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35화 (535/605)

535화. 대패

전함 건조는 늑대성의 군사기밀이었다. 하여, 가림막과 마찬가지로 보안상의 무장병력이 주둔했다. 그러나 가림막처럼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로벨이 10야드 앞에 이를 때까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모닝스타가 답답해서 앞발을 구르고 포효하니 그제야 하나둘 머리를 내밀었다.

“어엇? 공왕 폐하다!”

“우리 고용주 폐하?”

바닷바람을 피해 숨은 용병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20명으로 3교대 하게 했으니 최소 6명이어야 하는데 어째 5명뿐이었다.

“너희들... 진짜...”

로벨은 어떻게 혼낼까 고심했다. 그러나 자기소개만큼 혼내는 일도 하지 않아 감이 잡히지 않았다.

‘펄프 대장한테 이르자.’

원래 최고 지휘관은 말단 병사를 갈구지 않는 법이다. 허허 웃어넘긴 후 대대장 쪼인트(?)를 깔 뿐.

“호른 경 어디 있어?”

“영주 나으리 말입니까요? 저쪽으로 들어갔는데, 아직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때 요정 소피가 날아올랐다. 신비에 익숙하지 않은 용병들이 소리 내어 감탄했다.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평생을 살아도 요정, 마법, 신수 같은 것을 보는 일은 드물었다.

“저쪽?”

로벨은 넋 나간 용병들을 내버려 두고 모닝스타를 몰았다. 로벨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장보다 술잔이 자연스러운 조선공도, 선실 공사를 위해 자재를 나르는 인부들도, 호른 경을 따르는 기사 가문 종자도 멍하니 지켜보는 가운데 연인과 만났다.

요정 소피의 두서없는 악담-저 주군이란 인간이 막 험악하게 잡아 왔다는 등등-을 들어주던 호른 경은 말 위에서 웃는 로벨을 보고 멈칫했다. 눈치가 업무의 반인 기사 종자가 눈치 없는 요정을 양손으로 포획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성난 요정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멀어지자 호른 경이 입술을 떼었다.

“정말 오셨군요.”

“약속했으니까. 오히려 늦어서 미안하오.”

로벨이 모닝스타에서 내렸다. 호른 경은 한쪽 무릎을 꿇고 연인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나의 시간은 그대를 만나는 순간까지 멈춰있으니 늦어도 늦은 것이 아니라 말씀하셨지요.”

호른 경은 로벨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올려다보았다.

“제 마음도 폐하와 같습니다.”

로벨이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왕의 미소였다.

@

호른 마을이 크게 성장했다고 하지만, 로드릭 시티에 비해 아직 시골이었다. 해안을 따라 1마일쯤 가자 인적이 사라졌다.

각진 바위와 뾰족한 자갈해안 너머로 운반선만 한 척 유유히 떠가는데, 거리가 멀어 얼굴 팔릴 일은 없었다. 고로 오랜만에 단둘이 데이트였다.

장미꽃이 만발한 화원 대신 똥 싸는 말 위에서, 향기 좋은 와인 대신 짠내 나는 바닷바람을 쐬지만, 그래도 제법 낭만적이었다.

“어린 집사의 칼솜씨가 제법 좋아졌소. 엊그제 깜짝 놀랄 반격을 하는데, 하마터면 제대로 때릴 뻔했소. 아, 그리고 새로 뽑은 용병 중에 덩치가 좋은 자들이 있는데 장창병으로 쓰면...”

의심할 것 없이 낭만적이다. 로벨이 이렇게 수다 떠는 것은 어린 집사도 본 적 없으니까. 그 내용이 검술, 전술, 전쟁, 용병술인 것은 그저 그거 말고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공왕 폐하가 행복하면 저도 행복합니다.”

호른 경이 갑자기 치고 들어왔다. 로벨의 말문이 막혔다. 귓불이 빨간 것은 겨울바람 때문일 것이다.

“본인도 경이 행복하면 좋소.”

모닝스타가 눈꼴시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모닝스타의 험악한 표정에 주눅이 들어 따르던 호른 경 애마도 멈췄다. 우연인지 기분 탓인지 바람마저 잦아들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애달프게 우는 바닷새 소리가 심장을 쪼여왔다.

“오늘 밤 제 성에서 여독을 풀고 가시지요.”

사랑의 힘은 위대했다. 예전 같으면 ‘고작 반나절 거리인데 뭔 여독이오?’라고 했을 텐데, 로벨 답지 않게 속뜻을 제대로 파악했다.

“그, 그래도 되겠소?”

이제 뺨까지 빨개졌다. 정말 추운 모양이다. 호른 경이 로벨의 손을 잡았다. 아쉽게도 말 위에서 할 수 있는 스킨십은 제한적이었다.

“최고의 저녁을 대접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기대하겠소.”

그 기대는 절반만 충족되었다.

해안가 산책을 2시간쯤 하고, 고기와 술을 배터지게 먹고, 아무도 찾지 않는 성안 으슥한 곳에서 키스를 이어갈 때였다. 한겨울의 짧은 태양이 원망스럽게 훼방이 들어왔다. 아는 게 없는 문지기도, 자존심 강한 요정도, 눈치 좋은 기사 종자도 아니었다. 북해 너머의 사악한 섭정과 악마추종자였다.

“청옥성의 펠릭스 경이 보낸 전령입니다! 잉그비아 해군 2개 함대가 볼리모 항을 떠나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잉그비아 왕국이 예상보다 20여 일 빠르게 움직였다. 제2차 북해전쟁이 시작되었다.

@

겨울은 전쟁하기 좋은 계절이 아니었다.

사실 ‘전쟁’ 대신에 무엇을 넣어도 좋지 않은 계절이었다. 땅은 꽁꽁 얼고 숲은 헐벗어서 먹을 것이 부족한데, 모진 바람 탓에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위협이 되어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해야 했다.

“그 섬놈들은 상도덕이, 아니지, 전쟁도덕이 없나요? 이 추위에 무슨 전쟁이야!”

도덕은 어떤지 몰라도 상식은 있기에 지상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북해연안의 작은 섬들이었다. 지난 전쟁을 반추하여 무작정 본진을 노리기보다 교두보를 마련, 장기전에 대비하는 듯했다. 여기서 문제는, 접근이 쉽고 물자를 비축하기 좋은 섬은 이미 정착해 사는 사람이 있으며 공교롭게도 볼탄 반도에 세금을 내는 주민이란 것이다.

“우리 공국의 해군력을 우습게 본 모양입니다.”

이안 선장이 길게 자란 염소 수염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흉터를 가리겠다고 기른 수염인데, 멋지게 자라지 않아 얍삽한 간신배 수염 같았다. 어린 집사가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하! 진짜 웃기네요! 우리를 그렇게 보았다면! 아주 제대로 보았군요!”

“뭐야, 마무리가 이상하잖아.”

“그게 사실이니까요.”

잉그비아 왕국에 비하면 전함의 크기와 숫자가 모두 부족했다. 늑대성이 가진 가장 강력한 전함 바다사자 호도 본래는 잉그비아 왕국 배였으니 말이다. 로벨은 유일한 해전 전문가 이안 선장에게 물었다.

“우리가 막을 수 없어? 최소한의 수비는?”

이안 선장은 수염 끝을 올리며 고민했다. 어떻게 말해야 화내지 않을까 고민이었다.

“늑대성의 함대, 청옥성의 함대, 그리고 검은 성의 함대를 모두 합쳐 반격하면 일부 섬은 탈환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예. 방어시설이 없는 시골 어촌이니까요. 그러나 그 말은...”

“도로 빼앗아도 지킬 수 없다는 말이구나.”

역시 이쪽으로는 이해가 빨랐다.

로벨은 턱을 두 번, 테이블을 세 번 두드린 후 결정했다.

“그래도 대응해. 섬 주민과 재산을 최대한 사트로 시티로 옮겨. 준마를 세 마리 줄 테니 당장 출발해.”

이안 선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폐하...”

“그만.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그래도 죄 없는 주민을 보호해야 해.”

“그것이 아니고...”

“그만하라니까.”

이안 선장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결의에 찬 얼굴로 다시 말했다.

“저 말을 탈 줄 모릅니다.”

“......”

“준마가 아니라 마차를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응.”

로벨이 시선을 피하며 허락했다. 왕이 머쓱해 하자 충심 깊은 호른 경이 화제를 바꿨다.

“강철갑옷 호를 비롯한 로드릭 항의 함대를 동원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선원도 부족하고, 무기도 없잖아요.”

어린 집사가 반대했다. 항해술은 몰라도 기초상식은 있었다. 새로 만든 배, 새로 고용한 선원은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로벨 역시 동의했다.

“그들은 따로 할 일이 있소.”

“따로 말입니까?”

“그렇소. 나중에 말해줄 테니 지금은 그냥 두시오.”

전쟁의 구름이 코앞에 다가와 할 일이 태산이었다. 게으른 로벨도 더는 빼지 못했다.

“봉신들에게 소식을 전하시오.”

“기사를 소환합니까?”

“지금은 아니오. 그래도 준비할 시간을 줘야지. 집사, 볼프 후작한테 온 소식은 없어?”

“아직이요. 청옥성이 먼저 사람을 보냈으니 내일이나 모레쯤 오지 않을까요?”

“그럼 북군(北軍)을 소집해둬. 응. 대포도 가져갈 거야.”

지금까지 전쟁에 대비한 만큼 착착 진행되었다. 전령이 볼탄 반도 각지로 달려가고, 월동물자를 수레 단위로 챙긴 울프 용병단 2개 대대가 북쪽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로벨은 움직이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갑옷을 꺼내 입고 앞장서서 전장으로 달려갔을 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소식이 빠르긴 빨라요. 잉그비아 왕국군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쫙 났어요. 이 날씨에 피난 오는 사람도 있다니까요?”

“곡물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상인들이 창고를 닫은 거지요. 잉그비아 왕국군이 농장을 불태우면 봄철에 몇 배로 오를 테니까요.”

“벌써부터 이러면 겨울이 끝나기 전에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올 겁니다요.”

경제는 실물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충분한 식량이 남아있고, 화살 하나 날아오지 않았지만,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로벨이 왕좌를 지키고 있어 그나마 덜한 것이었다.

“공왕 폐하가 계신데... 설마 큰일이 나겠어?”

“그래! 정말 급하면 무적무패 왕이 가만히 있겠냐? 저런 바가지에 휘둘리지 마!”

어린 집사가 여름과 가을에 미리미리 식량을 비축한 덕분도 있었다. 늑대성이 잠잠하니 사재기가 덜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모르쇠 할 수 없었다. 로벨이 왕좌를 지키는 다른 이유는 기사들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으... 날도 찬데 무슨 행렬이우?”

“저기 남쪽에서 귀한 영주 나으리가 왔다는구만.”

“우리 공왕 폐하의 부하 나으리인가?”

“그렇겠지?”

잉그비아 왕국의 재침략 소식을 접한 기사들이 추위와 눈보라를 무릅쓰고 늑대성을 찾아왔다. 애국심, 충성심의 발로라면 저 북쪽 숲의 하얀 눈꽃나무만큼 아름답겠지만, 당연히 아니었다.

샘 포클 시대나 로벨 로드릭 시대나 기사를 움직이는 것은 명예와 재물이었다. 공훈을 세우기 위해서, 공왕의 눈에 일찍 띄기 위해서 소집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찾아왔다. 전쟁을 유별난 규모의 토너먼트로 여기는 오만한 발상도 조금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갑을 두르고 10마일쯤은 단숨에 주파하는 값비싼 전투마를 타고 있으니 그럴만했다.

어찌 됐든 콧대 높고 명예욕 충만한 기사가 계속해 찾아오니 로벨이 자리에 있어야 했다.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공왕령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려도 자존심 하나에 칼부림하는 기사들을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속된 말로 말이 통하지 않아 이길 수 없었다.

새해가 가까운 겨울 끝자락이 흥분 반, 걱정 반, 욕심 반의반으로 시끌벅적했다. 어린 집사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 빠졌을 때, 사트로 가문의 공식적인 보고가 전해졌다.

‘청옥성 북서쪽 22마일 공해에서 볼탄 반도 연합해군과 잉그비아 제2왕립해군 전투.’

섬마을과 해안마을의 약탈이 빈번하긴 했지만, 정규군이 충돌한 것은 처음이었다. 긴장으로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볼탄 반도 연합해군 북해 갤리선 7척 침몰, 범선 1척 반파. 잉그비아 왕립해군 무장범선 2척 반파. 인명피해 확인 불가.’

구체적인 과정과 손실이 쭉 이어졌으나 귀담아듣는 기사와 용병은 많지 않았다. 해전에 어두워도 손가락을 꼽을 지혜는 있으니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볼탄 반도 공국의 대패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