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화. 탐사
썩어가는 구울이나 바싹 마른 머미나 근본은 비슷했다. 죽지 않는 시체(Undead)들이었다.
“꼴통을 부숴! 힘 낭비하지 말고 꼴통만 부수라고!”
“우웨엑-! 입에 들어갔잖아!”
“머미 가루가 몸에 그렇게 좋다는데, 좀 먹으면 어떠냐?”
사자(死者)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만 극복하면 언데드는 그리 까다로운 괴물이 아니었다. 지능이 낮아 병장기를 다루지 못하고 짐승처럼 깨물기와 할퀴기로 덤비는데, 인간의 악력(顎力)과 악력(握力)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가죽옷만 두껍게 입어도 대부분 막아냈다. 갑자기 포위되거나 고립되어 압사당하지 않는 이상 쇠붙이를 두른 전쟁 전문가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교대! 교대해!”
보루에 들어온 머미들은 괴력과 풀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기사들이 처치했고, 안마당을 배회하는 머미들은 울프 용병단을 주축으로 한 ‘거친 사내들’이 처리했다.
“계약에 이런 내용은 없었는데, 고용 사기 아닌가?”
거친 사내 조지 솔트가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그냥 벌집 운반이 아니란 것은 짐작했지만, 고대 유적과 고대 머미 퇴치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깟 일로 30페닝이면 거저먹는 거지! 힘 좀 써보쇼!”
“...벌집 값을 빼면 20페닝이다.”
지치고 질리지만 위험하진 않았다. 긴 창과 장대로 접근을 막으며 쇳덩이로 머리를 부수는 단순 작업이었다. 물기도 기름기도 없는 괴물이라 무기가 상하지도 않았다.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성 안마당이 정리되었다.
“일흔다섯, 일흔여섯, 일흔일곱...”
허풍쟁이가 구석구석 쌓인 시체를 헤아렸다. 숫자에 약해서 십 단위 하나를 건너뛰었지만, 어둠 탓에 중복해서 헤아린 시체가 많으니 그럭저럭 맞았다.
“총 여든하고 아홉 구입니다요!”
“거의 백 명이군요.”
로벨과 호른 경이 동시에 주름을 그렸다. 고대 왕국이 지금의 왕국‘들’보다 크다지만, 이런 변방 오지에 세 자릿수나 되는 군대를 주둔시킬 것 같지 않았다. 계곡은 굴곡져서 농사짓기 좋지 않고, 해안은 암초투성이라 항구로 쓰지 못했다. 고대 왕국 시절의 교역로가 지금의 교역로란 것을 생각하면 교통도 좋지 않았다.
“성은 지키기 위한 거야.”
“이들은 무엇을 지킨 걸까요?”
마녀 키르케가 비무장 인부들과 함께 내려왔다. 위험하니까 위에서 기다리라 하려다가 말았다. 천 년 전 유적이면 ‘신비’ 그 자체였다. 마법사가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곳에 캠프를 준비해. 바리게이트도 쌓고.”
허풍쟁이가 횃불을 삼각발 장대에 걸며 슬그머니 물었다.
“보루까지 그리 멀지 않은데, 지상에서 왔다 갔다 하면 되지 않습니까요?”
로벨이 칼자루에 손을 얹자 자문자답했다.
“아무래도 번거롭겠죠? 머미가 다시 나올 수도 있고요? 으하핫! 즉시 실행하겠습니다요!”
역시 백 마디 말보다 한 토막 쇠붙이가 효과적이었다.
지상과 지하를 오가며 자재를 실어 나르니 어느덧 이른 저녁이 되었다. 전투와 노동을 쉬지 않고 반복한 탓에 많이들 지쳤다. 체력이 좋은 아자르 경조차 눈 밑이 꺼뭇꺼뭇했다.
“지하라서 밤낮이 따로 없지만...”
로벨은 기름을 다 태우고 재만 남은 횃불을 보았다.
“아침까지 조금 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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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면 끝날 줄 알았던 탐사가 사흘로 늘어났다.
지상에서 근무를 교대하고 내려온 과묵한 몬트가 임시 캠프의 불침번을 깨웠다. 불침(不寢)이지만 깜박 잠이 든 장은 부상 때문이라 변명하며 사람들을 깨웠다.
“뭐예요... 아직 밤이잖아요...”
잠이 덜 깬 마녀가 웅얼거리며 늑대 남매를 더듬었다. 그러나 여기는 늑대성이 아니었다. 털이 많지만 털짐승은 아닌 외팔이를 껴안았다.
“흐끼왁! 뭣이여?! 저리 꺼져! 저리 꺼지라고!”
봉변당한 외팔이가 기겁해서 일어났다. 얼마나 놀랐는지 마녀를 발로 차 밀기까지 했다. 덕분에 기사들과 인부들이 몽땅 일어났다.
“스, 습격인가!”
호른 경이 담요를 박차고 데구르르- 굴러 워 해머를 뽑았다. 정확히 로벨의 침낭 앞이었다. 발길질 당한 마녀 키르케가 사자 머리로 일어나 항의했다.
“아이 씨! 왜 때려요! 왜!”
“그쪽이 먼저 공격했잖수! 와놔! 심장 떨어질 뻔했네!”
성(性)의 고정관념을 탈피해도, 추행이 아니라 공격인 것이 진심을 증명했다. 정말 끔찍하게 싫은 모양이다.
거인과 마녀가 왈왈거리는 사이 과묵한 몬트가 화톳불을 밝혔다. 지상만큼은 아니지만 꽤 밝아졌다. 로벨이 하품으로 지하의 아침을 열었다.
“밥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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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지하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되었다. 불침번을 포함해도 3경 이상 푹 잤는데 잔 것 같지 않았다.
혓바닥 성의 젊은 사내가 비스킷을 잘게 뿌셔 미지근한 물에 녹이며 투덜거렸다.
“며칠 더 있으면 미쳐버리겠네. 이게 무슨 고생이야?”
그보다 서너 살 많은 고향 친구가 닥치라고 눈짓했다.
혓바닥 성 주민들은 로벨 일당을 좋아하지 않았다. 선대 영주와 지인들을 학살한 외지인이기 때문이다. 엉뚱하긴 해도 자상한 지금의 영주가 충성을 바치니 조심할 뿐이었다. 물론,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피 보는 탓도 있었다.
“조금만 참아.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을게.”
“그걸 어떻게 믿... 힉-! 공왕 나으리!”
로벨이 식사를 마치고 주위를 기웃거렸다. 불 꺼진 랜턴이라 보이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살피니 로벨 혼자가 아니었다. 호른 경이 워 해머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고, 마녀 키르케가 손가락을 자신의 눈과 사내의 눈을 번갈아 가리켰다. 어린 집사에게 배운 제스처가 분명했다.
“성 안에 숨어있는 머미가 더 있을지 몰라. 어쩌면 머미보다 무서운 괴물이 있을지도 모르고. 호른 경은 여기서 기다리고, 아자르 경, 허풍쟁이, 키르케, 세 사람만 따라와.”
“저는 왜 또...”
호른 경과 허풍쟁이가 동시에 불만을 토했다. 이것도 이심전심인데, 내용이 반대였다.
“이제 다 왔잖아. 그냥 말 좀 들어.”
로벨은 불만을 묵살하고 재탐사를 지시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조명과 밧줄을 챙기고, 유사시를 대비한 건량과 식수를 나누고, 애용하는 무기를 차례로 점검한 후 2층 발코니에 기어올랐다. 처음 머미와 조우한 곳이라 괜히 스산했다.
“불을 밝히시오.”
아자르 경이 부싯돌을 꺼내 그었다. 불똥이 타다닥- 뛰며 솜털에 앉았다. 허풍쟁이가 잽싸게 횃불을 가져다 대었다. 기름을 잔뜩 먹인 새 횃불이라 금방 불이 붙었다.
로벨은 랜턴에 남은 기름을 확인한 후 불씨를 받았다. 여분의 기름 주머니가 있지만 불이 꺼질 때까지 머물 생각은 없었다.
“그럼 앞장서겠소. 키르케, 바짝 붙어서 따라와.”
기사와 마녀와 용병이 천 년의 시간 속으로 스며들었다. 호른 경이 평소 소원하던 옛 신을 초청해 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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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 탐사는 하루를 넘기며 준비한 것치고 평온했다.
걱정한 것과 달리 더 이상 괴물은 나오지 않았다. 천장이 주저앉거나 내벽이 허물어진 곳이 종종 있지만 못 지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동네 마실처럼 즐겁지는 않았다.
건물 형태가 문제였다. 40~45도로 기운 바닥에 엉망으로 망가진 잔해가 깔려서 발 딛음이 안 좋았다. 진입 가능한 방을 찾아 수색할 때는 암벽 타듯 기어가야만 했다.
“아우! 먼지! 먼지가 너무 많아요!”
“정확히 말하면, 먼지‘만’ 많아.”
첫 번째 방은 부서지기 직전의 책걸상만 있는 빈방이었고, 두 번째 방은 난장판으로 변한 서고였다. 교회에서 고어로 된 기록물을 비싸게 사들인다는 이야기를 기억해 기쁘게 잔해를 뒤적였는데 소득이 없었다. 손을 대자마자 바스러지는 갈대 종이(papyrus)뿐이었다. 워낙 싸구려 재질인데다 관리가 전혀 안 되어 내용은 고사하고 형태조차 보존하기 힘들었다. 로벨과 허풍쟁이가 장탄식하자 마녀 키르케가 위로했다.
“이건 가져가도 가치가 없을 거예요. 중요한 기록이면 고급 양피지를 썼을 테니까요.”
아자르 경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박수쳤다.
“그거 나 안다. 우화에 나오지. 여우와 포도인가? 이것은 신 포도일 것이다. 맞습니까?”
어휘력은 늘었는데, 눈치가 전혀 늘지 않았다. 허풍쟁이가 조그맣게 욕했다.
“저 나으리는 말 못 할 때가 더 좋았습니다요.”
세 번째 방은 천장이 주저앉아 들어 갈 수 없었다. 로벨 일행은 서로의 손을 잡아주며 3층으로 올라갔다. 허풍쟁이가 묵은 먼지에 재채기하며 새로운 문제를 제시했다.
“병영 시설인데 병사가 쓸 무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시대가 달라도 성주인 로벨이 답을 찾았다.
“저긴 2층이잖아. 군사시설은 1층에 있겠지.”
고대 왕국 병사의 무기와 갑옷을 가질 수 있다고 좋아한 허풍쟁이가 실망했다. 그래봐야 녹이 잔뜩 슨 잡철 무기일 테지만, 신 포도 소리 때문에 위로하지 않았다.
“4층까지 조사하려면 서둘러야겠습니다요.”
“응. 비싼 것은 꼭대기에 있을 거야.”
성주, 혹은 요새 지휘관의 숙소가 있을 것이다. 물욕이 없는 로벨도 고대 왕국 양식의 보물을 기대했다. 그 기대는 차고 넘치게 충족되었다.
“앗! 보물 상자다!”
“이런 곳에 무슨 보물... 상자닷!”
3층 첫 번째 방에서 바로 성과가 나왔다. 기울어진 바닥에도 꿈쩍하지 않고 자리 잡은 청동 상자가 있었다. 현대에도 비싸지만 고대에는 더 비쌌을 청동이었다. 크기와 모양은 재질 이상으로 화려했다. 얼핏 보이는 테두리를 따라 용, 구름, 병사, 파도 등이 새겨져 있었다. 누가 봐도 진짜 보물 상자였다.
허풍쟁이가 아득바득 기어가서 상자 뚜껑의 먼지를 쓸어냈다. 매끈한 표면에 음각된 문자가 있었다.
“어... 음... 에이... 엘...”
마녀 키르케가 까막눈 허풍쟁이를 밀어내고 소리 내어 읽으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나 맥없이 토해냈다.
“고대어에요.”
이윽고 유일하게 고대어를 읽을 줄 아는 로벨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로벨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그게 사실...”
이실직고 고백하면, 로벨이 아는 고대어는 기사 소설에서 읽은 문구 몇 개가 전부였다. 어릴 적 가정교사에게 고대어 수업을 받긴 했는데, 모두가 짐작하듯 어린 로벨은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그냥 열어볼깝쇼?”
“앗! 함정이면 어떡해요? 고대 왕국의 저주가 짜잔~!”
“공왕 폐하! 냉큼 부탁드립니다요!”
보물 상자는 성채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공성용 망치를 동원하면 깨부술 수 있겠지만, 정상적으로 가져 나가려면 어찌 됐든 내용물을 꺼내야 했다. 결국 고대어 읽어야 했다. 자존심을 지키려면 읽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로벨이 마른침을 삼키고 보물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어라?”
그런데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읽을 수 있었다.
불성실한 기사 가문 영애는 불가능하지만, 기사 소설을 좋아하는 ‘로벨 로드릭’은 읽을 수 있었다.
“Calix...”
“예? 뭐라굽쇼?”
“그게 무슨 뜻이에요?”
로벨이 진짜 고대어를 알자 마녀와 용병이 활짝 웃었다. 아자르 경조차 ‘어이어이, 믿고 있었다고!’ 같은 이상한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나 로벨의 표정은 심각했다.
“Calix는 Chalice야. 우리말로 하면... Saint Graal... 그러니까...”
마녀 키르케가 먼저 경악하고, 허풍쟁이가 뒤따라 경악했다. 유라피아 대륙 문화에 아직 어두운 아자르 경만 의아했다. 로벨이 차분히 말을 맺었다.
“옛 신의 성배(聖杯)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