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통치
성(城)이 아니라 오두막에서, 백작이 아니라 족장이라 불리던 시절부터 손님 접대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단순히 물질적인 소비 때문이 아니었다. 주인의 권위와 손님의 명예가 미묘하고 섬세하게 맞아떨어지는 고도의 대인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수리에 도끼가 꽂혀도 할 말이 없었다. 죽은 사람은 원래 말이 없으니까.
“이거 너무하네요.”
어린 집사가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성문을 재깍 열어준 것은 칭찬하지만, 영주는커녕 영주 대리인-장남, 종자, 집사 등등-조차 마중 나오지 않는 것은 무례했다.
“저녁 시간이 지났잖아. 이해해야지.”
해가 지면 남의 집에 방문하지 않는 것은 왕국법, 교회법, 관습법, 기타 등등 법에 명시하지 않아도 지켜야 하는 상식이다. 고로 로벨 일행도 예의 바른 손님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 잘못은 살피지 않고 자신에게 관대한 것은 대다수 인간의 나쁜 습관이고, 영리한 집사와 사나운 용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옛 신의 기사단과 싸울 뻔했으면 몇 시간 늦는 거야 당연하잖아?’
주인의 무례와 손님의 무례가 합쳐지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여름 태양 아래에서 하루 종일 걸은 용병들은 사소한 시비에도 으르릉 컹컹거렸다.
“저기 나와요. 저기요.”
다행히 무력시위로 번지기 직전에-그래봐야 바로 진압됐을 테지만- 영주와 영주 가족이 나왔다. 세 겹으로 칭칭 감아 어깨에 늘어트린 샤프론과 금실로 도배하다시피 한 꼬따르디(cotehardie:귀족풍 꼬뜨)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차림새만 보면 저쪽이 왕이고 후작이었다.
‘저러니 오래 걸리지...’
어린 집사는 속으로 투덜거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기사의 명예는 옷차림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목을 가다듬고 로벨의 업적과 호칭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공왕부터 시작하는 굵직한 작위, 승리한 전쟁, 우승한 마상시합, 처치한 괴물들, 각종 선행과 세인들의 찬사를 쭉 나열하니 그 자체로 한 편의 영웅 서사시였다.
“...일흔일곱 척의 전함을 수장시킨 북해의 수호자, 로벨 로드릭 폐하를 대신해 노돌프 알티노 남작의 환대에 감사합니다.”
기나긴 마침표가 찍히자 넋 놓은 용병 하나가 박수쳤다. 펄프 대장의 죽일듯한 시선에 화급히 손을 치우고 딴청부렸다. 그래도 덕분에 알티노 남작이 정신 차렸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서, 성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기사들이 괜히 전공을 쫓는 게 아니었다. 알티노 남작은 로벨 왕의 찬란한 업적에 기가 죽었다. 크고 펑퍼짐한 옷이 갑자기 쪼그라든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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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권세를 과시하면서 상대방의 명예를 추켜세우는 가장 쉬운 방법이 연회였다. 고기, 술, 소금, 향신료를 듬뿍 차리고 호탕함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절이 안 좋고 시간은 더욱 안 좋았다. 자정이 가까운지라 입맛이 없을뿐더러 자다가 불려 나온 하인들은 들숨 날숨 중 절반을 하품으로 해결했다. 고기를 열심히 굽고 술을 동이째 꺼내왔지만 분위기는 장례식하고 비슷했다.
“옛 신의 기사단을 보았소.”
로벨의 목소리가 조용한 홀에 울렸다. 이것도 왕의 위엄일까, 느슨하게 풀어진 시위가 돌연 팽팽해졌다. 알티노 남작이 얍삽한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저희 알티노 가문과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무, 물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내어주긴 했지만, 옛 신의 신자로써 응당 해야 하는...”
“그들의 목적을 아시오?”
“기사단의 목적이라면... 옛 신의 뜻을 받들어 이교도와 이단자를 처벌하는 것 아닙니까?”
“그럼 볼프 사트로 후작은 이단자요?”
어린 집사가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하세요! 위험한 말은 하지 마요!’ 노돌프 알티노 남작은 마음이 소박한 영주였다. 선량하다는 뜻이 아니라 국제 정세나 정치 싸움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로벨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로벨은 침묵을 답으로 받았다.
“경의 생각을 충분히 알았소.”
앞서 지나온 도마 가문도 비슷했다.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의 영주들은 전형적인 시골 영주들이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과 거기서 나는 소출 외에는 관심 없었다. 충성을 맹세한 주인이 부르며 마지못해 전쟁에 참가하겠지만, 자발적으로 군사를 모아 편을 가르지 않았다. 로벨에게, 그리고 볼탄 반도에게 그거면 충분했다.
“자, 술을 마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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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사흘간은 도마 성의 재현이었다.
로드릭 가문 깃발을 높이 들고 영내를 돌며 상인과 지주에게 ‘왕의 자비’를 보였다. 반짝이는 페닝은 로벨의 주머니에서 나왔지만, 그 외의 먹고 자고 마시는 비용은 알티노 남작이 부담했다. 솔직히 후자가 부담이 더 컸다.
“작은 도적이 사라지니 큰 도적이 나타났구나!”
노돌프 알티노 남작은 북부대로의 혜택을 오랫동안 본 소심한 아르노 도마 경과 달리 까칠했다. 로벨에게 직접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아랫사람들에게 수시로 소리치고 툭하면 손찌검을 했다. 어린 집사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보라고 저러는 거예요. ‘나 화났어! 정말 화났어!’하고 방문 걷어차는 꼬마와 같은 거죠.”
영주 혼자 씩씩- 거리는 거면 어렵지 않게 달래줄 수 있었다. 정 안 되면 혼낼 수도 있었다. 헌데,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자 성 밖 분위기까지 이상해졌다. 허풍쟁이가 가까스로 원인을 알아냈다. 옛 신의 기사단이 주변 마을을 배회하며 ‘볼탄 반도의 이단자’ 소문을 내고 있었다.
“옛 신의 지팡이가 아니라 협잡꾼이잖아?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
로벨을 지목한 선전은 아니지만, ‘볼탄 반도 왕’이란 직위가 안 좋게 작용했다.
절대다수 농민은 고향 땅을 10마일 이상 벗어난 적 없기에 수백 마일 떨어진 볼탄 반도의 지배구조를 알지 못했다. 그저 막연하게 왕=지역구 대표=이단자란 공식으로 고깝게 보았다. 해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옛 신의 권위를 빌린 모함 한 마디에 비해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필요했다. 어린 집사가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상식이 있는 영주들은 볼탄 반도를 적대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골치 아프네요.”
로벨이 모닝스타의 갈기를 빚기며 물었다.
“그럼 어쩌지? 농민한테도 페닝을 줄까?”
“집안 거덜 낼 일 있어요? 북부대로 상인은 볼탄 반도에 와서 페닝을 쓰지만, 이곳 촌것들은 자기들끼리 돌려쓰는데 재화 낭비에요.”
영주의 인심이 박한데, 농민들까지 의뭉스러운 눈길을 보내니 머물기가 곤란했다. 어린 집사는 건초 위를 한 바퀴 반 구른 후 결정했다.
“북부대로 정상화는 성공했으니까 늑대성으로 돌아가요.”
“보름 정도 머문다고 했잖아? 아직 열하루인데?”
“세상일이 어디 계획대로 되나요.”
로벨은 브러쉬를 치우고 깨끗해진 안장을 올렸다. 묵은 먼지와 땀을 씻은 모닝스타가 잇몸을 까고 좋아했다. 로벨의 기분도 비슷했다.
“나도 집이 좋아. 내일 아침에 출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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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당이 볼탄 반도로 돌아간다고 하자 알티노 남작은 체통마저 버리고 크게 기뻐했다. 웃는 낯짝을 닷새 만에 처음 보았다. 얄미워서 열흘쯤 죽치고 싶어졌다.
펄프 대장은 오는 길에 마주친 옛 신의 기사단을 걱정했다. 가까운 곳에 잠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로벨은 주변 2, 3마일을 정찰한 후 부정했다.
“그들이 가진 말은 80마리가 넘어. 시골 마을이 감당할 숫자가 아니라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할 거야.”
로벨의 예상대로 북부대로를 지나 늑대도로로 갈아탈 때까지 기사단과 조우하지 않았다.
진정한 의미로 공국령이라 할 수 있는 땅을 밟자 마음이 놓였다. 이 주변 영주들은 로드릭 가문의 오래 봉신들이라 유사시 네 자릿수 군대를 모을 수 있었다. 지금 찾아가는 바위성만 해도 10년째 충성한 켈트 남작의 땅이었다.
“공왕 폐하! 정말로 오셨군요! 목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앗, 말 위에서 배알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요, 용서하실 거죠?”
바위성 아랫마을에 이르자 호들갑스러운 기사가 마중 나왔다. 어울리지 않는 수염과 비단옷이 거슬리지만, 정체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로벨이 직접 서임한 몇 안 되는 기사 중 하나였다.
“조나 켈트 경...”
기사 로벨의 유일한 흑역사가 아닐까 싶었다.
“공왕 폐하의 충직한 기사! 조나 켈트입니다! 어서 가시지요! 아버님께서 연회를 준비 중입니다. 거, 용병들아, 너희가 먹을 음식도 준비했으니 기뻐하라.”
펄프 대장만 예의상 한 번 굽신했고, 나머지는 귓구멍을 후비거나 구름을 관찰했다. 오늘만 사는 용병이라지만, 차마 차기 남작을 욕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함께한 봉신은 머나먼 외지의 명목뿐인 봉신과 달랐다. 켈트 남작은 도마 경처럼 쩔쩔매지도, 알티노 남작처럼 요란 떨지도 않았다. 로벨의 발치에 무릎을 꿇어 충성을 증명한 후 실속 있는 음식을 대접했다. 젖을 생산하지 못하는 늙은 양과 알을 낳지 못하는 늙은 닭이 식탁에 올랐다. 맛은 좀 떨어지지만, 바위성 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아 마음은 편했다. 후계자가 경망스러운 것을 빼면 모든 게 훌륭했다.
“갑자기 늑대성을 비워 걱정했습니다.”
어느덧 50줄을 바라보는 늙은 켈트 남작이 고기를 썰어왔다. 로벨은 빵접시로 양고기를 받으며 말했다.
“북부대로에 작은 문제가 생겨 잠시 다녀왔소. 아, 그쪽은 잘 해결되었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켈트 남작은 나이프를 거꾸로 쥐어 조나 켈트 경에게 주었다. 충성을 맹세한 왕에게는 직접 고기를 바쳐야 하지만, 나머지는 대리인이 맡아도 무관했다. 연회장에 들어온 고참 용병만 서른다섯 명이니 일일이 잘라주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그 사이 왕과 남작은 진중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북쪽이 문제가 아닙니다. 남쪽에 신경 쓰셔야 합니다.”
“남쪽? 어디 남쪽 말이오?”
“공왕 폐하의 통치가 닿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빙 돌려 말하는 게 미심쩍었다. 로벨은 양고기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볼탄 반도에서 로벨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사트로 가문이 다스리는 북해안과 네일 공국 국경지역 뿐이었다. 남쪽 땅은 페르젠 가문, 헤르만 가문, 랭스터 가문을 통해서 철저히 통치...
‘아니, 통제되지 않는 가문이 하나 있구나.’
켈트 남작의 옛 주인이자 로벨의 옛 주인,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가문이었다.
“에릭 공작을 따르는 기사들은 모두 죽거나 추방되었소.”
“그래도 300년의 역사가 사라지진 않습니다. 무지한 농민들은 어릴 때 들은 익숙한 이름을 지성 없이 신뢰하고 합니다.”
로벨은 한입 베어 먹은 양고기를 힘없이 내려놓았다. 불과 수일 전,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에서 겪고 온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시오. 남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소?”
켈트 남작은 굵은 눈두덩이를 높이 올렸다. 젊은 시절 눈빛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옛 신의 사제들과 프란시스 가문이 이단에 관한 소문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로벨의 적은 셋이 아니라 넷이었다. 어쩌면 더 생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