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26화 (526/605)

526화. 꿀벌

어느 영지나 가을 추수 전후에 사냥을 한 번씩 한다. 겨울에 쓸 가죽과 식량을 장만하는 동시에 굶주린 맹수가 민가를 습격하지 못하게 객체수를 줄여두기 위함이다. 뱀의 계곡 신생 영주 나마르 아자르 경도 그러했다.

한 뼘짜리 텃밭에서 수확한 작물과 기름기 빠진 연어로는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고자 젊은 사내를 모아 계곡 깊은 곳으로 사냥을 나갔다.

계곡 지리에 익숙지 않은 탓일까, 숙련된 마을 사내가 전부 전사한 탓일까, 초보 사냥꾼들은 엉뚱한 곳을 헤집고 다니다가 뜻밖의 장소를 발견했다.

“고대 왕국의 유적이라고요?”

고대 왕국은 천 년 전에 사라진 라둔족의 나라였다. 천문, 지리, 건축, 문학, 예술 등이 극도로 발달하여 세계 각지에 기상천외한 흔적을 많이 남겼다.

“그거 부정한 거 아니야?”

“무슨 말씀을? 그 반대에요!”

역사를 풍문으로 배운 사람은 고대 왕국이 옛 신의 존재를 부정하여 천벌을 받았노라 말하지만, 옛 신은 고대 왕국 시절에 이미 국교였고, 오히려 옛 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야만인’ 겔몬족에게 멸망했다. 이후 수백 년간 혼란의 시기가 이어지다가 알비니티 본드와 샘 포클 같은 영웅이 등장해 간신히 질서를 회복했다.

“고대 왕국은 북쪽 잉그비아 섬부터 남쪽 모래의 땅까지 유라피아 대륙 전체를 지배했어요. 그들이 지은 요새와 도로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으니 말 다 했죠.”

지금 에르나 왕국에서 퍼지는 복고주의, 인문학 열풍도 고대 왕국을 모티브로 하고 있었다. 정작 에르나 왕국에서 공부하고 온 페리 행정관은 조용한데, 포비아 왕국을 떠나본 적 없는 어린 집사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고대 왕국 유적이라고 전부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천 년이나 유지된 건물이 마구간 같은 평범한 것은 아니겠지만...”

“가만있자, 여기 아자르 경이 쓴 편지가 있어요.”

“아자르 경은 글을 모르는데?”

“서기가 대필했겠죠. 서기도 없으려나? 아무튼 글 아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요?”

과연, 외해 출신 기사가 썼다고 믿기지 않는 아기자기한 글씨의 편지였다. 그림에 가까운 서명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여자인가?’ 늑대성 식구가 동시에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지면에 쌓인 돌무더기는 별 볼 일 없습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짐승 굴인 줄 알았으나 영주님의... 짝대기 두 줄 긋고, 나의 괴력으로 바위를 들어 올려 큰 계단을 찾았습니다.”

“뭐야... 글이 좀 이상한데?”

“그래도 문장은 맞게 썼어요. 이만하면 훌륭하죠.”

아자르 경의 이상한 화법(話法)을 생각하면 받아 쓴 것만도 대단했다. 어린 집사는 두 장 반이나 되는 내용을 쭉쭉 읽어갔다. 쓸데없는 상황 묘사가 많은데, 요약하면 인적 드문 계곡에 성이나 요새가 묻혀있다는 내용이었다. 로벨이 팔짱을 끼고 턱을 만졌다.

“역시...”

마녀 키르케가 힐끔 보고 똑같이 따라 했다.

“역시 그렇죠?”

“그래. 맞아.”

의미심장한 눈빛이 교차했다. 얼핏 같은 생각 같지만, 전혀 다른 생각 중이었다.

“고대 왕국의 보물이 분명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분명해요!”

“응?”

“어어어?”

마녀 키르케는 아자르 경에 대한-편지에서는 ‘나’로 표기되었지만-행동묘사가 세세한 것이 대필자의 사랑이 분명하다 주장했으나, 사람 말을 말 같지 않게 듣는 아야와 이야카 외에는 관심주지 않았다.

어린 집사, 페리 행정관, 펄프 대장, 그리고 편지를 가져온 허풍쟁이는 한쪽 귀를 닫은 채 자기들끼리 의논했다.

“고대 왕국의 유물이 페닝이 되나요?”

“고대 왕국 금화는 같은 무게의 페닝보다 3배 이상 비싸게 거래됩니다.”

속물적인 용병 패거리가 감탄했다. 페리 행정관이 웃으며 꿈과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그림과 조각은 자유 도시의 거부들이 거금으로 구매하고, 고어(古語)로 된 기록물은 교회에서 부르는 값으로 사가지요.”

“공왕 폐하! 제가 계곡에 다녀오겠습니다!”

“어허? 다 늙어서 어딜 가쇼? 제가 가겠습니다요!”

꿈이 싹 텄으니 적절하게 가지를 쳤다.

“그러나 버려진 요새라면 가치 있는 것이 많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구울이나 머미(Mummy) 같은 괴물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 한 살이라도 젊은 네가 다녀와라.”

“아니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대장한테 양보하겠수.”

용병들이 서로 겸양하자 순진한 기사가 냉큼 주워 먹었다.

“그럼 내가 갔다 올게.”

“안 돼요! 어딜 가요!”

어린 집사가 펄쩍 뛰었다. 그러나 말리기에 이미 늦었다. 로벨의 두 눈이 샛별처럼 빛났다.

“아자르 경이 편지를 보낸 이유가 뭐겠어? 도와달라는 거잖아.”

“공왕 폐하가 ‘직접’ 도울 필요는 없죠! 그리고 유적이잖아요? 전문가가 가야죠!”

“이런 것도 전문가가 있어?”

“그... 뭐냐... 역사학자 같은 사람이요!”

“로드릭 시티에 역사학자가 어디 있어? 그리고 나도 반짝이는 것만 보물이 아니란 것은 알아. 값나가는 거 찾아올게.”

로벨은 관심 가지는 것이 많지 않았다. 끽해야 무기, 갑옷, 말, 호른 경 정도일까. 그러나 한 번 관심을 가지면 양보가 없었다. 지금 관심 대상에 고대 왕국 유적이 추가되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설전을 벌이자 늑대성에 파벌이 생겼다. 공국을 통치는 권력자들의 파벌이라 하면 짐짓 심각한데, 내용은 다소 유치했다.

‘공왕 폐하가 가시면 허풍쟁이를 데려가겠지. 공왕 폐하, 힘내십시오.’

‘제발! 집사 양반! 저 폐하 좀 말려주소! 행정관 나으리도 웃지만 말고 말려보쇼!’

왕당파와 집사파의 갈등은 결국 떼쓰기와 삐진 척으로 승부가 났다. 무적무패 왕의 위대한 승리였다.

“진짜 추수제 전까지 돌아와야 해요! 진짜요! 지금 약속해요!”

“응. 응. 약속할게.”

“땅 속은 위험하니까 무조건 허풍쟁이를 앞세우세요! 버리고 와도 괜찮아요!”

“거... 대놓고 섭섭하게... 그리고 본인이 가는 것은 묻지도 않고 확정이오?”

로벨은 기사 소설에서 반드시 한번은 등장하는 고대 유물 찾기-주로 성검이나 성배 찾기-에 참가하게 되어 신이 났다. 전쟁에서 잠시 벗어난 평화로운 가을이라 가능한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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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대, 혹은 보물탐사대는 소규모로 꾸려졌다.

뱀의 계곡까지는 로벨의 영토라 적대적인 군사집단이 없고, 조사에 필요한 장비와 인력은 현지에서 조달 가능하니 두 자릿수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로벨, 마녀 키르케, 외팔이 더치, 허풍쟁이 제이콥, 과묵한 몬트, 피리 부는 장, 그리고 헐레벌떡 달려온 호른 경까지 7명이 전부였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군요. 제 벗인 소피가 나무옹이에 조약돌을 숨겨두고 보물지도에 그리고 했지요.”

꼬마 호른 경과 자작나무 요정의 모험은 할 일 없는 로벨 말고 귀 기울이지 않았다. 호위 겸 짐꾼 겸 길잡이 겸 말구종인 용병들은 수레에 짐을 쌓느라 바빴다.

귀하신 분을 맨땅에 재울 수 없으니 간이 천막을 챙기고, 비스킷만 씹으면 이빨 아프니 조리도구를 챙기고, 침대로 쓰이다가 모닝스타의 비상식량으로 사라질 건초더미를 쌓고, 랜턴 기름, 의자, 다용도 밧줄, 수통, 부싯깃 등등을 꼼꼼하게 담으니 커다란 수레가 가득 찼다.

“마지막은 저요!”

마녀 키르케가 수레 끝자락에 앉았다. 짐말이 새끼 잃은 소처럼 울부짖었다.

“거, 내려오소. 갈 길이 먼데 벌써부터 게으름이오?”

허풍쟁이가 타박하고 수레를 꽁꽁 묶었다. 어째 숙련된 짐꾼의 냄새가 났다.

“저기, 호른 경?”

어린 집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호른 경은 추억에서 깨어나 까탈스러운 연인의 동생을 보았다.

“일단 와주셔서 감사해요. 경이 없는 동안 로드릭 항은 제가 신경 쓸게요. 그리고 음...”

어린 집사답지 않게 말꼬리가 길었다. 로벨이 스커트를 텅텅 두드리자 반사적으로 말했다

“우리 폐하를 잘 부탁해요. 경 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요.”

어리둥절함은 잠깐이고, 점차 표정이 밝아졌다. 호른 경이 가슴에 주먹을 붙이고 말했다.

“이 심장에 걸고 약속하지. 목숨을 바쳐 ‘우리의’ 폐하를 지키겠다.”

예비 처가에서 결혼 승낙을 받은 기사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착각이 아니었다. 오랜 불신과 미련을 깨고 마침내 로벨의 연인으로 인정받았다.

“나, 나? 난 지킬 필요 없는데... 칼도 있고, 갑옷도 입었고...”

두 남자가 뜨거운 시선을 나누는데, 정작 당사자는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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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아침 해를 등지고 서쪽으로 출발했다.

공왕가의 깃발을 알아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길을 비켜주어 성문까지 막힘이 없었다. 으르릉거리며 배웅하는 아야와 이야카가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어린 집사 말 잘 듣고, 아무나 깨물지 말고, 낮잠은 세 시간씩 꼬박꼬박 자고...”

마녀 키르케가 한 번씩 안아 주자 그제야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영리한 늑대들이었다. 로벨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저 녀석들 덕분에 키르케를 만났지.”

새삼스럽지만 오래된 인연이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외팔이만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급적 마을에서 쉴 수 있게 일정을 짰습니다. 오전에 조금 속도를 내겠습니다.”

호른 경이 현실로 소외감을 덜었다. 지나간 시간보다 함께할 시간이 많으니 아쉽지 않았다. 로벨이 모처럼 미소지었다.

“경에게 맡기겠소. 출발하시오.”

로벨의 여정은 시절을 가리지 않지만, 겨울보다는 봄, 여름보다는 가을일 때가 좀 더 많았다. 날씨가 좋고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억? 꿀벌이다!”

모닝스타가 붕붕- 거리며 날아다니는 벌을 유심히 보다가 왕! 하고 삼켰다. 입맛을 다지는 것이 먹을 만한 모양이다. 허풍쟁이가 낄낄거리며 물었다.

“가까운 곳에 벌집이 있는 모양입니다요. 따라가 볼까요?”

설탕이 귀한 농민에게 꿀은 최고의 간식이었다. 외팔이 더치와 피리 부는 장이 군침을 삼켰다. 그러나 고귀한 기사들 생각은 달랐다.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계속 가라.”

하루나 이틀쯤 늦는다고 뭐라 할 사람 없지만, 혀가 둔해 미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로벨과 로벨의 안전에 민감한 호른 경은 허락하지 않았다. 용병들은 시무룩해져서 걸음을 옮겼다. 헌데, 꿀에 대한 아쉬움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이른 저녁에 찾은 농가에서 벌집을 채집하고 있었다.

“저거 우리가 사자.”

“오오! 정말입니까요?”

로벨이 주머니에서 은화 한 닢을 꺼냈다. 벌꿀 값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저, 공왕 폐하, 이걸로는 좀...”

로벨이 무안해하기 전에 호른 경이 나섰다.

“폐하의 땅에서 난 것은 전부 폐하의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당장 가서 꿀을 징수해라!”

로벨은 그제야 페닝이 모자란 것을 알았지만, 호른 경의 질타에 깜짝 놀란 피리 부는 장이 농가로 뛰어간 뒤였다.

“아니, 가격을 물어보고 다시 사는...”

입 아프게 물어볼 필요 없었다. 아무튼 1페닝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농가 주민 중 하나가 몸으로 그 사실을 일러주었다. 건장한 체구의 장이 거짓말 없이 3피트쯤 떠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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