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24화 (524/605)

524화. 검술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가슴 높이를 겨루었다.

검술학회의 고명한 마스터가 아니어도 한눈에 알 수 있는 수비자세였다. 성 베네딕 수도회 소속의 젊은 기사는 코웃음 치고 롱소드를 머리 위로 올렸다.

어느 섬나라 작가의 망상과 달리 가장 빠른 베기는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는 수직베기였다. 그렇기에 몸통을 전부 드러내도 무방비하지 않았다. 어떤 방위로 공격이 들어와도 먼저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력이 비슷할 때 이야기죠.”

어린 집사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대학가 고양이 3년이면 천문학이 어쩌고 하는 속담처럼 다년간 검술지도를 받은 티가 났다.

“수직베기는 ‘베기’ 중에서 가장 빠르거든요.”

로벨은 패기 넘치는 후학에게 작은 가르침을 주기로 하고 오른발을 크게 내디뎠다. 무게 중심이 오른쪽에 쏠리며 어깨와 오른팔이 과하게 앞으로 나왔다. 중단세에서 이어지는 정면 찌르기였다.

3피트 길이 칼날에 최대로 뻗은 어깨+팔길이가 더해지자 창 못지않은 간격이 나왔다. 그것도 매우 정교한 창이었다. 칼끝이 젊은 기사의 미간을 노렸다.

“흡-!”

젊은 기사는 한걸음 물러나 공격을 피하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찌르기는 위력적이지만 빗나갔을 때 치명적이었다. 자세를 회복하는 틈에 간격을 좁혀 머리를 쪼갤 수 있었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이었다. 로벨의 찌르기는 한 번이 아니었다.

로벨은 손목을 비틀어 칼자루를 회수한 후 재차 찌르기를 넣었다. 가느다란 헌팅 소드도 아니고, 날폭이 2.5인치나 되는 롱소드-아론다이트로 펼치는 기예였다. 무게 중심이 앞으로 기운 젊은 기사는 예상치 못한 2차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크윽-!”

걸음마 뗄 때부터 칼질해왔다는 자부심이 거짓은 아니었다. 칼이 날아드는 1초 남짓한 순간에 몸을 비틀어 피했다. 로벨이 뺨만 살짝(?) 찢으려고 빗겨 찌른 덕도 있었다. 연회 중에 시체가 나오면 불쾌하니까.

그래도 승부는 갈렸다. 억지로 몸을 비튼 젊은 기사는 균형을 완전히 잃었고, 로벨이 손대지 않아도 볼썽사납게 빙그르 돌아 자빠졌다. 희극적인 동작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로벨이 건성으로 휙휙- 휘저으니까 젊은 기사 혼자 허우적거리다 넘어진 것처럼 보였다.

맨땅에 엎드린 젊은 기사 얼굴이 시뻘게졌다. 차라리 칼에 맞아 피를 흘렸으면 이렇게 수치스럽지 않을 것이다. 공격 한번 못해보고 제 발에 걸려 쓰러졌다.

“과연 무적무패 왕!”

“롱소드 마스터다운 솜씨요!”

그나마 위안이라면, 이 자리에 모인 기사와 용병은 다년간 칼밥을 먹은 베테랑이란 것이다. 젊은 기사를 비웃기에 앞서 로벨의 칼솜씨를 칭찬했다.

“아직! 아직이오! 아직 안 끝났소! 아직...!”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한 바퀴 돌린 후 거리를 주었다. 젊은 기사는 갑옷 무게 때문인지 수치심 때문인지 다소 굼뜨게 일어났다. 그리고 고집스럽게 상단세를 취했다.

로벨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어린 집사는 쓸데없는 자존심이라고 싫어하지만, 기사가 되고 싶었던 어린 날의 로벨은 ‘쓸데없는 것’을 좋아했다.

“먼저 오시겠소?

“하아압-!”

그렇다고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다. 로벨은 맹렬한 수직베기를 반걸음 돌아 피하고 두꺼운 카우터(Cowter:팔꿈치 보호대)로 턱을 후려쳤다.

글로 쓰고 소리 내어 읽으면 간단하지만, 한걸음에 거리를 지우고 벼락처럼 떨어지는 칼날을 팔꿈치가 닿는 간격에서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었다. 거듭 말하지만 상대 역시 십수 년간 칼을 휘둘러온 전문가였다. 로벨의 눈과 발이 전문가보다 빠를 뿐이었다.

젊은 기사는 턱이 돌아간 충격에 휘청거렸다. 강철 같은 의지로 재빨리 자세를 잡았지만, 이미 결착이 났다. 로벨이 아론다이트를 몸쪽으로 당긴 채 젊은 기사의 목을 겨루고 있었다. 폼으로 위협하는 자세가 아니라 즉각 찌를 수 있는 자세였다. 저항은커녕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본인이... 본인이 졌소. 그랜드 챔피언의 위명을 의심한 점... 사과하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거두고 젊은 기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은 대련이었소. 경의 솜씨도 매우 훌륭하오.”

조롱보다 수치스러운 격려였다. 조롱하면 화가 나지 부끄럽진 않으니까. 로벨은 칼자루를 빙글빙글 돌리며 남은 59명의 기사단원을 보았다. 오랜만에 진검 대련해서인지, 아니면 이제야 술기운이 올라왔는지 흥이 났다.

“이제 좀 몸이 풀리는데, 또 겨룰 사람 없소?”

세속의 기사든 옛 신의 기사든 기본적으로 몸과 기술을 단련하는 외향적인 사람들이었다. 소극적인 기사는 폭력적인 수도사보다 희귀한 존재였다. 자존심과 명예를 한 숟갈씩 넣으면 피를 못 봐 안달 내는 살인광이 되기도 했다.

분명 그럴 진데, 로벨의 도발에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시선을 보내면 화급히 천장과 테이블 아래로 피하기까지 했다. 호승심도 상대를 가려가며 나타나는 법이다. 강이나 호수를 적으로 여기지 않듯, 로벨 로드릭을 적수로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도 없소?”

로벨이 시무룩해서 칼끝을 아래로 떨구었다. 다혈질 기사 하나가 욱해서 반쯤 일어났지만, 반색하는 로벨을 보고 도로 앉았다. 어린 집사가 손뼉으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노래가 왜 끊겼어요? 연주해요! 신나는 곡으로! 펄프 대장, 술잔이 비었잖아요. 오늘은 발가벗고 춤춰도 뭐라 안 할 테니 마음껏 마셔요.”

“내가 언제 발가벗고 춤을...”

“공왕 폐하도 자리에 앉으세요. 배고픈 손님들이 식사를 못하잖아요.”

“그, 그런 거야?”

기사단 일동은 정말 그렇다는 듯 고기접시를 잡았다. 결연한 표정이 접시 채 씹어 먹을 듯했다. 빵접시라 충분히 가능했다.

로벨은 머쓱해서 왕좌로 돌아왔다. 칼부림에 멈춘 연주가 재개되고, 간신히 웃음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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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없던 해프닝이지만, 무의미하진 않았다. 이단과 배교를 입에 담던 기사단이 대련 이후 조용해졌다. 연회가 끝나고 늑대성을 떠난 뒤로도 그러했다.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기사단을 등에 업고 목소리를 높이려던 프란시스 시티 주교와 사제들은 기사단의 소심한 모습에 당황했다. 거기다 로벨 왕이 황금 보리 수도원의 봉쇄를 풀자 명분까지 사라졌다.

“기사단 형제들이 순종하는 것 보면 무적무패 왕은 무혐의가 아니겠습니까?”

“처음부터 가당치 않은 의심이었습니다. 로벨 왕은 신실하기로 소문난 자입니다.”

“저, 송구하오나 교구를 오래 비울 수 없습니다.”

“저희 수도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농번기라 일손이 부족한데...”

주교의 얼굴이 거뭇거뭇했다. 목적은 달성했지만 어딘가 찝찝했다. 결투를 위해 최고의 칼과 최고의 갑옷을 장만하고 검술학회 마스터를 초청해 속성으로 강의까지 받았는데, 그동안 푹 쉬고 온 상대가 대수롭지 않게 ‘그쪽이 이긴 셈 칩시다’하고 마저 놀러 간 기분이었다.

“...뭐가 그렇게 구체적입니까?”

결투재판에 부정적인 사제가 할 생각이 아니었다. 어쨌든, 찝찝한 것은 찝찝한 것이고, 현실적으로 행동할 때였다. 100명이나 되는 사제와 수사를 장기간 모아둘 수 없었다. 저들 모두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형제자매를 구원했으니 돌아갈 때가 되었네. 옛 신의 집으로 가세나.”

주교의 허락이 떨어지자 멀리서 온 사제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주교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교황 성하께서 결단을 내리면 다시금 연락하겠네. 이 땅에 옛 신의 가르침이 자리 잡을 때까지 마음을 놓아서 안 될 것이야.”

으레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성전(聖戰)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했다. 똑똑한 사제들은 바로 알아듣고 표정을 굳혔다. ‘신실한’ 로벨 왕이 적이 될지 형제가 될지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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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시티 주교를 비롯한 옛 신의 종들이 떠나자 도시가 조용해졌다.

성 도미닉 수도원의 이단심문관은 성직자 기준으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한 후 12명의 순례자와 함께 서쪽으로 떠났다. 로벨이 저주에 근심하자 어린 집사가 위로했다.

“사탄, 마귀, 마녀가 안 나왔으면 괜찮아요. 키르케를 보세요. 그렇게 욕을 먹어도 씩씩하잖아요.”

“누가 키르케를 욕해? 누구야?”

“조금 전에 폐하를 욕한 사람들이요.”

옛 신과 이단이란 여름 폭풍이 지나고, 도둑고양이 같은 가을이 찾아왔다. 한낮의 태양이 수줍게 남쪽으로 기울고, 추경지의 밀과 보리가 황금을 품고 겸손함을 자랑했다. 아침저녁에 서늘함을 느낄 때쯤이면 다사다난한 한해의 끝을 느낄 수 있었다.

로벨은 창문을 닫고 종이와 씨름하는 어린 집사를 보았다.

“선박 건조는 어떻게 됐어?”

“가을 추수 전에 두 척을 완성한다고 했는데, 계획대로 안 되나 봐요.”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예산 문제야? 보급 문제?”

“임금은 약속한 대로 줬고 자재도 필요한 만큼 구해줬어요. 그냥 그놈들이 게을러서 그래요. 이래서 에르나 왕국놈들은 쓰는 게 아닌데...”

“이안 선장도 에르나 왕국 출신이야. 선장 앞에서는 말조심해.”

“아... 에르나 왕국인이 전부 게으르다는 것은 아니고요. 정말 게으르면 외해로 나가 텅텅거리며 살지 못하겠죠.”

로벨은 팔짱을 끼고 ‘에르나 왕국’과 ‘외해’를 한 번씩 중얼거렸다.

작금의 볼탄 반도는 삼면이 포위되었다. 로벨이 기교를 부려-에헴!-숨통을 잠시 열었지만, 가을,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오면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잉그비아 왕국은 북해를 차지하기 위해 재침공할 테고, 적잖이 돌아버린 악마추종자와 하이에나 같은 포클랜드 기사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준동할 것이다.

“프란시스 시티 분위기는 어때?”

“적당히 알아들을 수 있게 은유적인 경고장을 보냈어요.”

“적당히?”

“자비심으로 붙여놓은 모가지 건사하고 싶으면 수작질하지 말랑께!”

“...적당히도 아니고, 은유적이지도 않은데?”

“뭐, 이런 뉘앙스를 좋은 말, 고운 말로 포장해서 보냈다고요.”

그래도 한때 볼탄 반도를 지배한 공작 입장에서는 뒷목 잡을 편지일 것이다.

“옛 신의 교단을 믿을 수 없으니 여러모로 불리해.”

옛 신의 기본적인 믿음은 부활이다. 심판의 날 새로운 구주가 나타나 산 자는 구원하고 죽은 자를 되살린다. 손발이 잘려 죽어가는 프란시스 가문과 부활을 믿는 교회의 조합이 기묘했다.

“구울 같은 거예요. 생각이 없어요. 에르나 왕국한테 인어해를 내주고, 잉그비아 왕국한테 북해를 내주면, 포비아 왕국이든 볼탄 반도 공국이든 굶어 죽는다고요.”

“농사를 짓는데? 왜?”

“이것이 바로 은유적인 표현이에요.”

내년만 생각하는 기사한테 10년 뒤, 20년 뒤를 이야기하니 답답했다. 결코 로벨이 할 서류작업을 대신해서가 아니었다. 로벨은 턱을 괴며 다시 에르나 왕국을 중얼거렸다.

가까운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멀리 있는 동맹이 필요했다. 에르나 왕국은 포비아 왕국, 잉그비아 왕국의 오랜 적이고, 그들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으니 최고의 동맹이었다. 로벨의 생각을 읽은 어린 집사가 만류했다.

“그쪽에서 제안할 때 단칼에 거절한 게 누군데요. 어디 거절뿐인가? 바다에서 한 번, 육지에서 한 번, 아주 박살을 냈죠.”

“그때는 잉그비아 왕국이 적이 될 줄 몰랐으니까... 흑태자가 죽을 줄 누가 알았냐고.”

로벨은 변명 후 가능성을 점쳤다. 적의 적은 친구고 영원한 적이란 없으니 이해가 맞으면 불가능은 아니었다. 그때, 기가 막히게 집무실 문이 열렸다.

“기사님! 기사님! 어린 집사님! 기사님!”

“...왜 기사님은 세 번이고 집사님은 한 번이에요?”

병원에서 병아리와 놀고 있어야 할 마녀 키르케가 바쁘게 찾아왔다. 어린 집사의 트집을 가볍게 무시하고 로벨 앞에 껑충 뛰어 앉았다.

“손님이 왔어요! 손님이요! 누군지 아세요? 맞춰보세요!”

“그걸 어떻게 맞춰요!”

문제가 너무 어려웠다. 마녀 키르케도 그리 생각했는지 힌트를 주었다.

“에르나 왕국에서 온 기사님 친구예요! 에르나 왕국 친구요! 누군지 알겠어요?”

로벨의 친구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은데, 접두사가 ‘에르나 왕국’이면 아예 하나밖에 없었다.

“호킨 페럿 경?”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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