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29화 (529/605)

529화. 보루

로벨은 흐룬팅을 뽑아 하단세로 ‘무엇이든 쳐낼’ 자세를 취했다. 랜턴이 요동치며 그림자가 마구 흔들렸다. 흡사 지옥에서 악마가 올라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고, 공왕 폐하? 무슨 일이...?!”

밧줄을 반쯤 내려온 허풍쟁이가 소리쳤다. 순간 뛰어내릴지 도로 올라갈지 갈등했다.

“아래쪽에 뭔가 있어! 괴물 같아!”

불빛을 빨아들이는 붉은 안광이 늘어났다. 네 개, 여섯 개, 열 개, 스무 개, 마흔 개... 고대 유적이 새빨간 눈알로 가득 찼다. 로벨은 기합을 지르며 상단세로 바꿨다. 인지의 세계에서 벼려낸 마법검은 괴물을 잡는데 특효였다. 위로 올라오면 바로 베어버릴 작정이었다.

“와라! 괴물아!”

삐이이이익-

푸드드득- 푸드득-

로벨의 시비에 괴물들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마을 근처 으슥한 곳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괴물이라 금방 정체를 알았다.

“어... 박쥐입니다요?”

햇님을 피해 단잠을 자던 박쥐들이 무단침입에 불만을 토로하며 흩어졌다. 그리고 패기 넘치는 자세의 로벨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무 말 하지 마.”

왕의 명령이라도 이것은 못 참았다.

“크흠! 크흐음! 엄청난 괴물이 아니라 다행입니다요.”

“...하지 말라니까.”

로벨이 째려보고 흐룬팅을 칼집에 넣었다. 그 사이 허풍쟁이와 과묵한 몬트가 모두 내려왔다. 랜턴 덮개를 열어 불씨를 나눴다. 조명이 늘어나자 지하가 한층 밝아졌다.

“우와우- 정말 깊군요?”

“처음 들어온 아자르 경의 부하도 이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째서?”

“아마도... 무서우니까요?”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처음 본 동굴을 헤집고 다니는 동화 주인공이 비정상이었다. 곰 나오면 어쩌려고.

“막힌 곳이 없으면 좋겠는데...”

로벨은 발아래를 비추며 천천히 걸음을 뗐었다. 몸무게, 아니, 갑옷 무게를 못 이겨 갑자기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러나 유라피아 대륙을 통일한 고대 왕국인의 기술은 상상 이상이었다. 천년 동안 방치된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튼튼했다. 세 사람의 무게는 물론이고, 오래전 쏟아진 토사조차 완전히 버티고 있었다.

“여기 문이 있어.”

2~3층 높이를 내려가자 갈림길이 나왔다. 정확히는 보루 옆에 뚫린 작은 쪽문을 찾았다.

“이쪽이 동쪽이지?”

“글쎄요? 아마 그럴 겁니다요.”

나선 계단을 빙글빙글 돌며 내려와 방향감각이 없었다.

“이쪽으로 갈까? 아니면 계속 내려갈까?”

“어차피 다 갈 거잖습니까요. 내려갔다가 올라오기 싫으니까 이쪽부터 가시죠.”

“오? 똑똑한데?”

로벨 일행은 본디 돌출 회랑(Machicolation)이었을 작은 통로로 들어갔다. 그러나 20야드를 안 가 허풍쟁이를 비난했다.

“뭐야, 막혔잖아?”

“하여간 허풍쟁이...”

“맞아. 허풍쟁이 탓이야.”

허풍쟁이가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나 좁고 어두워서 편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몇 가지 정보가 생겼다. 호른 경이 추리했듯 절벽이 무너져 성을 파묻었다. 가장 튼튼한 성문 보루는 자연의 공격을 버텼지만, 성벽 위의 빈약한 시설은 전부 파괴되고 쓸려갔다.

“아래쪽도 별 볼 일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럼 어린 집사가 슬퍼할 텐데...”

로벨 일행은 다시 갈림길로 돌아갔다. 순서가 바뀌어 과묵한 몬트가 선두가 되었다.

그곳에서 3층 높이를 빙글빙글 돌자 지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했다. 천 년 전에는 지상이었던 곳이다.

“공왕 폐하.”

과묵한 몬트가 횃불을 높이 들었다. 주위가 확- 밝아지면서 건들면 바스러지는 쓰레기와 박쥐 똥으로 추정되는 오물이 드러났다. 그러나 더러운 것을 보라고 횃불을 든 것이 아니었다.

“이쪽에 입구가 있습니다.”

“으하핫! 입구가 아니라 출구겠지!”

허풍쟁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시비를 걸었다. 목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어라? 이번에는 꽤 깊은뎁쇼?”

“...먼저 가.”

과묵한 몬트는 충직했다. 머뭇거림 없이 보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어때? 길이 있어? 없어? 왜 말을 안 해? 죽었어? 진짜 죽었나?”

허풍쟁이가 답답해서 따라 나갔다. 그리고 역시 조용해졌다. 이쯤 되자 호기심이 대뇌를 맹렬히 흔들었다. 로벨은 잰걸음으로 수행원을 쫓아갔다. 그리고 그들의 침묵을 이해했다. 천장이 있는 거대한 공동(空洞)이 일행을 반겼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성 안마당일 것이다. 평시에는 연병장으로 쓰고, 전시에는 바리게이트를 쌓아 2차 방어선으로 삼는 곳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거대한 지하 광장이었다.

“성채(城砦)가... 저거 성채 맞지?”

횃불의 강렬한 조명도 전부 비추지 못하지만, 간신히 빛이 닿는 곳을 이어 추측건대 성채가 원형 그대로 쓰러지면서 성벽에 기대 거대한 지하 공간을 만들어냈다. 건물이 얼마나 튼튼하면 이게 가능한지 놀랍고 신기했다. 고대인의 기술과 자연, 그리고 천년의 세월이 빚어낸 장관이었다.

“꼭... 신화 속의 난쟁이가 사는 곳 같습니다.”

과묵한 몬트가 이리 말할 정도니 입 발린 묘사가 필요 없었다.

로벨 일행은 불빛을 이리저리 돌리며 주위를 걸었다. 위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성이었다. 늑대성과 비교한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물론, 편안하고 아늑하기로는 늑대성만한 곳이 없었다.

“이 정도 넓이면 우리는 점심 먹기 전부터 성 위에 있었군요.”

“...혹시 모르니까 한곳에 모여 있지 말라고 하자.”

공동을 반쯤 돌았을 때 성채 입구를 찾았다. 성이 똑바로 서 있던 시절에는 2층 발코니였을 장소였다. 세월을 건너뛰어 상상하면, 성주-귀족인지 군인인지 모르지만-가 병사들을 굽어보며 군사작전을 지시했을 장소였다.

허풍쟁이가 횃불을 들이밀고 기웃거렸다.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다요.”

“정말? 잘 됐어!”

관광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고향 친구를 위해서 금이든 은이든 주워가야 했다. 로벨은 과묵한 몬트에게 랜턴을 맡기고 발코니에 올랐다. 난간은 진작 박살이 나서 경사만 조심하면 쉬웠다.

“이제 줘.”

창문을 뛰어넘은 뒤 손을 뻗어 횃불과 랜턴을 받았다. 두 용병이 낑낑거리며 올라오는 동안 성 안을 잠시 살폈다. 천장을 지탱하는 아치형 기둥과 세밀하게 음각된 벽면 문양이 과연 고대 왕국이었다. 이런 멋진 곳이면 금은보화로 된 조각상이 있을 것이다. 그 증거로 복도 저 편에 번쩍이는 구슬이 있었다. 횃불 때문에 빛나는 것 같은데 꼭 눈동자 같았다. 아니, 눈동자가 맞았다. 방금 깜박였다.

“조심해! 괴물이야!”

로벨은 횃불을 앞으로 던지고 흐룬팅을 뽑았다. 기름이 가득 든 랜턴은 던질 수 없으니 현명한 판단이었다. 고용주의 긴박한 외침에도 수행원은 시큰둥했다.

“또 박쥐입니까요?”

“폐하, 불을 던지면 곤란합니다.”

양치기 소년이 사는 마을 주민도 두 번은 속아주었는데, 이 영악한 용병들은 한 번 속았다고 불신이 가득했다.

“이번에는 진짜야!”

붉은 눈동자가 좌우로 조금씩 흔들렸다. 그리고 앗! 하는 순간 몇 배로 확대되었다. 육포처럼 바짝 마른 피부와 눈알, 그리고 지독한 악취가 다가왔다. 로벨은 21년 동안 체화한 본능으로 흐룬팅을 휘둘렀다. 비좁은 공간과 부실한 조명은 문제 되지 않았다. 칼끝이 갈 지(之) 모양으로 치고 나가며 괴물의 목을 잘랐다. 늑대의 왕과 비견되는 괴력에 명검 흐룬팅이 더해져 깔끔히 잘라냈다.

통- 통- 데구르르-

머리통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구르고 뒤이어 몸뚱이가 쓰러졌다. 속이 텅 빈 듯 가벼웠다.

“구울? 아니, 머미인가?”

페리 행정관의 예언이 맞았다. 고대 유적에 진짜 괴물이 있었다. 간신히 창문을 넘어온 허풍쟁이가 잘린 머리통을 보고 기겁했다.

“우왁! 진짜 괴물이다!”

“내가 말했잖아!”

“진정성 없게 말씀하셨잖습니까요!”

“난 항상 진지해! 진짜야!”

왕과 수행원이 유치하게 말싸움했다. 10년 동안 따라다니다 보니 간이 많이 커졌다. 과묵한 몬트가 중재했다. 왕에 대한 예의 때문은 아니었다.

“괴물이 하나가 아니면... 목소리를 낮춰야 하지 않습니까?”

지당한 충고지만, 조금 늦은 충고였다. 2층 복도 좌우에서 괴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폐가 찢어진 듯한 신음소리, 질질 끄는 발소리, 썩은 내와 비린내는 덤이었다.

“이거 좀 익숙한데? 예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지?”

그때는 바다였지만, 지금은 지하였다. 그래도 결론은 비슷했다.

“도망가자!”

“보물은 어쩌고요?”

“그건 나중에 찾아!”

로벨 일행은 애써 넘어온 발코니를 도로 내려갔다. 그 과정이 다소 소란스러웠다. 그것이 못마땅한 듯 더욱 많은 머미가 나타났다. 3층, 4층 창문에서도 나타나 지면으로 몸을 던졌다. 머미에 깔릴 뻔한 허풍쟁이가 된소리로 된 욕을 했다. 이럴 때는 과묵한 친구가 좋았다.

“역시 펄프 대장을 보내야 했습니다요!”

“그래도 젊은 우리가 나아! 다 왔어!”

조명이 부실해서 잔해를 밟고 여러 번 비틀거렸다. 그 사이 머미 한 마리가 발뒤꿈치까지 쫓아왔다. 뼈 밖에 없는 괴물이 왜 이리 빠르진 의문이었다.

‘가벼워서 빠른가?’

로벨은 몸을 한 바퀴 돌리며 흐룬팅을 뿌렸다. 수평으로 한번, 사선으로 한번, 랜턴이 요동칠 때마다 조각 난 머미가 나뒹굴었다.

“헷! 별거 없어!”

그리고 기쁘게 랜턴을 들었다. 공동 안에 머미가 가득했다. 30마리, 50마리, 지금 나오는 놈들까지 합치면 100마리도 거뜬했다.

“취소! 취소할게!”

로벨은 허리가 잘린 머미를 발로 차 진로를 방해한 후 먼저 올라간 허풍쟁이를 쫓았다. 긴긴 세월도 썩지 않고 남은 게 괘씸했다. 하여 악당 같은 소리를 남겼다.

“두고 보자! 다시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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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탐사의 성과는 가능성과 위험이었다.

둘 중 하나만 있으면 결론이 쉬운데, 둘 다 있어서 마찰을 빚었다. 괴물이 지키는 곳이니 비싼 보물이 있을 거란 아자르 경의 탐욕파와 위험하니 매장하자는 호른 경의 안전파가 싸웠다. 그래봐야 결정권은 로벨에게 있었다.

“숫자는 많지만 부실해. 크고 강한 무기를 챙겨 가면 쉽게 토벌할 수 있어.”

직접 싸워본 사람의 말인데 신뢰가 가지 않았다. 로벨 기준에서 약한 게 보편상식에서 약한 것과 동일한지 알 수 없었다.

“걱정 마. 나랑 아자르 경이 앞장설 테니까.”

그랜드 챔피언 급이 직접 나선다고 하자 조금 진정되었다. 허풍쟁이 특유의 허풍도 크게 작용했다. 저녁 먹고 잠자리를 준비할 때쯤에는 지하 공동이 황금의 성 비슷하게 탈바꿈되었다. 로벨이 번복해서 집에 가자고 하면 반란을 일으키거나 몰래 찾아와 파낼 정도가 되었다.

정보가 생긴 만큼 준비도 철저했다. 우선 밧줄을 꼬아 줄사다리를 만들었다. 오르고 내리는데 시간이 적게 걸리니 퇴각을 해도 무리해서 시간을 벌 필요 없었다.

횃불도 넉넉하게 만들고, 머리통을 부수기 좋은 둔기류로 무장했다. 일격에 목을 자르는 것은 날붙이에 익숙한 기사가 아니면 힘들었다.

“머미가 마당으로 나왔으니까 보루에서 싸워야 해. 중간에 샛길이 하나 있으니 그곳에 물자를 옮기고...”

로벨이 그림을 그리며 작전을 설명했다. 호른 경은 끝내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그 외 나머지는 쉽게 이해했다. 아자르 경이 농담처럼 말했다.

“이것이 최후의 보루란 겁니까. 빈틈 없이 이해했습니다.”

“아... 비슷하오.”

고대의 괴물보다 말을 잘하는 아자르 경이 익숙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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