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화. 기도
로벨 일행은 27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늑대성으로 돌아왔다.
달이 한 번 차고 빠지는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우선 옛 신의 사제들이 대거 몰려왔다.
“공왕 폐하, 공왕 폐하께서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프란시스 시티 주교와 붉은 장미 수도원장, 그들을 따르는 사제, 부제, 수사까지 100명 가까이 되었다. 주름진 얼굴과 굽이진 지팡이가 아니면 적으로 오인할 뻔했다.
로벨이 모닝스타를 세우자 뒤따르는 용병들이 조금씩 속도를 줄여 멈춰 섰다. 300명의 대군은 움직일 때도 대단하지만 멈출 때도 장관이었다. 왕을 보기 위해 모인 시민과 농민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호기심 많은 강아지와 성질 포악한 새끼 양이 꼬리를 말고 자리를 피했다. 태양마저 빛을 잃어 바람이 서늘했다. 사실 마지막은 구름 때문이다.
“먼 길을 와서 병마(兵馬)가 피곤한데, 여럿이 모여 무슨 볼일이오?”
품계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가장 직위가 높은 주교가 앞으로 나섰다. 성호를 그리고 묵례로 예의를 갖춘 후 말했다.
“공왕 폐하께서 이단자를 옹호하기 위해 형제자매를 탄압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로벨은 주위를 살폈다. 리암 수사나 성 도미닉 수도원의 가짜 순례자는 보이지 않았다. 싸움개가 수도원을 충실히 지키는 모양이다.
“볼프 사트로 후작에게 진정 이단혐의가 있소?”
주교가 당황해서 입술을 오물거렸다. 대놓고 후작의 이름을 거론할 줄 몰랐다. 그 말인 즉슨 교단 본부에서 성 도미닉 수도원의 이단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주교와 사제가 소란 피우는 것을 보면 부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추측건대 모호한 태도로 돌아가는 판세를 가늠하고 있을 터였다. 로벨이 본받아야 하는 정치가의 처세였다. 하여, 어린 집사가 일러준 정답을 늘어놓았다.
“본인은 본인의 정당한 권리와 재산을 탐낸 자들을 벌했을 뿐이오. 무슨 오해를 했는지 모르지만 오해일 뿐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성직에 몸 담은지 40년이 된 주교조차 일순간 ‘그런가?’ 생각했다. 그러나 로벨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뭐야, 거짓말이잖아!’
로벨은 역시 거짓과 모략, 정치, 연극 따위에 소질이 없었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시선을 오른쪽 아래로 피했다. 4살짜리 꼬마의 거짓말보다 티가 났다. 붉은 장미 수도원장이 주교를 대신해 말했다.
“옛 신의 기사들이... 정의롭고 숭고한 수도회 기사들이 오고 있습니다.”
“아, 며칠 전에 만났소. 할 일이 많은지 금방 자리를 피하더군.”
이번에는 진짜인 듯 두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주교가 혀를 찼다. 역시 무적무패 왕이었다. 옛 신의 가장 날카로운 칼로도 위협할 수 없었다. 이 순간에도 미동하지 않고 명령을 기다리는 300명의 군사를 보면 납득이 되었다. 저 대단한 울프 용병단조차 왕이 가진 힘의 극히 일부였다.
“더 할 말이 없으면 이만 비켜주시겠소?”
주교가 아직 아니란 듯 입술을 떼자 재빨리 덧붙였다.
“할 말이 있어도 나중에 하시오! 먼 길을 다녀온 왕을 거리에 세워두고 신세 한탄하는 것이 보기 좋지 않으니.”
“그러나...”
“저곳이 본인의 집이오. 손님을 박대하지 않으니 시간이 날 때 예의를 갖춰 찾아오시오.”
기사가 예의를 논하니 여러 의미로 할 말이 없었다. 주교가 서너 발자국 물러나자 사제와 수사가 화급히 따라 비켜섰다. 로벨은 흡족한 얼굴로 성직자 행렬을 지나 늑대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옛 신의 사제들은 정말 ‘시간이 날 때’마다 황금 보리 수도원의 봉쇄를 풀고, 선량한 순례자가 소임을 다할 수 있게 도우라는 청원을 보내왔다.
그 옛날 옛 신의 사도들이 야만스럽던 겔몬족과 놀드족을 어찌 교화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제발 그만하라 할 때까지 징징거린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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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30분 간격으로 찾아오는 사제들을 모두 물리고, 아야와 이야카의 놀이터가 된 종이산을 애써 외면했다.
“차라리 기사단을 불러와. 쇠로 대화하는 게 편하겠어.”
잉크와 종이를 좋아하는-오해다- 어린 집사마저 동의했다.
“농담 안 하고, 시장의 종이값이 오를 정도에요. 싸구려 마지(麻紙)는 진작 바닥이 났을 걸요?”
아야가 종이뭉치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넝마를 갈아 만든 고급 면섬유지였다.
“이제 어쩌지? 그냥 풀어줄까?”
어린 집사는 고급 종이가 아까워 억지로 뺏은 후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단심문관을 잡아둘 의미가 없어요. 온 동네 소문이 다 났잖아요.”
“그런데?”
“그런데 그냥 풀어주면 모양새가 안 좋죠. 꼭 교회에 굴복한 것 같잖아요.”
역시 허세의 어린 집사였다.
“허세가 아니라 권위라고요. 한 번 굽혀주면 기고만장해서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조를 게 뻔해요.”
그리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질까 살며시 덧붙였다.
“옛 신은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그 아랫것들한테 굽신거릴 필요 없잖아요?”
로벨은 신성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기를 한 번 꺾고, 화해를 청하듯이 들어줘야죠.”
로벨은 아는 게 많아 아집도 많은 사제를 어찌 꺾을지 고민했다. 다행히 금방 기회가 찾아왔다. 저스티스 기사단이 약속을 지켜 늑대성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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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가 아니라 진짜로 철갑을 두른 무장집단이었다.
옛 신을 뜻하는 십자 깃발과 갑옷 문양이 아니었으면 도시 외벽의 성문을 닫고 비상종, 비상나팔, 비상북 등을 신명나게 연주했을 것이다. 그만큼 60기의 중장기사는 위협적이었다.
“우악! 저것들 진짜 왔잖아?”
북부대로 원정을 따라갔다 온 용병이 감탄했다. 그때는 야지(野地)라 불리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곳은 로벨 로드릭 왕의 도시이자 울프 용병단의 안마당이었다. 요새에 상시 주둔 중인 용병만 700명이고, 유사시 동원 가능한 외부병력이 그 2배였다. 앞줄에서 싸우라 하면 많이 난감해도, 부대단위로 봤을 때 질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은 저스티스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강철과 신앙으로 무장한 자신들이 용병 따위에게 질 것 같지 않았다. 수(數) 싸움으로 가도 옛 신을 믿고 따르는 형제가 수천, 수만 명이니 감히 옛 신의 뜻을 대행하는 기사단에 대항할 리 없다 생각했다. 용병들에 비해 객관성은 떨어지지만, 신앙이란 것이 본디 맹목적이라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그런 까닭에 성문을 지키는 자와 성문을 지나는 자 모두 고개를 빳빳이 들고 기 싸움했다.
“그거 잘 됐어!”
로벨은 신앙심이 겁을 잡아먹은 용감한 기사를 환영했다. 즉시 가용 가능한 병사를 늑대성에 집결시키고 반나절을 기다려 저스티스 기사단을 초대했다.
‘이 자가... 우리를 겁박하려는 건가...?’
울프 용병단만 무려 600명이었다.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에서 본 숫자의 배가 넘었다. 늑대성 언덕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배치되어 실제 숫자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허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옛 신의 기사단은 겁먹지 않았다. 겁을 먹어도 강철투구 밖으로 내보이지 않았다. 흉악한 용병들 사이를 지나 왕이 초대한 성에 올랐다.
성 아래 시민들과 사제들은 조마조마한 눈으로 두 세력을 보았다. 로벨 왕은 현세의 주인이고 옛 신은 내세의 주인이었다. 두 세력이 대치한 모습이 흡사 현실과 믿음의 대립 같았다. 변화하는 시대의 모습 같기도 했다. 혹은 그냥 싸움 나서 도시에 피해가 생길까 걱정했다.
“옛 신이시여... 우리의 왕을 보살펴주소서...”
양젖을 바치는 젊은 아낙이 습관처럼 기도했다. 어느 편인지 모를 애매한 기도였다. 그러나 그것이 대다수 시민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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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 기사단은 성문을 지나 연병장으로 들어왔다. 그리 작지 않은 마당인데 60필의 기마가 들어오자 꽉 차 보였다. 그들을 견제하느라 성벽과 성탑과 성내 구석탱이에 배치된 사수 탓도 있었다. 시위가 당겨진 아바레스트는 명백히 적대적이었다.
이제 막 성으로 들어온 기사단은 용병들의 배치와 무장상태를 확인하지 못했다. 사실 시간을 넉넉히 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성을 등지고 삐딱하게 자리한 기사가 모든 이목을 잡아끌었다. 키가 크고 갑옷 문양이 화려했다. 오른손을 얹은 칼자루도 범상치 않았다.
“로벨 로드릭 공왕?”
“늑대성에서 다시 보기로 했지. 그 약속을 이뤄주었소.”
청빈, 순결, 순명을 서원하는 수도원에서 세속적이고 음탕한(?) 기사소설은 당연히 금서였다. 그럼에도 기사단 일동은 소설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저런 말을 하고 난 뒤에는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지는데...’
그러나 현실은 소설이 아니었다. 소설보다 더하긴 하지만 아무튼 아니었다. 로벨은 칼자루를 놓고 특유의 밝은 톤으로 말했다.
“먼 곳에서 온 옛 신의 형제들을 위해 연회를 준비했소. 자, 안으로 드시오!”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아성 문을 열었다. 급히 차렸지만 60명 정도는 배불리 먹일 술과 음식이 있었다. 악공의 연주가 시작되자 사수들이 무기를 거두어 흩어졌다. 저스티스 기사단은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적응을 못했다.
‘이럴 거면 뭐하러 수백 명의 병사를 사열시킨 건가!’
‘혹시 독살하려는 게 아니오?’
그러나 다 이유가 있었다. 살벌한 임전태세 성에 들어온 기사단이 잔뜩 취해서 나오면 누가 봐도 싸우다 화해한 것 같지 않은가. 그 상태에서 감금된 순례자를 풀어주면 왕의 자비심으로 보일 것이다.
고로 교회와 척지지 않으면서 체면을 챙길 수 있었다. 볼프 사트로 후작이 파문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었으니 실리까지 가져왔다. 늑대성의 평균적인 정치, 외교술을 생각할 때 기적 같은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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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는 로벨의 뜻대로 진행되었지만, 세부적으로는 고비가 여럿 있었다. 금서를 많이 읽은 기사가 끝까지 의심을 풀지 않고, 기사 가문 출신 기사가 외팔이를 상대로 괜히 화를 내었으며, 술버릇이 유난히 고약한 기사가 객기를 부렸다.
“포비아 왕국 그랜드 챔피언! 무적의 기사이자 무패의 영웅! 그 명성은 성 베네딕 수도원에서 익히 들었소!”
“아... 그렇소?”
“나 또한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걸음마를 뗄 때부터 칼을 휘둘러왔소. 칼 한 자루로 옛 신과 옛 신의 어린 양을 보살펴 왔으니 무적무패 기사와 견주기 부족함이 없을 터, 어떻소? 한판 붙어보겠소?”
아직 덜 취한 기사단원이 기겁해서 동료를 말렸다. 그러나 객기란 놈은 말릴수록 강해졌다.
“놓으시오! 놔! 그대들도 궁금하지 않소?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 무적무패 왕의 솜씨를 본 적 없잖소?”
호기심이 동한 기사들이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그리고 로벨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 된 이래 개인적으로 칼 쓸 일이 거의 없었다. 결투를 신청 받지도 않고, 토너먼트에 나가지도 않았다. 먼 곳에서 온 젊은 기사가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로벨이 아론다이트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많이 취했는데, 괜찮겠소?”
“이 정도가 딱 좋소! 어허, 설마 걱정하는 척 피할 생각이오?”
어린 집사가 로벨의 팔꿈치를 잡았다. 주군의 안위를 걱정하는 가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살살하세요. 살살요. 죽이면 안 돼요.’
로벨은 입모양으로 대답했다.
‘응. 노력해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