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25화 (525/605)

525화. 소식

어린아이처럼 계단을 뛰어내리고 메인 홀을 가로질러서 성문을 활짝 열었다.

신발을 항시 신고 사는 문화라 망정이지, 극동의 어느 나라였으면 남사스럽게 맨발로 마중 나갔을 것이다.

“호킨 페럿 경!”

아성 앞에 기사 일행이 모여 있었다. 익숙한 얼굴의 전직 포로가 기사 종자와 하인 셋을 데리고 온 것이다. 기사 종자가 앞으로 나서 에르나 왕국 특유의 늘어지는 억양으로 모시는 기사를 소개했다.

“위대한 페럿 가문의 주인이자 에르나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이자 백인(百人)을 베는 기사이자 동부 요새의 사령관이자...”

호킨 페럿 경이 말에서 내려 기사 종자를 지나쳤다. 기사 종자는 주인의 돌발행동에 당황해서 혀를 씹었다.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됐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술 마시러 왔소.”

형제는 형제였다. 전(前) 그랜드 챔피언 그렉 페럿 경을 닮은 미소로 말했다.

“그때 그 약속대로.”

로벨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서 오시오. 진심으로 환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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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의 긴급호출을 받은 성 밖 아낙네들은 연회를 너무 자주 한다고 기분 좋게 투덜거렸다. 연회가 끝나면 남은 음식을 싸갈 수 있으니 마음에 없는 불평이었다.

아침에 구운 하얀 빵과 여름에 담근 리암 수사표 맥주와 푹 숙성된 치즈와 과일주, 양치기에 밉보인 말썽쟁이 새끼양과 달걀을 적게 낳는다고 구박받는 가엾은 암탉을 싸들고 늑대성 주방에 입성했다.

로벨과 호킨 페럿 경은 고기가 구워지는 동안 맥주로 위장을 달랬다. 더불어 지나간 세월도 달랬다.

“고향의 일은 잘 해결되었소?”

“흠. 시작부터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내시는군.”

로벨은 사과하지 않았다. 고급스러운 갑옷, 윤기 나는 전투마, 꼽슬거리는 금발의 기사 종자로 답을 짐작했다.

“가문의 치부를 밝힐 수 없으니 본인의 정당한 권리를 지켰노라 말하겠소.”

주인 없는 페럿 가문을 탐낸 자들을 혼내주었다는 뜻이리라. 로벨은 술잔을 들어 축하했고, 호킨 페럿 경은 쑥스럽게 응답했다. 잔 밑이 하늘로 올라가고, 목울대가 요란하게 꿈틀거렸다. 꼴깍- 꼴깍- 캬하아-

한 잔, 두 잔, 그리고 세 잔 비우고 나니 핑- 도는 머리와 별개로 심장이 가라앉았다. 이쯤에서 할 말을 해야 했다.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다고 말한 것은 본인이지만...”

로벨은 성인이 된지 얼마 안 된 곱슬머리 기사 종자를 힐끔 보았다. 가난한 농민은 머리카락을 기르지 않으니 필히 후계자 교육을 받는 기사 가문의 장남일 것이다.

과거 로벨에게 자신의 후계자를 종자로 받아 달라 요청한 가문들을 생각하면 호킨 페럿 경의 현재 입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가문과 가문이 뒤얽힌 복잡한 정치세계에 발을 디딘 것이다.

“...정말 술이 먹고 싶어서 먼 길을 온 것은 아닐 테고, 공적인 방문이오?”

기사 종자가 움찔했다. 벗이니 뭐니 실컷 떠들어놓고 사실은 공무 때문에 왔다 말하면 화낼 것 같았다. 허나, 로벨은 그렇게 속이 좁지 않았다.

“최근에 리처드 2세와 싸운 것을 알고 왔소.”

“그쪽까지 소문이 났소? 하긴, 벌써 가을이니 소식이 전해졌겠군.”

로벨은 빈 잔을 채운 후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호킨 페럿 경은 남은 잔을 깔끔히 비운 후 말했다.

“국왕 폐하와 궁정 귀족들은 신이 났소. 골칫거리 두 나라가 치고박고 싸우니 좋을 수밖에 없지.”

“으으음... 그게 당연하지만... 왠지 밉살스럽군.”

“이해하시오. 너무 좋은 나머지 이참에 하나를 치우자는 말까지 하고 있으니.”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주석잔이 손가락 모양으로 찌그러졌다. 유리나 나무잔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것을 본인에게 전하는 것은, 치우기로 결정한 것이 이쪽이 아닌 모양이오.”

어린 집사나 마녀 키르케가 들었으면 화들짝 놀랐을 것이다. ‘세상에! 우리 폐하가 이렇게 똑똑하다니!’ 흔한 오해와 달리 로벨은 멍청하지 않았다. 전(戰)자로 시작하는 분야에서는 오히려 천재라 할 수 있었다.

“한 다리 건너야 하는 볼탄 반도보다 외해 식민지를 두고 다투는 잉그비아 왕국이 거슬리는 것은 당연하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공왕은 본국에 별 위협이 되지 않소.”

로벨의 무명이 높다고 하나 국경을 몇 개씩 넘나들며 싸울 만큼 비상식적이진 않았다. 육로로는 포클랜드와 검은 숲을 넘어야 하고, 바다로는 인어해 최강이라 불리는 에르나 왕국 함대를 가라앉혀야 겨우 닿았다. 에르나 왕국은 앞서 로벨이 상정했듯 ‘먼 나라’였다.

“...불쾌한 말이오.”

로벨이 중얼거리자 기사 종자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느 가문인지 몰라도 부친이 좋아할 것이다. 후계자 교육을 톡톡히 받아 갔다.

“...하지만 화내지 않을 것이오. 경도 그걸 알고 솔직히 말했겠지.”

“공왕의 성품을 잘 아니까. 본인이 아는 무적무패 왕은 용기만큼이나 사려가 깊고 갓 벼린 칼날보다 날카로운 지혜를 가졌소.”

이것 역시 어린 집사가 들으면 놀랐을 것이다. ‘우리 폐하가요? 혹시 다른 나라 공왕이랑 착각한 거 아니에요?’ 유라피아 대륙에 공왕이 몇이나 된다고 착각할까. 호킨 페럿 경은 진심이었다.

로벨은 찌그러진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비웠다.

“푸훕-!”

술 넘기는 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기사 종자가 어리둥절해서 쳐다보았다. 잠시 뒤 술잔이 내려가자 근엄한 왕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모양이다.

“경이 그렇게 보았다면, 크흠! 큼! 옳게 보았을 것이오. 지혜, 그 뭐냐, 그런 거 말이오.”

입꼬리가 들썩이는데 수염이 없어서 가려지지 않았다. 수천, 수만의 군사를 단칼에 무찌르고 철혈로 군림하는 위대한 왕 이미지가 살짝 흔들렸다. 로벨의 실체를 아는 호킨 페럿 경은 빙그레 웃었다.

“지금까지 한 말은 에르나 왕국의 저의를 의심하지 말라는 뜻이었소.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이미 본론이 나왔지만, 분명하고 확실하게 단정할 필요가 있었다. 호킨 페럿 경은 취하지 않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 에르나 왕국은 무적무패 왕을 도와 잉그비아 왕국을 혼내주고 싶소. 손을 잡으시겠소?”

지난번에는 거절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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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동맹이라 하면 거창한데, 실제로는 문서화하지 않은 구두 약속이었다. 애초에 합동작전을 할 거리도 아니고, 등을 맡길 만큼 신뢰하지도 않았다. 약속한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첫째. 잉그비아 왕국이 군사행동을 시작하면 양국은 즉각 대응한다. 둘째. 그 과정에서 양국은 군사적, 경제적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는다. 어린 집사가 협상 내용을 전해 듣고 쉽게 풀이했다.

“잉그비아 왕국이 볼탄 반도를 공격할 때 잉그비아 섬을 공격할 건데, 그때 뒤통수치거나 주워 먹지 말라는 거네요.”

“오!”

“뭐가 ‘오!’에요? 그것도 모르고 약속한 거예요?”

“아니, 음, 호킨 페럿 경이잖아? 명예로운 기사니까 친구한테 나쁜 짓은 안 하겠지...”

“으이구! 으이구구! 저렇게 순진해 빠져서 이 험난한 세상을 어찌 살까.”

로벨은 자기가 10살 더 많으며 주종관계의 주(主)란 것을 강조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린 집사가 없으면 오래 못 살 것 같았다.

“그래도 잘했어요. 에르나 왕국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복잡한 협정으로 발목 잡히는 것은 사양해야죠. 잉그비아 섬까지 가서 깃발 꼽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고요. 그래서, 페럿 경은 어디 있나요?”

“예전에 쓰던 방을 줄까 했는데 딸린 식구가 많다고 시내로 나갔어. 지미네 여관을 추천했으니까 거기 있을 거야.”

“에르나 왕국 사절이 온 것을 잉그비아 왕국 대사가 알면 안 좋은데요. 페럿 경은 무슨 요새 사령관이기도 하다면서요?”

“그건 호킨 페럿 경이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우리 입장에서는 동맹 사실이 알려져도 상관없어. 쳐들어오지 못하거나 몇 년 늦출 테니까. 전함을 건조할 시간을 벌잖아.”

“페닝은 못 버니까 문제죠.”

그 문제는 집사에게 오롯이 넘기고 의자등받이에 기대었다. 요 며칠 과음했더니 몸이 피곤... 하진 않은데, 마음이 복잡했다.

“어제 얼마나 마셨지?”

“맥주요? 가만있자, 큰 나무통으로 1개 반 정도?”

로벨은 손가락을 꾸물거리며 계산했다. 약 310파운드였다. 로벨 혼자 마신 것은 아니지만, 하룻밤 잔치치고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과거에는 숙취로 끙끙거린 양이기도 했다.

‘주량이 늘어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로벨이 팔짱 끼고 심각한 표정을 짓자 어린 집사가 반성했다. 페닝이 없다고 너무 쪼아댄 모양이다.

“그 정도는 늑대성 재정에 영향 없어요. 제가 암만 구두쇠여도 손님 접대한 거 가지고 뭐라 할까 봐요? 좀 더 써도 돼요. 아니! 이참에 우리 폐하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으응? 그래도 돼?”

로벨은 뜻밖의 호의에 기뻐했다. 모닝스타의 새 안장과 설탕 간식, 낡은 검대 교체, 사베튼에 부착하는 칼날과 다양도로 쓸 강철 단검 등을 쉴새 없이 주문했고, 기어이 어린 집사의 샤우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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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여름의 긴박한 나날과 달리 가을은 고요히 깊어 갔다.

한 꺼풀 들쳐보면 호수에 뜬 오리처럼 바쁘게 물밑 작업하고 있지만, 수면 위의 광경은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북부대로와 로드릭 항의 상인들로 물가가 안정되고, 전장에서 돌아온 농민들로 가을 작물이 풍성히 맺혔다.

사실 작황은 작년보다 좋지 않았다. 그래도 예년 기준으로 평작은 되었고, 여름에 비축한 귀리와 보리가 있으니 내년 봄까지 버틸 양은 되었다. 그래도 모자란 것은 동부평야 기사들한데 강탈, 아니, 상납 받으면 되었다. 하지만 욕심 많은 집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남쪽 나라에 가져가 팔 수확량이 아니에요.”

“그쪽도 정세가 안정되어서 작년처럼 비싸게 사지 않을 겁니다.”

페리 행정관이 주판알을 모으며 말했다. 시장을 주무르는 헨리 상회장의 아들이라 때때로 로벨보다 소식이 빨랐다.

“정세가 안정돼?”

“아, 예. 모나카 왕국의 푸른 수염-바르브블루-란 자가 수도를 탈환하면서 소강상태에 빠졌다고 합니다. 3년째 싸우고 있으니 더 모을 병사도 없겠지요. 겨울 전에 종전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그쪽도 돌고 돌아 원점이군요. 그럴 거면 대체 왜 싸운 거야?”

남 일이 아니었다. 이쪽도 무의미하게 싸움질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린 집사의 구시렁거림이 계속되었다.

“소금광산도 예전 같지 않고, 해상무역도 신통치 않아요. 몸집은 커졌는데 먹는 것이 부실하니, 이거 원...”

그러면서 로벨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꼬불쳐둔 페닝이 있으면 알아서 내놓으란 거 같았다. 용돈을 받아 무구(武具) 광내는데 전부 쓰는 로벨한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머, 뭔가 수가 있겠지! 항상 그랬잖아?”

“어떻게 항상 그래요. 지금까지 운이 좋았던 거죠.”

어린 집사가 한숨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로드릭 가문의 행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겨울이 가까워지면 기름져서 돌아오는 어느 물고기가 반가운 소식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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