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18화 (518/605)

518화. 심증

로벨은 갑옷 가죽에 기름을 먹였다.

갑옷을 오래 입으면 적의 공격을 막는 판금보다 내피(內皮)와 가죽끈이 먼저 상했다. 습기와 땀 때문이다. 기름을 칠하고 햇빛에 말려서 곰팡이가 피지 않게 관리해야 오래 사용할 수 있었다.

두둑- 둑-

건틀렛 안에 끼는 가죽장갑을 뒤집다가 문뜩 주위가 깜깜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침에 먹은 빵과 치즈가 소화되지도 않았으니 벌써 저녁이 온 것은 아닐 것이다. 혹시나 해서 덧문을 올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굵은 빗방울이 후두두둑- 떨어지며 도망갔다. 비와 바람의 정신 나간 무도회 같았다.

“소나기?”

그 친구와 달리 잠깐 머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더위에 앞서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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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구름이 살아있는 괴물처럼 꿈틀거렸다.

새하얀 송곳니가 번쩍이고, 뱃고동 소리가 요란히 울리니 더욱 그러했다. 빗소리도 사람 소리 같았다. 쿵! 쿵! 우당탕-! 쿵! 성문 열어요! 망할 놈의 비잖아요! ...그것도 꼭 아는 사람 같았다.

어린 집사가 후드 달린 망토를 털며 아성에 들어왔다. 자유도시에서는 양산(?傘)을 방수천으로 만들어 우산(雨傘)으로 사용한다는데, 가만 생각하면 우스웠다. 건장한 사내들이 귀부인처럼 햇빛가리개를 들고 다니면 꼴불견이었다. 기사와 부르주아는 독감에 걸려 죽을지언정 우산을 쓰지 않을 것이다.

“배수로는 이상 없어요. 성 아래 진입로도 조금 미끄러운 것 말고 멀쩡해요.”

어린 집사 역시 북방의 ‘거친’ 사내라 가죽 후드 하나로 비를 막았다. 로벨은 손수건을 던져주었다.

“수고했어. 이제 좀 쉬어.”

“아직 아니에요. 성 밖의 사람들한테 낙뢰를 경고해야죠. 벼락은 화재의 주원인 중 하나라고요. 그런데 킁킁, 이거 냄새가 이상한데요? 이거 갑옷 닦던 수건이죠?!”

“깨, 깨끗한 거야. 모퉁이만 썼어.”

어린 집사는 투덜거리고 새 수건을 찾아 주위를 기웃거렸다. 그러나 우기에 마른 수건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고민 끝에 아야의 꼬리로 얼굴을 닦고 이야카의 목덜미에 머리를 비볐다. 늙은 늑대가 질색하며 으르릉 컹컹 항의했다.

“...키르케가 못 봐서 다행이야.”

“흥! 지가 보면 어쩔 거예요?”

용감한 발언을 하면서도 혹시 주위에 있을까 두리번거렸다. 그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왕 폐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미 늑대가 아니라 옆집 늑대였다. 선인께서 사내는 다 늑대라 했으니 반박은 받지 않았다.

“호른 경? 어서 들어오시오!”

로벨이 분신처럼 여기는 갑옷을 치우고 반색했다. 좀처럼 보기 드문 반응이었다. 어린 집사는 물론이고 늑대 남매도 질투심에 입을 삐죽였다.

“비도 오는데 경이 무슨 일이에요?”

“비가 오니까 올 수 있지. 한가하잖은가.”

어린 집사는 가만히 생각해보고 납득했다. 비가 오면 선박 건조를 할 수 없었다.

“에르나 왕국 조선공이 말하길 비가 올 때 목판을 이으면 훗날 뒤틀림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하기 싫어서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만...”

“이런 날씨에 일 시키는 것도 못할 짓이오. 경도 와서 몸을 말리시오.”

로벨은 서랍을 열어 아껴둔 벨벳 손수건을 꺼냈다. 어린 집사와 늑대 남매가 소리 없는 분노를 터트렸다. ‘이래서 딸내미 키워봤자 소용없다니까!’, ‘컹! 컹컹! 컹!’ 어떻게 키웠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호른 경은 이상하게 적의를 드러내는 어린 집사와 늑대 남매를 보고도 그러려니 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익숙했다.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순례자 행렬을 보았습니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놀라서 동시에 되물었다.

“이 날씨에 말이오?”

“우리 동네에서요?”

그리고 서로를 타박했다.

“...우리 동네가 어때서? 가끔 방문하잖아?”

“성인(聖人)이 묻힌 수도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지(聖地)로 가는 교통로도 아니고,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진짜 길 잃은 양만 오잖아요.”

그래도 신앙심은 깊은 자들이었다. 여기가 로드릭 시티라 알려주며 무릎을 꿇고 열정적으로 기도했다. ‘옛 신이시여! 길 좀 알려주소서!’

“음... 이번에도 잘못 왔을까? 폭풍 때문에 남쪽으로 못 가고 로드릭 항에 정박했거나...”

“그것은 아닌 듯합니다. 폐하께서 좀 전에 말씀하셨듯이 길을 모르면 이 날씨에 움직일 리 없지요.”

“어디서 보았소?”

“서문 밖 2마일 지점입니다. 지금쯤이면 울프 용병단이 신원을 확인했을 겁니다.”

신앙심이 깊은 영주는 순례자를 초대해 빵과 소금을 베풀기도 하는데, 로벨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황금 보리 수도원으로 가겠지. 리암 수사한테 연락해.”

“제가요?”

어린 집사가 창밖을 보았다. 으르렁거리던 뇌우가 번-쩍! 하고 호통쳤다.

“마을에 낙뢰 경고하러 간다면서?”

“그건 그렇지만... 왜 쫓겨나는 기분이죠?”

“얼른 다녀와. 고기 스튜 끓여놓을게.”

어린 집사는 찝찝한 기분으로 로벨과 호른 경을 보았다. 이 기분은 연인과 솔로가 존재하는 한 오백 년이 지나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폭우를 헤집고 언덕과 언덕을 넘나들 필요 없었다. 어린 집사가 축축한 후드를 쓰고 눅눅한 망토를 두르는 사이 세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공왕 폐하! 공왕 폐하! 성 도미닉 수도원의 사제님과 순례자가 공왕 폐하 뵙기를 청합니다요! 어이구! 집사 양반, 어디 가시오?”

그리고 네 번째에서 열일곱 번째 손님을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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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성 도미닉 수도원과 인연이 있었다. 작년 봄 곤트 백작령에서 벌어진 이단재판으로 수도원장이 직접 행차했었다.

그 곤트 백작은 지금쯤 검은 성의 가장 높은 곳-혹은 가장 낮은 곳-에 유폐되어 있을 테니 아마 그때 일은 아닐 것이다.

“순례행은 핑계고, 혹시 공왕 폐하를 고발하려고...”

“이단심문관이 대단해 봤자 일개 수도 사제인데, 감히 왕을 위협하겠는가?”

호른 경은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허리에 찬 칼과 망치를 점검했다. 옛 신의 뜻을 곡해한 자들이 뵈는 것 없이 날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재판권을 가진 경우 그럴 확률이 더욱 높았다. 만약 소중한 주군을 모욕하면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을 덜어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종교인에 대한 지나친 편견이었다. 허름한 꼬뜨를 입고 굽은 지팡이를 짚은 중년 사제가 예의바르게 목례했다.

“옛 신의 보잘것없는 늙은 종이 볼탄 반도의 유일하고 적법한 왕을 뵙습니다.”

말투와 행동이 귀족스러웠다.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어서,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수도원에 몸을 의탁한 농가의 자식이 아니라 명망 있는 기사 가문 출신이 분명했다. 로벨은 불편한 기색을 없애고 왕좌에서 일어났다.

“옛 신과 성자 도미닉의 가르침을 따르는 고결한 사제를 환영하오. 우리 로드릭 가문은 성 도미닉 수도원의 진실한 벗이니 편히 쉬기 바라오.”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고 자란 환경이 환경이라 ‘고귀한 피’를 우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중년 사제는 미소를 짓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일국의 왕, 그것도 명성이 자자한 무적무패 왕을 약속도 없이 찾아가 알현하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전에 알릴 수 있는 방문이 아니었다. 로벨 왕이 신실한 신자란 이야기를 들었기에 용기를 내었다.

“먼저 형제들의 안식을 위해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벨은 순간 당황했다. ‘그쪽 가족이 여기서 죽었소?’ 라고 물을 뻔한 것은 간신히 참았다. 교회에 안 나간 지 오래되어 감을 잃었다. 수도 사제의 형제면 필히 기사단 형제를 말하는 것이리라.

“왕으로서, 기사로서, 신자로서 응당해야 할 일이었소.”

“그 성심이 옛 신의 영광이고 볼탄 반도의 축복입니다.”

신변잡기 수준의 찬양과 겸양이 오갔다. 조금 오래 오갔다. 이쯤 되면 눈치가 만성 부족인 기사도 의도를 깨달을 때가 되었다.

로벨은 초조해하는 어린 집사와 지루해하는 호른 경과 예의 없이 턱을 괴고 자는 늑대 남매를 한 번씩 보고 고귀하지만 ‘살짝 짜증나는’ 사제가 원하는 것을 던졌다.

“혹시 순례행에 도움이 필요하오?”

“허허, 옛 신께서 보살피는데 감히 무슨 도움을 바라겠습니까.”

로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아닌가?’ 리암 수사, 아니, 리암 수도원장이 옆에 있으면 좋겠는데, 천둥번개가 쳐서 좀 늦는 듯했다. 어린 집사가 답답한 듯 가슴을 치고 제스처를 취했다. 두 손을 모아 파리처럼 싹싹 빌고, 뒷짐 지어 ‘에헴! 에헴!’ 기침하고, 마지못해 무언가를 건네받는...

‘아하?’

로벨은 즉시 깨달음을 실천했다.

“옛 신의 자취를 따르는 신성한 순례에 보탬이 된다면 가문의 영광이자 볼탄 반도의 영광이오. 집사, 금화 주머니 가져와. 그래. 가장 큰 거로 가져와.”

이것은 너무 나간 듯했다. 사제가 다급히 대화를 막았다.

“아, 아닙니다! 금화가 아닙니다!”

“응? 아아! 그렇군. 저잣거리와 농촌에서 쓰기는 은화가 더 좋을 것이오. 집사. 5페닝 이하 은화로 챙겨서...”

사제는 친절하고 자비롭지만 ‘살짝 짜증나는’ 왕을 통제하기 위해 집어던지듯 본론을 꺼냈다.

“공왕 폐하께서 도움을 주신다니 기꺼이 받겠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것은 삿되어 신성한 순례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아니! 고기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술도 아닙니다! 그 집사 좀 그만 찾으시고!”

호른 경이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로벨이 상대하기 좀 까다롭긴 했다. 하지만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옛 신과 성자 도미닉의 이름으로 이 땅의 사악한 악마를 심판하고자 합니다. 볼탄 반도 왕의 이름으로 허락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순간 두 자릿수 얼굴이 떠올랐다. 볼탄 반도에는 사악한 악마가 너무 많아 누구를 지칭하는지 짐작가지 않았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 강철성 백작? 머리 없는 기사? 유령선장? 동방의 마녀?’

로벨이 갈등하자 사제가 침음을 흘리고 솔직히 고했다.

“볼탄 반도에 오랫동안 해악을 끼친 자로, 옛 신의 올바른 질서와 믿음을 위협하는 볼프 사트로 후작입니다.”

예상 못한 이름이었다. 말을 빙빙 돌린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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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미닉 수도원의 사제이자 이단심문관이 고한 정황은 분명했다.

볼프 사트로 후작은 늑대의 왕, 뱀파이어 군주, 사신 그림 리퍼 등등 사악한 악마의 힘을 자주 빌렸다. 그 의도가 영성(靈性)을 가로채기 위함이었는데, 아주 제대로 효과를 보았다. 이단을 판별하는 성 도미닉 수도원조차 볼프 사트로 후작이 원흉이라 믿었다.

“10년 전 일을 왜 지금 거론하시오?”

“왕국의 공신 가문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지요. 확신이 생길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확신이 10년짜리일 리 없었다. 사트로 가문의 힘이 약해지니 이빨을 들이민 것이리라.

‘그래도 왜 하필 지금?’

로벨은 바닥에 고인 의심을 팍팍 긁어모았다. 평소에 하지 않는 짓이라 조금 어려웠다.

“혹시 배후에...”

“배후? 무슨 배후 말씀입니까?”

로벨은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함부로 해서 안 될 말이었다. 하지만 심증은 확고했다.

‘옛 신의 교단과 잉그비아 왕국이 손잡았어!’

옛 신의 지팡이와 악마추종자가 한 편이라니, 실로 끔찍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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