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21화 (521/605)

521화. 정의

어린 집사의 분노는 타당했다.

북해무역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북부대로 통행까지 막히면 심각한 경제위기가 올 수 있었다. 물류의 중요성은 두 번 말하면 잔소리고, 세 번 말하면 싸우자는 시비였다. 그러나 농사와 약탈 외에 수익 창출을 모르는 ‘기사’ 브리노 남작 입장에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왜? 대체 왜? 전리품의 절반을 보냈는데? 그걸로 모자랐나?”

세금으로 일부를 뺏는 것보다 창칼로 전부를 뺏는 것이 더 많으니, 그 수익을 나눠주면 로벨 왕이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상행이 막히면 물가가 오르고 경기가 침체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전형적인 시골 기사의 생각이었다.

“이 소문이 돌면 북부대로의 상인이 모두 발길을 돌릴 거예요. 안 그래도 전쟁 때문에 물자가 부족한데 큰일이에요.”

“진정해. 그래서 혼내주러 가잖아.”

경제 개념은 없어도 셈은 할 줄 알았다. 브리노 남작과 그 동조자들은 무적무패 왕이 휘하 용병 300명을 이끌고 출진했다는 소식에 빠른 도주를 택했다. 그 흔한 ‘두고 보자!’, ‘후회하게 해주마!’조차 생략했다. 덕분에 로벨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을 되찾았다.

“볼탄 반도의 왕이자 늑대성의 공작이자 포클랜드 시티의 후작이신 로벨 로드릭 폐하가 명령한다! 성문을 열어라!”

깃발을 높이 든 기마 용병 뒤로 3개 중대와 2개 독립 소대가 발 맞춰 포진했다. 전원이 강철 투구와 강철 갑옷을 입고 롱 스피어와 아바레스트로 무장했다.

국가 단위의 전력은 아니지만, 일개 지방 영주가 감당할 군사력이 아니었다. 풋맨 1개 소대(약 20명)만 움직여도 마을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데, 기마병, 중장병, 쇠뇌병 등등으로 구성된 3개 중대면 국지적인 재앙이라 할 만했다.

“이런! 승냥이가 사라지니까 사자가 나타났구나!”

엄밀히 따지면 사자가 나타나서 승냥이가 도망간 거지만, 땅굴에 머리를 박고 숨어 사는 초식동물에게 선후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단을 내릴 시간이었다.

“도마 가문의 당주 아르노 도마가 고귀하고 명예로운 볼탄 반도의 왕을 뵙습니다.”

북부대로에 한 발 걸치고 대를 이어 소소한 영화를 누려온 도마 경이 성 밖으로 달려 나왔다. 시골 개도 자기 집에서는 왕 노릇한다는 소리가 있지만, 그것도 격이 비슷할 때 이야기였다. 진짜 왕 앞에서 왕 노릇 할 만큼 막 살지 않았다. 진짜 왕 로벨이 부드럽게 말했다.

“경의 성에서 며칠 머물렀으면 하는데, 괜찮겠소?”

“그... 그야 물론입니다. 아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표정은 딱히 영광스러워 보이지 않는데, 왕도 거기까지 배려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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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 행패를 부리던 브리노 남작 패거리가 사라졌지만, 도마 가문의 사정은 좋아지지 않았다.

돼지 한 마리는 거뜬히 잡아먹을 덩치가 320명이고, 소보다 우람한 말이 22마리였다. 한 끼에 먹어 치우는 식량이 도마 성의 사흘 치 식량이었다.

“저것들은 군마(軍馬)라 곡물이 아니면 먹지도 않아!”

“푸히히히힝-!”

모닝스타의 울음소리가 유난히 얄미웠다.

그러나 오해하면 안 되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놀고먹을 생각으로 주저앉은 것이 아니었다. 브리노 남작 패거리에게 피해 입은 상인들을 모아 다독이고 생색내기 수준이지만 보상도 했다. 놀랍게도, 로벨이 아니라 어린 집사의 결정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우리가 약탈한 것도 아닌데?”

“저도 아까워요. 그치만 이것보다 확실한 표시가 없어요.”

로벨 로드릭 왕이 북부대로의 주인이란 공포였다. 포클랜드 영주든 검은 숲 영주든 북부대로에서 약탈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닷새가 훌쩍 지나갔다.

“시간은 상대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고 주장한 고대 학자가 있었어요.”

“뭐? 그게 말이 돼?”

“저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도마 경을 보니까 확신을 못하겠어요.”

아르노 도마 경은 5일 사이 5년만큼 늙었다. 여름작물이 바닥나 인근 농장을 돌며 식량을 구했는데, 그 과정이 매우 처절하고 필사적이었다. ‘성 안에 자리 잡은 300명의 무장 집단이 굶주리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슬슬 비켜줘야겠지?”

로벨은 기사치고 양심이 반듯했다. 급하게 오느라 군량을 챙기지도, 종군상인을 모집하지도 못한 책임을 느꼈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영주님 걱정이라지만, 이번에는 조금 해야겠네요. 자리를 옮길까요?”

“늑대성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고작 닷새 가지고 말똥 찬 기사들이 이해하겠어요? 최소한 보름은 머물며 영역 표시해야죠.”

“음... 시간은 상대적으로 다르게 흐른다면서?”

고대 학자의 말뜻은 천 년을 사는 거북이의 하루와 하루살이의 하루가 같은 하루가 아니란 뜻이지만, 철학에 무관심한 로벨은 좋을 대로 인용했다.

“제가 괜한 것을 가르쳐드렸군요. 그래도 소문이 퍼질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곳간에 여유가 있는 가문을 알아볼게요.”

어린 집사는 아르노 도마 경에게 자문을 구했다. 지긋지긋한 식충이들을 데리고 떠난다는 말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남서쪽으로 11마일 떨어진 곳에 알티노 남작 장원이 있네. 커다란 농장과 과수원이 있어 공왕 폐하를 모시기 좋을 것이야.”

“그거 좋네요. 근데 왜 이렇게 기뻐하세요?”

“기, 기뻐하다니? 무슨 말인가! 내 섭섭한 것이 안 보이나?”

“전혀 안 보이는데요?”

“공왕 폐하! 오해입니다! 음해입니다!”

어린 집사는 불쌍한 시골 영주를 놀리며 과묵한 몬트를 불렀다. 선발대를 보내 확인해야겠지만, 거리가 가깝고 장애물이 없는 평야라 아침 먹고 출발하면 저녁 먹을 때쯤 도착할 것 같았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오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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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안장에 걸어놓은 아론다이트를 빼서 소드 벨트 고리에 끼웠다. 복잡한 매듭과 길고 좁은 공간을 해결해야 하지만 익숙한 동작이라 한 손으로도 충분했다. 그 사이 다른 손으로 펄프 대장과 울프 용병단을 지휘했다. 이심전심일까, 아니면 10년 넘게 동고동락한 전우애일까, 말 한마디 붙이지 않아도 각자 위치를 찾아갔다.

창끝은 날카롭고 갑옷은 단단했다. 고된 훈련으로 갈고 닦은 기술에 실전 한 스푼 얹어 정예란 이름을 쥐었다. 그러나 대장부터 말단까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기, 훈련, 전공을 전부 따져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 때문이다.

“저스티스 기사단이 이곳에 무슨 볼일이오?”

옛 신의 칼 중 가장 날카로운 칼이었다. 아군일 때는 든든하지만 적일 때는 끔찍한 옛 신의 정의였다. 그 숫자가 무려 예순 명이었다.

로벨은 혹시 아는 얼굴이 있나 유심히 살폈지만 소용없었다. 꽉 다문 바이저가 옛 신을 향한 믿음만큼 단단했다. 사실 바이저를 열어도 친분이 있는 기사단원은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자는 진작 배제되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우리는 이단 신앙이 의심되는 볼프 사트로 후작을 조사하러 검은 성으로 가는 중이오.”

“검은 성으로 가는 길목이 아닌데...”

어린 집사가 생각 없이 중얼거리다 입을 막았다.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 부끄러웠다.

‘이런 곳에서 기사단과 마주칠 줄이야!’

사실 당혹스러운 것은 저스티스 기사단도 비슷했다. 로벨 왕과 친분이 있는 기사단원은 물론이고 볼탄 반도 출신까지 제외했다. 전투가 벌어질 경우 가차 없이 ‘정의’를 실현하는 교단의 전통이었다. 천 년 동안 군림해온 범국가적 집단의 철두철미함인데, 그 때문에 일부 현장 정보가 누락되었다. 울프 용병단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무장이 왜 이리 좋아?!’

기마 용병만 21기였다. 전원 철편갑옷과 사슬갑옷을 입었으며 길고 짧은 무기를 고루 갖추었다. ‘칼’만 날카로운 것이 아니었다. 롱 스피어와 아바레스트로 무장한 ‘방패’도 훌륭했다. 진형을 갖춘 창칼에 무적무패 왕의 명성이 더해지니 진짜 기사에 비해 부실한-교단 후원금이 아무리 많아도 고딕 아머같은 최고급 갑옷을 입기는 힘들다- 수도회 기사 60명이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고작 300명이 무서워서 내뺀 브리노 남작을 비웃은 게 후회되었다.

“볼탄 반도 왕이 이곳을 지난다는 소문을 들어 기다리고 있었소.”

어젯밤에 결정한 행군로를 무슨 수로 들었는지 묻지 않았다. 펄프 대장은 장창병을 앞세워 초승달 모양 반(半)포위진을 펼쳤고, 저스티스 기사단은 쐐기꼴 모양의 돌격 대형을 갖추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 부담이 커서 당장 싸우지는 않았다.

“본인에게 할 말이 있소?”

“최근 볼탄 반도로 떠난 신앙의 형제가 실종되었소.”

“그렇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로벨은 역시 연기를 못했다. 안타까운 기색이 개미 오줌만큼도 없었다. 기사단장의 두꺼운 아멧 너머로 갈등이 엿보였다. 강제로 협력을 끌어낼지, 일단 물러나 다음을 기약할지... 답은 금방 나왔다.

“조만간 늑대성에서 찾아뵙겠소.”

“옛 신의 충직한 종은 언제나 환영이오.”

포위망 한 곳 열어둔 것은 그리로 나가란 뜻이다. 옛 신의 기사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초승달 밖으로 이동했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는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운이 좋았어.”

“어째서요?”

“대화를 먼저 했잖아.”

이런 평지에서 기마 돌격하는 기사들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로벨의 직속 랜스와 맨앳암즈가 있으니 막아내기야 하겠지만, 양측 합쳐 세 자릿수의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기사의 명예는 물론, 성직자의 양심조차 믿지 않는 펄프 대장은 거리를 벌려 기습 공격 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며 부대를 재편성했다. 그러나 세속의 기사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게 기사단의 기사였다. 거짓말은 옛 신의 크나큰 죄악이니 굳이 늑대성에서 보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오래 노출되어 좋을 것 없지. 알티노 남작의 성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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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돌프 알티노 남작은 매우 화가 났다.

은하수 너머에서 훔쳐만 보는 옛 신 때문인지, 볼탄 반도에서 갑자기 찾아온 무적무패 왕 때문인지, 허락 없이 성문을 열어준 문지기의 둘째 아들놈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분풀이가 가능한 것은 어차피 하나뿐이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 도적들이 쳐들어와도 그냥 성문을 열어줄 것이냐!”

“도, 도적이 아니라 왕님이라고... 볼탄 반도 와, 왕이라고 했습니다요!”

“진짜 왕인지 왕이라 주장하는 미치광인지 네가 어찌 알아? 아냐고!”

손바닥으로 때리다가 타격감이 별로인지 채찍을 찾았다. 그러나 본격적인 처벌은 불가능했다.

별이 빛나는 야심한 시간에 제멋대로 찾아온 손님이지만, 그래도 손님이었다. 집안 꼴을 그대로 보일 수 없었다.

“내 옷을 가져와! 여편네와 아이들을 깨우고! 요리사도 잡아와! 당장!”

기사 종자가 옷장에서 제일 화려한 옷을 가져왔다. 본래는 몸종이 할 일이지만 불러올 시간이 없었다. 어설프게 옷을 입히고 바늘로 꿰매다가 괜한 욕을 들었다.

“안 그래도 잡것들 때문에 골치 아픈데, 무적무패 왕까지 찾아와? 옛 신이시여! 이 늙은이 좀 살려주소서!”

옛 신은 관대해서 모든 기도를 들어주지만, 대개 그냥 듣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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