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31화 (531/605)

531화. 성배

성유물의 탄생은 대단치 않다. 거룩한 신앙을 위해 목숨 바친 성인(聖人)이 생전에 몸에 지녔으면 성유물이다.

야만이 들끓는 기나긴 세월 동안 수많은 독신자가 순교하여 시성(諡聖)되었고, 그들이 남긴 유해와 유품이 하나 같이 성유물로 지정되었다. 성인의 숫자보다 몇 배, 몇십 배 많은 성유물이 존재하여 성유물이 없는 교회는 가난하고 비루한 교회라는 속된 농담마저 있었다.

그러나 성유물이라고 다 같은 성유물은 아니었다. 성인 중의 성인, 성자이자 성부이자 성령인 옛 신의 성유물은 의미가 달랐다. 옛 신의 피가 묻은 천 한 조각이 도시 전체를 먹여 살리는 경우도 있으니-그것 하나 보고자 수많은 신도가 찾아온다- 옛 신께서 직접 입을 댄 성배는 국가적인 보물이었다.

“성배는 교단 본부에 있는 거 아니에요? 교황님이 취임할 때 쓴다고 들었는데요?”

“어라? 전 동방 성지에 있다고 들었는뎁쇼? 그래서 매년 순례자가 찾아가는 거 아니었습니까요?”

마녀 키르케와 용병 허풍쟁이가 횡설수설했다. 그것만 봐도 성배의 위상과 수수께끼를 알 수 있었다. 이해가 빠른 아자르 경이 물었다.

“그렇게 대단한 것이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까? 그렇다면 이것도 가짜가 아닙니까?”

로벨이 지식을 자랑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번이 그 흔치 않은 상황이었다. 정통파 기사이자 기사 소설 마니아기 때문이다.

“옛 신의 제자 성 요셉이 옛 신의 명령을 받아 해가 지는 브리타니아 땅에 성배를 숨겼다고 하오.”

“엥? 그런 전설이 있습니까요?”

“유명한 전설이야. 교회에서는 인정하지 않지만, 기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봤을걸?”

“그치만 여긴 뱀의 계곡이잖아요?”

해가 지는 서쪽 끝 브리타니아가 어디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걸 알면 진작 찾아냈을 텐데 전설만 무성할 뿐 누구도 성배를 찾지 못했다. 옛 신의 교단은 전설을 부정하고 성배는 교단 본부 지하 깊은 곳에 보관 중이노라 주장했다.

“좀 미심쩍긴 한데...”

로벨은 보물 상자를 쓰다듬었다. 4, 500년 뒤에 고고학자가 온갖 비밀을 파헤치고 함정을 돌파하며 찾아야 할 보물을 꼼수로 미리 찾은 기분이었다.

“열어볼까?”

“하, 함정이면 어쩌죠? ‘옛 신이 나타나서 이노옴! 감히 내 것을 탐하느냐! 벼락 맞아라!’ 하면요?”

마녀 키르케가 호들갑떨자 아자르 경이 코웃음쳤다.

“지하라 벼락이 안 떨어진다.”

“저주는요? 발기부전 저주 같은 거 걸리면 예쁜 부인한테 소박 맞을걸요?”

“...처녀가 남사스럽게 못 하는 소리가 없다.”

그래도 저주가 무섭긴 한지 두어 걸음 떨어졌다. 이 땅에 아자르 가문을 세울 사명이 있었다. 그러했다.

“옛 신이 그렇게 치졸하려고. 음... 자물쇠는 없어. 열어볼게.”

그쪽 저주에 면역인 로벨이 용감하게 상자 뚜껑을 잡았다. 오래되어 녹이 슬었지만, 인간의 영역에서 한 발 벗어난 ‘왕’을 무안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드득- 드득- 소리를 내며 천천히 벌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천 년 묵은 진실이 밝혀졌다.

@

로벨 일행은 4층까지 대강 훑어본 후 임시 캠프로 귀환했다. 잔해 속에 깔린 1층과 성채 저편은 삽과 곡괭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제 지상으로 올라가시지요.”

호른 경이 로벨의 몸을 살피며 말했다. 너무 노골적이라 자칫 오해할 수 있었다. 로벨은 비스킷을 부숴서 혓바닥 위에 올렸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이른 저녁이라 해도 무방했다.

“서고가 있었소.”

“허풍쟁이에게 들었습니다.”

로벨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트림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곳을 살펴야 하오. 끄윽-”

사실 트림이 맞았다. 호른 경은 손부채질 후 진지하게 말했다.

“교회에 연락해서 고어에 밝은 사제를 불러오겠습니다.”

“그건 좀... 아니오. 그렇게 하시오.”

성배 전설을 부인하는 옛 신의 교단은 변방 오지에서 발견된 성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진심이기에 무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로벨의 머리가 15살 이후 가장 바쁘게 돌아갔다.

‘내가 먼저 진실을 요구하면 안 되겠지?’

자칫하면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속의 왕으로 비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볼프 후작 일로 관계가 서먹한데 기름을 끼얹을 필요 없었다. 호른 경의 말대로 직접 알아보게 하는 것이 좋았다. 옛 신의 교단이 진실을 알면, 하다못해 의구심이라도 생기면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편이 좋았다.

‘이건 나한테 있으니까.’

성배(聖杯). 옛 신이 성찬 때 사용한 술잔이자 옛 신의 피를 담은 유물. 최초의 성유물이며 최고의 성유물이었다.

“아직 믿기지 않지만...”

“예?”

로벨은 성배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호른 경을 비롯해 과묵한 몬트, 피리 부는 장, 혓바닥 성의 장정들이 힐끔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성배란 것을 알지 못했다. 솔직히 로벨도 의심스러웠다. 국가적인 보물, 아니, 유라피아 대륙 보물이라 하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전설마다 동화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형형색색 보석이 장식된 황금의 잔이 일반적인 성배였다. 그러나 로벨이 찾은 성배는 납으로 된 밋밋한 잔이었다. 멋도 없고 건강에도 안 좋은 싸구려 재질이었다. 고대 왕국 시대 술잔이 대부분 그렇지만 어느 농가 찬장에 올려놔도 어색함이 없을 것이다.

“옛 신은 본래 가난한 분이었지?”

“성경에 따르면 그렇습니다만...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로벨은 호른 경이 놀라지 않게, 하지만 농담처럼 들리지도 않게 고심해서 말했다.

“옛 신이 쓰던 술잔을 찾았소.”

“예?”

“피도 조금 묻었던 거 같소.”

“...예?”

고심을 너무 많이 한 탓일까, 호른 경의 반응은 식사가 끝나고 마녀 키르케와 농담 따먹기 할 때쯤 터져 나왔다.

“그럼 그것이 서, 성, 성배...”

“우아악-! 호른 나으리!”

“닥쳐라! 조용히 만든다! 주둥이 쳐라!”

@

로벨 일행은 하루 더 캠프에 머물렀다.

‘진짜 보물’을 발견한 아자르 경과 허풍쟁이가 의욕적으로 조사를 벌였고, 깨진 도자기 몇 점과 고대 왕국 시절의 쇼트 소드(Spatha)를 찾아냈다. 칼집에서 뽑는 순간 세 조각으로 부러져서 욕심 많은 허풍쟁이와 무기 애호가 로벨이 좌절했으나, 그래도 나름의 소득이었다.

닷새째가 되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혓바닥 성 장정들의 불만도 불만이지만, 식량이 바닥났다.

호른 경은 옛 신의 사제들이 오면 조사를 이어갈 수 있게 발굴 과정을 기록했다. 성배에 관한 기록은 ‘옛 신의 거룩한 흔적’이란 두리뭉실한 표현을 사용했다. 성배를 뜻하는 것도 같고, 성배의 ‘궤’만 뜻하는 것도 같았다. 이 기록을 보고 조사한 사제들은 애가 탈 것이다. 어쩌면 몇백 년 뒤의 후손들까지 가슴을 두드릴 것이다. 실제로 미래를 미리 고하면 ‘패트릭 호른 경’이란 이름이 각종 음모론에 등장하게 된다. 성배 외에도 쌓아놓은 의문이 많은 탓이지만...

“추수가 끝나면 호른 성에 잠시 들리지 않으시겠습니까?”

“경의 성에? 무슨 일이 있소?”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만나는 것은 아니지요.”

“아...”

모처럼 용기를 낸 데이트 신청이었다. 로벨은 시선을 피하며 끄덕였다.

“봉신의 영토를 살피는 것도 왕의 역할이니까...”

세 자릿수 봉신 중 유독 한 명만 챙기는 느낌이긴 한데, 왕의 간섭이 귀찮은 현 영주들은 아무 문제 삼지 않았다.

고생한 혓바닥 성 장정들에게 은화를 몇 닢씩 쥐여 주고, 아자르 경과 옛 신의 교단에 유적 발굴을 위임하고, 송별회를 핑계로 술을 진탕 마시고, 이레째 되는 날 간신히 늑대성으로 출발했다.

“저는 어찌합니까? 계속 나으리를 따라갑니까?”

조지 솔트가 빈 보자기를 흔들었다.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큰 벌집이었는데, 마녀 키르케와 용병들이 야금야금 먹어 기어이 동을 냈다.

“음... 계약은 늑대성까지 동행이잖아?”

“가져갈 게 없는데도 말입니까?”

조지 솔트는 눈치 없는 바보가 아니었다. 로벨이 자신을 고용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구체적으로 추리하면 휘하 용병단에 넣으려는 속셈일 것이다.

“저는 잉그비아 왕국인입니다.”

“내 용병단에는 야만의 땅에서 온 검은 피부도 있어.”

애국심은 농담이고 애민애족은 코미디인 시대였다. 피가 섞이지 않으면 전부 남이라 이웃 마을 지미나 이웃 나라 제임스나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의심되지 않습니까?”

로벨이 모닝스타를 세웠다. 자연히 호른 경과 울프 용병단 수레도 멈춰 섰다. 12개의 눈이 조지 솔트를 향했다.

“소금장수라고 했지? 그래서 성(姓)이 솔트(Salt)고?”

“예. 그렇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잉그비아 왕국에는 소금 광산이 없어.”

북해무역협정으로 재미를 본 상품 중 하나가 소금이었다. 잉그비아 섬에는 소금 광산이 없는지, 있지만 채산성이 부족한 건지 매년 막대한 양의 소금을 수입해 갔다. 어린 집사가 회색산의 소금 광산을 운영하기에 잘 알았다.

“소금은 왕실에서 관리하는 전매품이야. 개인이 사고 팔 수 없어. 만약에 네가 소금장수라면 둘 중 하나일 거야. 잉그비아 왕국에서 알아주는 범법자거나...”

조지 솔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머미를 때려잡을 때보다 불안했다.

“...왕실에서 일한 군인이거나.”

챙-!

호른 경과 과묵한 몬트가 무기를 뽑았다. 병장기 소리에 깜짝 놀란 허풍쟁이와 피리 부는 장도 뒤늦게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러나 조지 솔트는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고용하려는 겁니까?”

“착각하지 마. 고용하는 이유는 순전히 실력 때문이니까.”

“의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은 왕국군이 아니잖아? 도망친 건지 쫓겨난 건지 모르지만, 외팔이와 과묵한 몬트를 제압할 실력자니까.”

외팔이가 입술을 모아 ‘그때는 방심해서... 다시 붙으며 이깁니다요...’ 어쩌고 반박했지만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 폐하를 모시는 왕실 근위대의 중대장이었습니다.”

조지 솔트가 진짜 신분을 밝히자 깜짝 놀랐다. 왕실 근위대 중대장이면 직책이 애꾸눈 급은 되었다.

“궁정 기사 데일드 경을 따라 소금 운반 임무를 자주 했습니다. 그래서 소금장수란 별명이 붙었지요.”

“그럼 거짓말이 아니었네요? 다행이다!”

마녀 키르케가 좋아하자 조지 솔트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에드워드 3세가 돌아가시고 리처드 2세가 즉위하자 대대적인 물갈이... 아니,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호른 경을 통해 보고 받은 사항이었다. 흑태자 파벌 속해 해고당한 것이다.

“왕실 근위대에서 쫓겨나고 방탕하게 지내다 보니 금방 빈털터리가 되었지요. 배운 게 칼질이라 다시 용병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근위대 딱지가 어디 가지 않아 유명 용병단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철사자 용병단이지요.”

“쿨럭-”

허풍쟁이가 사레들린 것처럼 기침했다. 이제 더 거짓말할 것도 없었다.

“공왕 폐하의 군대와 싸운 용병단 맞습니다. 그중에 저도 있었지요.”

“뭐야, 진짜 탈영병이잖아?”

“패잔병이라 하자. 탈영은 좀 거시기하네.”

울프 용병단이 숙덕거렸다. 오래전에 짐작한 일이라 그리 충격은 아니었다. 조지 솔트는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용병짓이 지긋지긋해서 농사나 지을까 했는데...”

“농사는 은퇴한 뒤에 지어도 되잖아. 왕실 근위대 중대장에 철사자 용병단 간부라니, 멋진데?”

대답은 들은 거나 마찬가지다. 로벨은 미소 비슷한 것을 보이고 모닝스타 옆구리를 때렸다. 인간사에 무심한 짐승은 지루한 대화가 끝난 것에 기뻐하며 네 다리를 움직였다. 그때, 피리 부는 장이 두 눈을 굴리며 속삭였다.

“근데 중대장이면 우리보다 직급이 높잖아?”

“그건 아니지! 굴러온 돌인데? 왕실 근위대가 대수야? 우리도 따지고 보면 공왕 폐하 근위대잖아!”

허풍쟁이 이하 박힌 돌이 일제히 반발했다. 과연 어찌 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