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19화 (519/605)

519화. 명령

로벨은 시 서펜트 망토를 두르고 아성을 나왔다.

오후가 되면서 빗줄기가 조금 약해졌지만, 그래도 도저히 마실 나갈 날씨는 아니었다. 그것들이 아니면 굳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순례자들은?”

“리암 수사님이 황금 보리 수도원으로 데려갔어요. 그런데 진짜 순례자 맞아요?”

성 도미닉 수도원에서 축복을 받고 출발한 성지 순례자라 알려졌지만, 실상은 성십자 기사단 소속의 정식 수사들이었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망토를 벗기면 금속 흉갑에 크고 작은 칼이 가지런히 꽂혀있을 것이다. 호른 경이 후드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대놓고 ‘이단’을 입에 담고 있으니, 이미 포비아 국왕과 이야기가 되었을 겁니다.”

사트로 가문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다 해도, 건국 공신인 12기사의 후예이며 볼탄 반도 북해연안을 지배하는 대제후였다. 국왕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어 여러 차례 마찰을 빚고도 아무런 제지를 가하지 못했다. 어디 가서 말은 못하지만 볼탄 반도의 3분지 2를 뚝 떼어 독립한 로벨 때문에 더욱 건들기 힘들었을 것이다.

“볼프 후작도 불쌍하네요. 사방이 적이잖아요.”

그러나 적이 너무 많아졌다. 포클랜드, 검은 숲, 잉그비아 왕국, 심지어 옛 신의 교단마저 이단 파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본디 유일한 적이었던 로드릭 가문-프란시스 가문의 계승자니까-이 유일한 우방이 되었으니, 사트로 가문의 역사도 참 복잡했다. 호른 경이 짐작한 것을 확인차 물었다.

“그 말씀은 볼프 사트로 후작을 비호하시겠다는 뜻입니까?”

“당연한 것 아니오? 지금 사트로 가문이 몰락하면 잉그비아 왕국 뜻대로 되는 것이오. 그토록 애를 써서 지킨 북해안을 통째로 넘겨주게 되오.”

이것이 인세(人世)의 일이라면 로드릭 가문 입장에서 나쁠 것 없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것은 역사의 다반사니, 옛 신의 교단을 끼고 잉그비아 왕국과 협상하여 내 몫을 챙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역사 뒷면에 도사리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로벨과 로벨의 나라를 평화롭게 두지 않을 것이다.

쏴아아아...

시 서펜트의 망토는 방검(防劍)과 방열뿐만 아니라 방수도 우수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소매와 신발을 제외하면 거의 젖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내심 부러워했다.

쏴아... 쏴아아...

로벨 일행은 빗줄기를 걷어내며 로드릭 시티 외곽에 이르렀다. 평소라면 일과를 막 끝낼 이른 저녁이지만, 하늘을 뒤덮은 새까만 구름 탓에 3경이 지난 늦은 밤처럼 깜깜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집집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로벨 일행이 멈춰선 커다란 집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라면 파수꾼이 나갈 때까지 활짝 열려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일찌감치 성문을 걸어 잠갔다. 어린 집사가 툴툴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아무리 친해도 기사한테 말구종 일을 시킬 수 없었다.

“공왕 폐하께서 오셨어요! 성문 열어요! 빨리 열어요!”

빗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소피라도 보러 간 걸까, 스무 번쯤 두드리자 그제야 성문 중간에 달린 작은 창이 열렸다. 게슴츠레한 두 눈이 기분 나빴다.

“어느 얼빠진 놈이 이런 날에 싸돌아다니는 거야? 거지면 주소 잘 못 찾아왔어!”

“책임지지 못 할 말은 하는 게 아닐 텐데요?”

어린 집사가 후드를 벗으며 캬르릉- 거렸다. 눈구멍의 눈이 크게 껌벅였다.

“어? 우리 물주 나으리처럼 생겼는데?”

“어린 집사 말이야?”

“그 까탈스런 양반이 여길 왜 와?”

성문지기가 하나가 아닌 듯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집사의 평가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후회할 말도 하는 게 아니고요. 공왕 폐하가 오셨다니까요? 머리통을 달고 다니느라 지친 게 아니면 당장 열어요!”

이번에는 제대로 들린 모양이다. ‘공왕 폐하? 내가 아는 그 공왕 폐하?’, ‘네가 아는 공왕 폐하면 나도 아는 공왕 폐하인데?’ 같은 헛소리가 몇 마디 들리더니 천천히 빗장이 열렸다. 로벨 일행은 한심한 기분이 되어 울프 용병단 요새에 들어갔다.

“아앗! 내가 아는 공왕 폐하다!”

“이 멍청이가... 그럼 공왕 폐하가 또 있어요?!”

로벨은 면적만 보면 늑대성 못지않은 외곽 요새를 쭉 훑어보았다. 평지에 지어졌고, 도시 외벽에 붙어 있어서 공사비용이 많이 든 요새는 아니었다.

“펄프 대장, 애꾸눈 볼포스, 발가락 슈미츠, 그리고 외팔이, 싸움개, 겁쟁이, 흉내쟁이까지 모두 불러.”

“저, 전부 말입니까요? 싸움개 대장은 비번인데요?”

어린 집사가 답답해서 소리를 빽-! 질렀다.

“공왕 폐하가 찾는데 비번이 어디 있어요! 몽땅 데려와요!”

“아... 그런가?”

“최대한 조용히 데려와라. 소란을 피우면 용서하지 않겠다.”

호른 경도 한마디 거들었다. 용병들은 빗물이 휘날릴 만큼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싸울 때 빼고는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이것들이 공왕 폐하를 모시지도 않고...”

“본인도 길을 아오. 용병 대장 집무실로 갑시다.”

로벨은 앞장서서 요새 본관으로 들어갔다. 빗물이 마루를 적시고 진흙이 덩이째 떨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청소담당이 누군지 모르지만 왕에게 항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펄프 대장의 집무실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이것저것 뒤적일 때 낯익은 여인이 쟁반을 가지고 찾아왔다.

“로자니아 씨?”

저 북쪽 마을에서 마녀 사냥으로 불태워질 뻔한 미망인 로자니아 우드니였다. 지금은 울프 용병단 요새의 하녀로 일하는 중이었다.

“무, 무엇을 좋아하실지 몰라서...”

과일주, 맥주, 동방차, 싸구려 꽃차 등등을 전부 가져왔다. 로벨은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자의적이긴 하지만 딱딱한 얼굴보다 나았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로자니아가 흠칫 놀랐다. ‘공왕’이 무엇인지 모를 때와 반응이 달랐다.

“왕의 보살핌으로... 무탈하게 지내는...”

“편하게 말해도 돼.”

“아, 예... 좋은 분을 만나 잘 지내고 있어요.”

로벨은 리암 수사표 맥주를 골랐고, 어린 집사는 홍차와 다기(茶器)를 골랐다. 늑대성에도 없는 고급 기호품이 일개 용병 대장한테 있다고 투덜거렸다. 뭐, 보나 마나 뇌물로 받은 물건일 것이다. 왕의 용병 대장이자 로드릭 시티의 치안 대장이면 아부 떨 사람이 세 자릿수쯤 될 테니까.

“정작 나한테는 동방차 같은 거 안 주는데?”

“그야... 크흠! 공왕 폐하의 이미지가 ‘기사’ 그 자체 아닙니까?”

로벨은 ‘기사’란 단어에 좋아하다가 회피하는 시선들을 보고 다시 물었다.

“...좋은 뜻이오?”

“그, 그렇습니다. 용감하고, 지혜롭고, 그 무엇이냐, 그런 것입니다.”

“맞아요! 강철로 된 쌍두 도끼나 곰 가죽 망토 같은 건 자주 받잖아요?”

본의 아니게 로벨의 평가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좋아하는 것을 보니 그리 틀린 평가는 아니었다. 그때, 집무실 밖에서 멧돼지 가족이 날뛰는 듯한 소란이 들려왔다. 진지해질 시간이 되었다.

“공왕 폐하, 용병 대장입니다. 이곳에 계십니까?”

로벨이 눈짓하자 로자니아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네일 공국 출신의 덩치들이 좁은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비에 젖은 수염 탓인지 흉흉한 눈빛 탓인지 야생 짐승 같았다. 로벨은 입가의 웃음을 닦고 일어났다.

“응. 일거리가 생겼어.”

왕이 몰래 찾아와 시키는 일거리가 좋은 일거리일 리 없었다. 외팔이를 제외한 간부들의 얼굴이 무서워졌다.

@

폭우가 쏟아지는 늦은 저녁, 로드릭 시티를 지키는 일단의 용병이 바쁘게 움직였다.

길눈이 밝고 말을 잘 타는 기마 용병이 세 명씩이 세 그룹으로 성문을 나갔다. 워낙 빨라서 붙잡기도 힘들지만 억지로 세워 목적지를 물으면 세 그룹 모두 다르게 대답할 것이다.

이어서 완전 무장한 중장보병 2개 소대가 시내를 가로질렀다. 깊이 눌러쓴 케틀 헷 아래 하얀 얼굴이 차가웠다. 쇠로 된 부츠가 물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원초적인 공포가 울려 퍼졌다.

오물 항아리를 비우러 나온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 항아리를 안고 도망쳤고, 처지가 비슷한 개를 끌어안은 부랑자 소년은 지레 겁 먹고 담벼락에 몸을 숨겼다. 그 외에는 딱히 본 사람이 없었다.

빗소리는 많은 것을 감추었다. 쇳소리, 발소리, 말발굽소리가 사라진 밤은 시끄럽지만 고요했다. 그 때문에 황금 보리 수도원은 젊은 수사가 소변을 보러 나가서야 간신히 상황을 깨달았다. 뇌광에 번쩍이는 수십 개의 창과 그 아래 음울한 눈동자들이 악귀보다 무시무시했다.

“이, 이곳은 옛 신과 공왕 폐하가 보, 보살피는 수도원입니다! 훔쳐갈 것도 없고요! 사람을 해치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무시무시한 벌을...!”

“옛 신은 아니지만, 공왕 폐하의 명령으로 왔다.”

“고, 고, 공왕 폐하의 병사입니까?”

“그래. 울프 용병단이다.”

어느 도시나 그렇지만, 도시를 지키는 군사집단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피 같은 페닝을 갈취한다는 점에서 산도적과 다를 바 없지만, 진짜 도적이 나타났을 때는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호자였다.

젊은 수사는 울프 용병단이란 말에 일단 안심했다. 왕의 병사들이 왕의 수도원을 약탈하진 않을 것이다.

“공왕 폐하의 용병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죠? 그것도 흉악한 것을 가지고? 저희 수도원장님이 공왕 폐하의 가까운 조언자란 것을 알고 있습니까?”

법과 상식이 통하는 상대란 것을 알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멀리 있는 칼은 가까운 권세보다 허약한 법이다. 그러나 울프 용병단은 겁먹지 않았다. 물론, 웃지도 않았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목소리가 사늘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두 눈은 더욱 그러했다. 저녁 늦은 시간에, 그것도 비가 쏟아지는 날에 소집된 탓이지만, 세속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젊은 수사 눈에는 옛 신에 대한 강한 유감과 수도원을 향한 분노처럼 보였다.

“공왕 폐하의 명령이다. 수도원장이 아니라 교황이 와도 소용없다.”

젊은 수사는 갈등했다. 사람들을 깨운다는 핑계로 도망갈지, 신앙으로 포장된 용기를 꺼내 볼지. 일단은 후자였다.

“공왕 폐하께서 대체 무슨 명령을...?”

짜증이 빗줄기 같은 용병, 싸움개 닥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 시간부로 황금 보리 수도원의 모든 출입을 금한다. 이것은 볼탄 반도의 왕이 직접 내린 명령이니 예외는 없다.”

젊은 수사가 항의하려고 입을 열자 창대로 바닥을 찍었다. 축축하게 젖은 땅이라 큰 소리는 안 났지만 행동만으로 겁을 줄 수 있었다.

“다시 말한다! 예외는 누구도 없다! 허락 없이 수도원 부지를 떠나면 사살해도 좋다!”

마지막 말은 용병 부하들에게 한 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창날이 일제히 앞을 향할 리 없었다. 젊은 수사는 모든 용기를 모두 소진하고 뒤돌아섰다. 일개 수사가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수도원장과 수도사제를 모셔 와야 한다는 생각에 두 다리가 바빴다. 늦은 밤에 나온 진짜 목적이 바닥에 흘렀지만, 옛 신이 가호하사 큰 비가 내려 티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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