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20화 (520/605)

520화. 욕심

핑계는 적당히 만들었다.

‘늑대성에 도둑이 들었는데, 황금 보리 수도원으로 도망갔소. 고작 도둑이라고? 음, 사실 도둑이 아니라 방화범이오. 비? 비가 왜? 아차! 도둑이 맞소. 무엇을 훔쳤냐고? 비싼 거... 비싼 거... 그래! 알루미늄 왕관을 훔쳤소. 내 머리에 뭐가 있다고? 이, 이건 내 왕관이 아니야!’

어린 집사가 이마를 짚을 만큼 너무 적당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진짜 이유는 로벨도 알고, 리암 수사도 알고, 성 도미닉 수도원의 가짜 순례자-이단심문관도 알았다.

“볼프 사트로 후작이 사태를 파악하고 지지 세력을 모을 때까지 저들을 잡아둬야 해.”

이단심문관을 체포할 명분이 없어 수도원 봉쇄란 희대의 꼼수를 사용했다. 이것은 어디까지 로벨 로드릭 왕과 황금 보리 수도원의 일이니 일개 순례자 신분으로 끼어들 수 없었다.

로벨의 긍정적인 제스처를 기다리는 포비아 왕실과 옛 신의 교단은 깜깜무소식에 어리둥절할 것이다. 결국은 두 번째 순례자가 찾아와 상황을 파악하겠지만...

“고작 시간벌기에요. 공왕 폐하가 동조하지 않아도 파문령은 떨어질 거예요. 그럼 사트로 가문의 봉신들이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날 테고, 포클랜드 영주와 잉그비아 왕국도 얼씨구나 땅따먹기에 나서겠죠.”

“그건 그렇지...”

무명(武名)이 하늘을 찌르는 무적무패 왕 로벨이라도 옛 신의 교단과 싸울 수 없었다. 정치나 군사의 문제가 아니었다. 옛 신의 이름값이 옛날 같지 않아도 유라피아 대륙인의 모태신앙이었다.

옛 신의 대리인과 싸운다 하면 봉신과 자유민 상당수가 거부반응을 보일 것이다. 로벨 본인도 꺼림칙하니 말을 다 했다. 이런 시간벌기가 가능한 것도 신앙심 깊은 로벨 로드릭 왕이 교회에 진심으로 반(反)할 거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집사가 팔짱을 끼고 콧김을 뿜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으면 다음 대책도 있겠죠?”

로벨의 눈알이 좌우로 빠르게 굴렀다.

“체스의 달인도 첫 수로 마지막 수를 읽지는 못해. 그렇잖아?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두고 봐야지.”

“그래도 달인이면 다음 수 정도는 예상하겠죠. 옛 신의 교단과 볼프 후작이 어떻게 나올 거 같아요?”

“사... 사실 난 달인이 아니야...”

로벨의 잘못이 아니었다. 정해진 규칙으로 싸우는 체스보다 훨씬 복잡했다. 게임 참가자부터 최소 넷이니 말이다. 로벨은 잠깐 눈치를 보다가 억지로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도 저쪽이 수를 내면 대응할 수 있어!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

“누가 조급해해요? 망하는 것은 사트로 가문이지 로드릭 가문이 아닌데요.”

어린 집사가 입술을 삐쭉이고 일어났다. ‘진노한 왕’을 대신해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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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시간벌기는 꽤 효과가 좋았다.

성지 순례자로 가장한 이단심문관이 한 시간에 한 번꼴로 항의를 표시했지만 용병의 귓밥 제거 외에 소득이 없었다. 로벨의 신앙심을 믿어서인지, 아니면 인어의 바다를 건너는 게 힘들어서인지 새로운 순례자를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긴 장마가 끝났다.

“어디를 보는 거야? 이쪽에도 있는데?”

로벨은 엄지발가락으로 이야카의 목덜미를 간질이며 헤벌쭉 웃었다. 정숙한 숙녀는 물론이고, 점잖은 신사와 점잖은 척하는 기사도 하지 않을 교태였다. 호른 경이 새빨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곰팡이 핀 더블릿과 비에 젖은 부츠는 오랜만에 출근한 햇님을 맞이하러 나가고 가벼운 천 옷 한 장만 몸에 둘렀다. 호른 경 역사에서 최고 수준의 노출이었다.

호른 경의 독특한 심미관과 콩깍지 탓도 있었다. 각이 잡힌 승모근과 광배근, 수령이 짧은 나무는 일격에 분쇄할 것 같은 대퇴부는 일반적인 미(美)와 살짝 달랐다.

“카르르르-!”

발가락에 꼬집힌 이야카가 몸을 뒤집고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 대가는 무자비한 포옹과 쓰다듬기였다.

“그래! 그거야! 이빨 멀쩡하잖아?”

전성기에도 당해내지 못한 대장 늑대였다. 나이 든 이야카는 저항을 포기하고 흔드는 대로 몸을 맡겼다. 호른 경 얼굴에 부러움이 스쳐지나갔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비가 그쳤으니 저쪽에서도 반응이 있을 겁니다.”

로벨은 지친 이야카를 놓아주고 새로운 희생자를 찾았다. 얄미운 동생 일이라 좋아하던 누이 늑대가 기겁해서 줄행랑쳤다. 로벨은 혀를 한 번 차고 차마 안지 못하는 두 발 늑대에게 집중했다.

“어젯밤 과묵한 몬트 소대가 돌아왔소.”

모처럼 희소식이었다. 호른 경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볼프 후작은 어찌한다고 합니까?”

“사트로 시티의 주교를 만나 고해성사와 회개를 했다 하오.”

“그걸로는...”

“교단 본부에서 파문을 내릴 때 항의할 명분이 있지 않소.”

고해성사는 시작에 불과했다. 욕심 많은 사제와 포클랜드 귀족원에 뇌물을 뿌리고, 기도회, 추모회, 단식회 등 각종 종교행사에 참가하고, 명망 있는 교회와 수도원을 후원할 것이다. 그러라고 귀띔한 것이니 제대로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면 옛 신의 교단도 난감하겠군요.”

“그렇소. 매우 긍정적인 일이오.”

“허나, 황금 보리 수도원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요.”

머리 좋은 리암 수사는 로벨의 의도와 볼탄 반도 정세를 이해했지만, 식견이 짧은 어린 수사들과 신앙심 외에 가진 것이 없는 늙은 수도사들은 왕의 과한 조치에 불만이 가득했다. 열흘 넘게 갇혀 지내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키르케를 통해 포도주를 왕창 넣어주고 있소.”

“마녀 아가씨가 수도원에 말입니까?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군요.”

꼬장꼬장한 늙은 수도사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여기가 어디라고! 추릅... 불경한 마녀가! 꼴깍-’ 왕의 병사도 막지 못하는 왕의 정인 타이틀을 보고 애걸할지도 모른다. 왕의 진노가 풀리게 잘 좀 말해달라고 말이다. 옛 신의 고고한 수도사들이 애써 모른 척하던 불결한 마녀에게 간청하는 광경은 볼만할 것이다. 호른 경은 소리 내어 웃다가 천천히 정색했다.

“옛 신의 교단 뒤에는 잉그비아 왕국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로벨은 팔짱을 끼고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잉그비아 왕국이 아니오.”

“잉그비아 왕국이 볼프 후작을 고발한 게 아니란 말입니까?”

“이단 고발은 잉그비아 왕국이 맞을 거요. 볼프 후작의 과거를 가장 잘 아는 게 그들이니...”

로벨의 몸이 점점 기울어졌다. 아무래도 옆으로 누울 모양이다.

“그러나 결과에 욕심내는 자들은 따로 있소. 볼프 후작에게 쌓인 감정이 많기도 할 테고.”

그게 누군지 물을 필요 없었다. 어린 집사가 도망간 늑대 남매를 걷어차며 집무실에 들어왔다. 가짜로 화난 공왕과 달리 진짜 화난 얼굴이었다.

“까마귀 성의 존 도너반 자작이 전령을 보냈어요! 포클랜드의 브리노 남작이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의 북부대로를 점거했다고 해요! 혹시 미친 거 아닐까요?”

로벨은 완전히 눕기 전에 멈췄다. 긴 장마가 가고 햇빛이 비치지만 아직 쉴 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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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은 포클랜드와 볼탄 반도 사이에 위치한 관문지역이었다.

샘 포클 시대 이전부터 격전이 벌어진 땅으로 오래된 성이 많았다. 지금은 전화에서 벗어나 자급자족하는 자그마한 장원과 목가적인 시골 이미지가 강했다. 좋게 말하면 향토적인 곳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가난한 곳이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곳이 공왕 폐하의 땅이란 거죠!”

로벨이 볼탄 반도 공왕으로 인정받아 독립하면서 당시 점령 중이던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을 양도받았다. 그러나 이 시대 영토 개념이 그렇듯 로벨 혼자만의 땅은 아니었다.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의 영주 상당수는 포비아 국왕과 볼탄 반도 공왕 양쪽에 모두 충성하고 있었다. 그들이 우유부단하거나 박쥐 성향이라서가 아니라 영지의 권리가 쪼개지고 나눠진 탓이었다.

예를 들어 A란 장원의 성(城)을 가진 기사는 볼탄 반도 왕에게 충성하지만, 그 아랫마을의 조세권을 가진 B라는 기사는 포클랜드 출신으로 포비아 국왕에게 충성하고, 마을사람이 일하는 인근 목장의 C라는 기사는 검은 숲 제임스 공작의 먼 친척이고, 이런 식이었다. 코딱지만한 마을에 권리를 가진 기사가 대여섯 명씩 되니 충성의 대상을 통일하기 힘들었다.

볼탄 반도가 독립하기 전까지는 세금을 두 번, 세 번 뜯기는 농민 이외에 아무 문제 없었다. ‘포비아 왕국’이란 울타리 안에서 권리를 나눠 먹으니 시기와 질투는 있을지언정 물리적인 갈등은 없었다. 복잡한 행정절차와 권리승계도 관습적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포클랜드의 영주들이 외적을 핑계로 개입한 것이다. 페리 행정관이 흥분한 어린 집사를 대신해 첨언했다.

“성과 마을을 빼앗은 것은 아닙니다. 북부대로의 통행만 방해하고 있습니다. 명분은 ‘이단자’ 볼프 사트로 후작의 응징입니다.”

“성전(聖戰)이란 거야?”

“교황이 아니면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라 대놓고 떠들진 않지만, 그런 분위기입니다.”

“북부대로의 권리는 공왕 폐하한테 있어요! 걔네가 뭔데 우리 폐하의 권리를 막아요?”

“그 권리도 쪼개져 있으니까.”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잉그비아 왕국을 물리치고 옛 신의 교단을 누르니 포클랜드의 잡것들이 말썽이었다. 애초에 셋이 하나 되어 일으킨 사건이나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로벨이 진지하게 말했다.

“포스트 포레스트로 울프 용병단을 보낼까?”

어린 집사 눈에 불이 들어왔다. 원정=페닝소비란 생각이 이성을 불러왔다.

“군사행동은 최후의 수단으로 빼놔요. 우선 브리노인지 부리또인지 하는 남작한테 손해배상을 청구하죠. 그쪽 행패에 우리 쪽 손해가 막심하니까 책임지라고요.”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야. 상식이 있으면 군사를 물리겠지.”

로벨 이하 늑대성 식구가 모두 찬동했다. 간이 팅팅 부어도 무적무패 왕과 싸우지는 않을 테니 으름장을 놓으면 물러날 것이다. 그러나 기사의 ‘상식’을 고평가했다. 수일 뒤, 브리노 남작이 깜짝 놀랄만한 양의 금화 은화와 각종 현물을 보내왔다.

“이런 미친... 진짜...”

어린 집사는 좋아하지 않았다. 의도한 것과 다를뿐더러 배상금의 출처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북부대로의 상인들을 약탈하고 있잖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브리노 남작의 표정이 그려졌다. 앙증맞게 눈을 찡긋하며 ‘저 그렇게 경우 없는 기사 아닙니다. 공왕 폐하 몫도 넉넉히 챙겼지요. 에헤이, 감사 인사는 넣어둬요, 넣어둬.’ 기사 중의 기사 로벨 로드릭을 모시면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수준 안 맞아서 못 해 먹겠다.

“당장 울프 용병단을 소집하세요!”

로벨은 자신의 고유권한을 주장하지 않았다. 기쁨 반 우려 반으로 물었다.

“옛 신의 교단은? 황금 보리 수도원의 이단심문관은?”

“그쪽은 됐어요! 우리 쪽에 명분이 생겼잖아요? 공왕 폐하의 착한 상인을 보호하자구요!”

펄프 대장은 브리노 남작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호전적인 어린 집사란 희귀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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