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화. 준비
봄, 여름, 가을 동안 바쁘게 일한 생명들은 각자의 보금자리에서 각자 방법으로 긴 겨울을 맞이했다.
“어깨 펴라. 허리 세우고. 얼씨구? 오리 궁둥이냐?”
겨울을 상징하는 단어는 유독 차갑고 어두웠다. 죽음처럼 고요하고 얼음처럼 무정하니 정적이고 부정적이다.
“추워? 추우면 뜀박질 한 번 더 할까?”
물론, 예외는 항상 있었다. 로벨 로드릭 공왕의 울프 용병단은 삭풍이 무색하게 땀을 한 바가지씩 흘렸다.
지난 전쟁으로 생긴 결원을 보충하고, 추가로 102명을 고용해 총 1천 명이 되었다. 그중 일부는 뉴 로드릭 마을, 호프 마을, 소금 광산, 금광산 등에 파견되어 로드릭 시티 요새에 주둔하는 용병은 700명이 조금 안 되었다. 그래도 모아 놓으면 무시무시한 숫자였다.
“창 똑바로 잡아. 어허, 자꾸 아래로 처지는 놈 누구냐?”
“적이 오는데도 무겁다고 징징거릴래? 이게 실전이면 넌 확실히 뒈졌다.”
숫자가 늘어난 만큼 할 일도 많았다. 특히 새로 뽑은 용병은 ‘볼탄 반도식’ 교육을 다시 받아야 했다.
“세상 참 좋아졌지. 어느 용병단이 신삥 받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훈련시키냐. 적당히 숫자 채워서 화살받이로 쓰고 살아남은 놈만 급료 주지.”
“아, 영감탱이 대장! 드럽게 말 많네!”
용병짓이 만만치 않은 만큼 신참들도 고향에서는 한 성깔 하는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무례한 것은 성깔 탓만이 아니었다. 펄프 대장의 지속적인 ‘나 때는’과 3시간째 반복되는 ‘창 세우고 발맞추기’ 때문이다.
크로스보우를 가진 고오급 용병들은 진작 훈련을 마치고 햇볕 좋은 곳에 앉아 낄낄거렸다. 철부지 신참이 욱해서 따지니 억울하면 페닝 모아 고급병과 가라는 귀중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거 말고 제대로 된 거 가르쳐주쇼.”
“제대로 된 거?”
“칼 들고 화끈하게 싸우는 거 있잖쇼.”
고참 용병들이 ‘허허, 허’ 웃었다. 정말 촌 동네 철부지가 들어왔다. 자신들도 10여 년 전에 저랬단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군인이 무엇이냐.”
“사람 죽이는 사람 아니오?”
“틀렸다. 발맞춰서 걷는 사람이다.”
정확한 의미는 ‘단합’과 ‘통제’였다. 전쟁은 결코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 쉽게 설명하쇼. 쉽게. 나 무식하다고 놀리는 거요?”
“창으로 벽을 만들고 화살로 소나기를 퍼부어야 한단 말이다. 혼자 뛰쳐나가서 칼부림해봐야 몇 초나 버틸 거 같냐. 우리 공왕 폐하라면 혹 모르지만, 보통은 숫자 세기도 전에 뒈져.”
펄프 대장은 아픈 다리를 티 나지 않게 끌어당기며 다시 말했다.
“요컨대 네놈이 칼질로 활약할 상황이면 그 전쟁은 이미 끝난 거다. 이겨서 잔당 처리 중이거나 져서 뭐 빠지게 도망가는 중이거나. 전자면 대충 쑤셔도 죽고, 후자면 객기 부리지 말고 빨리 튀고. 전장에서 네 싸움 실력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시골 마을에서 영웅이 되는 꿈을 키웠을 신참은 수긍하는 동시에 반발했다.
“공왕 폐하는? 무적무패 왕은 혼자 성문을 부수고 성벽을 넘어 싸우잖수?”
“...넌 허풍쟁이 제이콥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라.”
그래도 신참 덕분에 잠깐 쉬었다. 펄프 대장은 11파운드짜리 롱 스피어를 놓고 시시덕거리는 꼬마 늑대들을 보았다.
“창 들어라. 땀 식으면 춥다.”
“크으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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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준비는 병사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피 끓는 참혹함에서 한 발 벗어나 주목받지 못할 뿐, 시작과 끝에서 가장 분주한 것은 펜을 가진 사람이었다.
“너무 늦어요! 지금 진수해도 북해로 보내려면 보름 이상이 걸린다고요! 뭐라고요? 북풍이 부니까 오래 걸리죠!”
“폭풍성에서 보낸 곡식 말입니까? 당장 쓸 것만 빼고 비스킷으로 만들었습니다. 가만있자, 여기 키 큰 그람 씨의 보고서가 있습니다.”
왕은 검소하고 징수관은 성실하며 행정관은 유능하니 늑대성의 재정은 부족함이 없었다. 천 명의 군사와 아홉 척의 무장 선박을 동원하는데 상인들한테 아쉬운 소리 할 필요 없었다.
“일단 움직일 수 있는 배는 사트로 항구로 보내요. 청옥성의 함대도요. 전부 모으면 잉그비아 해군도 가볍게 덤비지 못할 거예요.”
“물론 봉신들의 군량까지 우리가 책임질 필요는 없죠. 그런데 그 한심한 작자들이 40일이나 먹을 식량을 싸 들고 올까요? 징발이니 약탈이니 상인 털고 마을 털면 나중에 골치 아파요. 원정 전쟁이 아니잖아요.”
어린 집사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죽어가는 행정관과 사사건건 훼방 놓는 늑대 남매 사이에서 히스테릭한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해! 난 그냥 늑대성 집사라고오오!”
페리 행정관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페리 행정관이 주관해야 할 일이었다. 그저 관습상, 능력상, 성격상 어린 집사가 주도할 뿐이었다.
“어린 집사님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에휴... 마음에 없는 말 하지 마세요.”
페리 행정관은 진심이었다. 양식은커녕 기초 문법조차 안 지키는 영주들의 보고서를 간추려 요약하고, 최소 17가지 품목의 세수입을 그 자리에서 페닝으로 환산해 합산하며, 신년 예산의 자잘한 항목을 모조리 암기해 서류 뒤적일 필요 없이 즉각 결제했다. 혼자서 대여섯 명의 몫을 할뿐더러 정확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진짜... 진짜 새해에 전쟁이 납니까?”
숙연해지는 질문이었다. 어린 집사는 깃펜을 잉크병에 꽂았다.
“공왕 폐하가 그렇다고 했으니까 그렇겠죠.”
“하지만 공왕 폐하께서는...”
‘바보 멍청이 아닙니까?’라는 말이 생략되었다. 예의 바르게 돌려 말하면 ‘기사 중의 기사 아닙니까?’ 일 것이다. 어차피 같은 의미였다. 어린 집사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공왕 폐하를 우습게 보지 마세요.”
“아니, 우습게 본 것이 아니라...”
“공왕 폐하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영리한 사람이에요.”
“그야 물론, 전략, 전술가로 대적할 상대가 없으시니...”
“그것만이 아니에요. 글을 쓰고 셈을 하는 것이 기사답지 못하다 생각할 뿐, 사실은 대학가의 어느 천재보다 똑똑해요.”
대학물을 먹은 페리 행정관을 겨냥한 말이었다. 페리 행정관은 머쓱해서 헛기침했다.
“어린 집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어린 집사님! 집사님! 못생긴 집사님!”
얼음장 같은 분위기에 타오르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런 경박한 소리를 내는 늑대성 식구는 한 사람뿐이었다.
“키르케, 지금 공무 중이라 바빠요. 공왕 폐하한테 가서 놀아 달라고 하세요. 여기 털북숭이들도 데려가고요.”
“안 돼요! 못 가요!”
“늑대들을 못 데려간다고요?”
아야와 이야카가 풀 죽은 듯 귀를 떨구었다. 그러나 좀 더 큰 늑대 이야기였다.
“기사님이요! 짜증만 내는 집사님보다 멋지고 자상한 기사님을 먼저 찾아갔죠! 당연히! 근데 안 계셔요! 성 안에도 없고 성 밖에도 없어요!”
일국이 왕이 사라졌지만 반응은 시큰둥했다. 무적무패 왕이니까. 게다가 영민한 어린 집사는 주인이 어디 갔을지 바로 짐작했다. 조금 전 자신이 한 말을 전면 부정했다.
“...이 똥멍청이 공왕 폐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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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망토자락을 크게 흔들었다.
시 서펜트 가죽으로 만든 망토는 비, 바람, 추위, 화살뿐만 아니라 불경한 의심을 막는대도 탁월했다. 성문을 지키는 청년이 주눅이 들어 다시 물었다.
“저기, 저, 나으리? 어디서 온 누구라고 아뢸까요?”
평범한 질문이지만 난감했다. 솔직히 말하면 쑥스러웠다. 그랜드 챔피언으로 명성을 쌓고, 각종 전공으로 작위를 늘려가며 자기소개를 한 적이 없었다. 어린 집사나 허풍쟁이가 대신 소개했으니까. 원래 그러라고 수행원을 두었다.
“늑대성의 로벨이라고 전해줘.”
어릴 때 머리를 크게 다친 불운한 사내나 세상사에 초탈한 수도승이 아닌 이상 무적무패 왕 로벨이란 것을 짐작할 것이다.
“늑대성 나으리시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무리 봐도 수도승 같지 않으니 앞쪽을 의심했다. 혼자 성문을 지키는 것부터 의심스러웠다.
로벨은 호른 성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로드릭 시장의 젖줄, 로드릭 항을 지키는 해안 요새로 군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등의 딱딱한 배경 설명은 치우고, 로벨이 처음으로 점령한 성이었다.
가만 생각하면 이곳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류트 공자의 사주를 받은 아만다 남작과 싸우고, 아들의 복수를 위해 쳐들어온 맥켈런 남작과 싸우고, 머를 브릭 경을 영주로 임명하고, 호른 경을 불러와 밀회하고...
“고귀한 주군(Lord) 아가씨(Lady)네?”
“응?”
호른 경이 아니라 호른 경의 친구가 나왔다. 평소 마주하는 생물보다 ‘조금’ 작아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너는... 소... 소보루였지?”
“소피! 소피야! 이상한 이름 붙이지 마!”
로벨은 콧등에 올라탄 자작나무 요정을 거꾸로 잡았다. 너무 작아서 조심해야 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요정은 손바닥을 펼쳐 인사를 받았다. 앞뒤로 흔들리는 중에도 자존심이 대단했다. 로벨은 지난 만남을 떠올리며 몇 가지 질문했다.
“요정은 태어난 곳을 못 떠난다면서?”
“패티가 자작나무 가지를 가져왔어. 눈이 녹을 때까지 괜찮을 거야.”
“그래? 호른 경도 고생이 많네.”
로벨에게 하사받은 호른 성과 고향인 자작나무 숲을 수시로 오가며 틈날 때마다 로벨을 찾아왔다. 로벨 주위에는 바쁜 사람 투성이였다.
“호른 경은 어디 있어?”
“패티? 이 집에 없는데? 아침 일찍 바닷가 집에 갔어.”
“바닷가? 조선소 말이야?”
슬슬 피가 쏠리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로벨은 요정을 모닝스타 머리에 놓아주었다. 말갈기는 굵고 튼튼하니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 거기로 가자.”
모닝스타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움직여 푸헤헹-거렸다. 같은 신비과(科)라 요정이 싫지 않은 듯했다. 호른 경을 찾으러 간 청년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냥 출발했다.
과거 아만다 마을이라 불린 작은 어촌은 십여 년 사이 크게 성장했다. 로드릭 시장을 기점으로 북해와 인어해를 잇는 교역로가 되어 많은 부를 쌓았다. 구멍 숭숭 나서 허물어져 가는 판잣집 대신 태풍에도 끄떡없을 벽돌집이 늘어섰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빌려준 어선도 세 배로 늘어나 부두 외곽을 가득 메웠다. 고기잡이보다 견인과 하선을 주로 돕는 듯했다.
“난 바다가 싫어.”
요정이 갈기에 몸을 묻고 중얼거렸다. 로벨은 예의상 한 번 물었다.
“왜 싫어?”
요정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 궁금한 게 아니라 두 번 묻지 않았다.
초승달 만(灣)의 북쪽 꼭짓점에는 여름에 급히 지은 조선소가 있었다. 군사 보안상의 천막을 둘렀는데 누각과 돛대가 너무 높아 가리지 못했다. 115만 파운드의 중형 카락선, 강철갑옷 호였다.
“이름이 별로야.”
“...내가 지었어.”
“응. 별로야.”
로벨의 입술이 삐죽였다. 호른 경이 친구를 참 잘 사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