 제때 도착하지 못하면 자의로 판단하여 검은 성이나 하인즈 성으로 이동하시오.”
로벨의 명령에 열정 넘치는 기사와 조심성 많은 봉신이 질문했다. 상식선에서 해결 가능한 질문이었다.
“현지조달은 어렵소. 가도를 따라 이동하며 상인의 도움을 받으시오. 불가피할 경우만 징발을 허락하오.”
“아니오. 바다를 건너온 만큼 기사의 숫자는 많지 않을 것이오. 배후를 걱정할 정도가 아니면 자리를 지키시오.”
무패의 경험에서 나온 조언에 대부분 만족했다. 로벨은 마지막으로 ‘주니어’ 백작을 보았다. 저 바보가 입을 다물면 더 이상 나올 질문이 없다는 뜻이다.
“이제 전쟁이 시작되었소. 모두 출발하시오. 무운을 빌겠소.”
볼탄 반도의 명예로운 기사들은 흉갑을 두드린 후 지휘막사를 나갔다. 로벨도 휘하 병력-울프 용병단을 지휘하기 위해 펄프 대장과 발가락 슈미츠를 불렀다. 그믐까지 바쁜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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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지만 게으른 봄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별자리에 관심이 많아 발밑에 돌부리를 피하지 못하는 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양지의 눈조차 녹지 않은 겨울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 행군하기 좋은 계절은?”
“차라리 처맞기 좋은 계절을 물어라!”
무거운 병장기를 쥐고, 고집 센 짐말을 끌며, 굽이진 길을 타인의 속도로 걷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봄에는 진창 때문에, 여름에는 더위 때문에, 가을은 추수 걱정 때문에, 겨울은 추위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번 행군도 예외는 아니라 다들 죽상이었다. 어쩌다 여유가 생겨도 위장을 채우고 젖은 신발을 말리기 바빴다. 그래서 내일을 내다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검은 성의 병력은 2천이 채 안 됩니다. 해상전력이 사라져 도시를 지킬 수비 병력을 늘려야 하니 절반이나 지원할 수 있을지...”
로벨의 간이 막사에 ‘내일을 걱정하는 모임’이 모였다. 평소에도 자주 모이는 늑대성 식구들이었다.
“하! 누가 보면 우리 전쟁을 지들이 돕는 줄 알겠네요. 우리가 지원군이거든요? 그것도 유일한 지원군이요!”
어린 집사가 가죽신을 거꾸로 들고 화를 냈다. 눈에 젖은 신발을 신으면 무좀, 습진뿐만 아니라 동상 위험이 있었다. 로벨 역시 사배튼 안의 가죽 신발을 뒤집은 채 말했다.
“입술이 없으면 잇몸이 못생겼다? 뭐, 그런 속담이 있잖아. 후작이 버틸 때 싸워야지. 그리고 우리가 유일한 지원군은 아닐 거야.”
“우리 말고 누가 있습니까? 아, 호킨 페럿 경이요? 에르나 왕국 해군이 움직이겠죠?”
펄프 대장이 피식- 웃었다.
“그쪽도 기회만 보고 있을 거요. 북해안에 상륙한 잉그비아 왕국군이 그대로 회군하면 아무 소득이 없으니까. 우리가 먼저 싸워서 숫자를 줄여놔야 움직일 거요.”
“으으으...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승냥이 같아서...”
입장이 바뀌면 앞장서서 승냥이 짓을 할 어린 집사이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지 마. 의외로 정직한 사람도 있을 거야.”
“그런 사람은 진작에 죽었습니다요. 공왕 폐하만 빼고 말이죠.”
허풍쟁이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당번병 비슷하게 불러놨더니 아예 자리 잡고 앉아 회의에 동참했다. 짬(?)으로 따지면 펄프 대장과 외팔이 다음이니 뭐라 하기가 그랬다. 반면, 짬은 안 되지만 정식으로 초대된 사람도 있었다.
“잉그비아 왕국의 주력군은 자유민 용병입니다. 직업적인 용병이 아니지만 강제로 징집된 농노도 아닌, 그러니까 페닝을 받고 복무하는 자유민 농부입니다. 겔몬족 정서로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우리가 바보인 줄 아나. 걔네하고 싸운 게 몇 번인데. 대충 알아.”
외팔이 더치가 화를 냈다. 공인된 바보라 설득력이 다소 떨어졌다. 로벨이 공신력을 위해 한마디 보탰다.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싸울 때 봤어. 울프 용병단만큼은 아니지만, 잘 싸우더라.”
잉그비아 왕국 요먼 출신인 조지 솔트가 뿌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직업 용병은 아니지만 페닝을 벌려고 싸우는 것은 같습니다. 농사일을 두고 왔기 때문에, 그러니까 단기간에 한몫 잡으려는 욕심이 강합니다.”
잉그비아 왕국 출신답게 에둘러 말했지만, 볼탄 반도 기사에게 통하지 않았다.
“약탈을 할 거라고?”
“...아주 적극적으로 할 겁니다.”
1차 북해전쟁 때도 열심히 약탈한 잉그비아 왕국이었다. 그때보다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물론, 궁금증 해소를 위해 가만히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서둘러야겠네.”
욕심이 많아도 무적무패 왕과 대치하면 한가로이 약탈을 못할 것이다. 로벨은 행군 속도를 높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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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모래 요새는 붉은 산 북쪽의 오래된 거점 요새였다.
약 250년 전, 국경 개념이 희박하고 볼탄 반도의 정세가 복잡한 시절, 북방 야만인이 수시로 약탈을 일삼아 12기사 사트로 경의 첫째 아들이 직접 나서 요새를 세웠다.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적으로 시간 낭비 재원 낭비였다.
요새 건설 직후 잉그비아 왕국의 넥스 네일 공작이 북방 야만인을 토벌하고 네일 공국이 세웠고, 볼탄 반도의 골칫거리는 저절로 해결되었다. 자잘한 약탈은 지금도 계속되지만, 붉은 산까지 내려오는 대규모 침략은 이후로 한 번도 없었다.
“200년 동안 버려진 요새라니...”
쓸 일이 없는 요새라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 성벽은 멀쩡한 곳보다 주저앉은 곳이 많고, 성탑은 화살은 고사하고 비바람조차 막기 힘들었다.
“농사짓기 좋은 곳도 아니고, 교통이 좋은 곳도 아니고, 왜 이런 곳에 요새를 지었을까요?”
“글쎄... 옛날 사람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
그래도 덕분에 집결지가 생겼다. 허물어진 성벽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로벨은 급한 대로 보수공사를 하며 가져온 물자를 비축했다. 적이 장기전을 계획한 만큼 로벨도 장기전에 대비해야 했다. 이 버려진 요새는 좋은 보급기지가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길치 아닌 기사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요새 안에 전부 주둔할 수 없어 성 밖 야지에 군영을 세웠다. 3천이 넘는 군대라 규모가 대단했다.
“이쯤 됐으면 잉그비아 왕국군 진영에도 소식이 전해졌겠지?”
로벨이 빠듯하게 늘어선 깃발을 보며 중얼거렸다. 겨울이라 멀리까지 잘 보였다. 호른 경이 망토자락을 여미며 물었다.
“정찰병을 보낼까요?”
“주변 영주들에게 먼저 보내시오. 그치들이 아는 게 더 많을 것이오.”
물론, 가장 먼저 사람을 보낼 곳은 검은 성이었다. 이곳에서 약 30마일 거리였으니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웠다. 그 애매한 거리가 로벨의 첫 번째 무기였다. 어린 집사가 오들오들 떨며 물었다.
“그게 왜 무기에요? 안 그래도 쪽수가 딸리는데, 후작군이랑 합치는 게 좋지 않아요?”
로벨은 시 서펜트 망토를 벗어 어린 집사 머리에 씌워주었다.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야. 병사가 아무리 많아도 포위되면 꼼짝 못하거든.”
“이게 포위인가요?”
“시야를 넓혀봐.”
검은 성과 붉은 모래 요새. 어느 쪽을 공격하든 후방을 내어주게 된다. 병력을 나눠서 동시에 공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면 압도적인 병력의 이점이 사라진다. 어린 집사 생각에 산술적이지 않은데, 1백 대 1천이 1천 대 1만보다 상대하기 쉬웠다.
“잉그비아 왕국군의 발을 잡아두면 일단 성공이야.”
“그거뿐인가요? 그냥 발만 잡아두는 거예요?”
로벨은 알듯 말듯 한 미소를 보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전쟁은 체스와 같아서 적이 움직이기 전에 전술을 세울 수 없었다. 게임 참가자가 상호작용하니 미래를 알아도 결과는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로벨은 자신 있었다. 아직 쓰지 않은 무기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