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17화 (517/605)

517화. 완벽

로벨의 기대대로 어린 집사는 곳곳에 사람을 풀었다.

이안 선장을 통해 실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뱃사람을 모집하고, 헨리 상회장을 통해 선박 건조에 필요한 자재를 사들이고, 마틴 총독에게 부탁해 에르나 왕국 출신 장인 조선공을 고용했다.

“선원을 벌써 모집해?”

“잉그비아 해군과 싸울 만큼 담이 큰 선원은 흔치 않다고요.”

“기존 선원 중에 경력자를 빼서 맡기면?”

“각 선장들한테 추천을 맡겼어요.”

그나마 장미성의 함대와 청옥성의 함대가 있기에 망정이지, 제로에서 시작했으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작업이었다.

“내 집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로벨은 아이란드 왕국산 벨벳 손수건에 정향유를 발라 섬세하게 흐룬팅을 닦았다. 옛날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사치였다. 어린 집사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로벨은 검신에 비친 ‘공포’에 흠칫해서 변명했다.

“내, 내 용돈으로 산 거야! 내 돈이잖아!”

“누가 뭐라고 했어요?”

어린 집사가 화난 것은 값비싼 벨벳 때문이 아니었다. 별다른 취미생활이 없는 로벨의 유일한 사치였으니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었다.

“북해전쟁이니, 연합함대니, 말로만 떠들고 아무 관심이 없어 보여서 말이죠. 기다리면 꼭 누가 해줄 것처럼요.”

로벨은 흐룬팅의 칼끝을 보았다. 가슴이 따끔해서 실수로 찌른 줄 알았다.

“그럴 리가? 내가 해야지. 내가 할 일이잖아.”

“우와! 그걸 드디어 알았군요? 맞아요. 전부 공왕 폐하의 재산이죠.”

“그럼 용돈 좀 올려줘도...”

“우선 조선소부터 지을 거예요.”

어린 집사는 조속히 말을 돌렸다. 수 만 페닝의 국가사업을 몇 개씩이나 하면서 1~2페닝에 유난히 인색했다.

“조선소는 프란시스 항구에 있잖아?”

“거기는 너무 멀어요. 에릭 공작의 영향력도 무시 못 하고요. 건조현황을 수시로 확인하고, 선원과 조선공을 공왕 폐하의 사람으로 만들려면 가까운 로드릭 항이 좋아요. 무엇보다 경제효과가 크고요.”

배 몇 척 만드는 것이 끝이 아니었다. 사람이 모이면 재화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선원과 조선공은 물론이고, 자재를 옮기는 인부, 먹이고 재울 상인,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대는 농민까지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쓴 페닝이 우리 지역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그만큼 세금으로 회수하는 양이 많아지는 거죠.”

“그래! 완벽히 이해했어!”

“...전혀 이해를 못 했잖아요.”

어린 집사는 좀 더 쉬운 예시로 설명했고, 로벨은 그때마다 ‘완벽히’ 이해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일을 완벽히 잘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으니 말이다.

“제가 졌어요. 더 이상 말하지 않을게요.”

“그래! 완벽히 이해했어!”

“이이익-! 아예 듣고 있지도 않잖아!”

어린 집사는 장부를 물어뜯었고, 그 광경은 아야와 이야카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재미난 놀이라 여기고 함께 물었다.

“저리 가! 이빨 빠진 늙은이들아! 저리 가!”

“왜 우리 애들 기죽이고 그래.”

로벨은 늑대 남매를 불러 양쪽 겨드랑이에 하나씩 안았다. 세월만큼 영악해진 늑대 남매는 끼잉- 낑- 소리를 내며 어린 집사를 흘겨보았다.

“앓느니 죽지! 아, 됐고요! 시간 되면 로드릭 항에 가서 시찰하세요.”

“진짜? 그래도 돼?”

“공왕 폐하가 관심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천성이 게으른 에르나 왕국인도 열심히 일하겠죠.”

로벨은 크게 기뻐했다. 외향적인 성격으로 외출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로드릭 항의 관리자가 사전의미 그대로 남자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잉그비아 왕국이 트집 잡을 행동을 해서 안 돼요. 걔네도 어깨 위에 혹이 장식이 아니니까 대충 알겠지만, 그래도 외교상 명분이란 게 있으니까요. 공식적으로는 외해 무역선 건조란 거 잊지 마세요.”

“그래! 완벽히 이해했어!”

“그 대사 하지 말고요! 조금도 이해 못 한 거 같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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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끝자락에서 항전하던 겨울의 잔당이 맹렬한 남해의 군세에 밀려 사멸하니 초원 곳곳에서 승리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감수성에 조난당한 시인은 천 마디의 구(句)로도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나 이성의 돛으로 삶의 바다를 개척해 온 역사의 주역들은 한 마디로 새 시대를 정의했다.

“여름이네...”

이른 아침에도 햇살이 강렬했다. 로벨은 아지랑이 위로 모닝스타를 몰며 부지런한 농부들을 구경했다. 봄 수확이 끝났지만 일손은 더욱 바빠졌다. 여름 햇살은 공평해서 잡초까지 무럭무럭 키웠고, 재산권 개념이 부족한 두더지가 파종한 씨앗과 뿌리내린 작물을 훔쳐 갔다.

“이 빌어먹을 쥐새끼들이! 또 처먹었어!”

“나한테 하는 말이야?”

“에엑? 어익후! 공왕 폐하!”

로벨을 본-사실은 검은 갈기에 하얀 몸을 한 모닝스타를 알아본- 농부들이 모자를 벗고 허리를 굽신거렸다.

볼탄 반도에서 가장 고귀한 공왕이지만, 고상한 도시민보다 괭이질하는 농민이 더 친근하게 여겼다. 천성이 기사인 탓이다. 커다란 공장과 여러 척의 무역선, 작은 금과 진짜 금이 나오는 광산보다 농사에 관심이 많았다.

“여기가 작년에 개간한 춘경지지?”

“예, 예, 작년 봄에 콩과 보리를 조금 심었고, 올해 본격적으로 밀을 파종했습니다요.”

“응. 여기서 난 보리로 빵을 먹었어. 아주 맛있더라.”

로벨의 치하에 농부들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바친 곡식을 왕께서 ‘맛있게’ 드셨다고 하니 기쁜 일이었다.

“올해는 하얀 빵을 기대해도 되겠지?”

“그럼요! 그럼입니다요! 최고의 밀을 수확해 바치겠습니다요!”

유라피아 대륙의 어느 농부가 저리 기쁘게 세금을 내겠다고 말할까. 천 명의 적을 홀로 무찌르는 것보다 위대한 위엄이었다.

로벨은 농부들의 환송을 받으며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로드릭 시티와 주변 마을에 목재를 공급하는 북쪽 숲이 있었다.

“이곳도 많이 변했어.”

집을 지을 목재와 겨울을 날 땔감으로 벌목을 많이 했다. 수백 년 된 거목은 거의 찾을 수 없고, 100년 이하의 키 작은 나무만 남았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통제해서 이 정도였다.

“배를 만들 나무를 또 잘라야 하니까... 사냥은 한동안 못하겠다.”

벌목장을 지나자 커다란 나무를 쌓아놓고 판자로 작업 중인 목수들이 보였다. 앞서 만난 농부들과 달리 목공 길드 소속의 도시민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정착한 사람들이고, 아예 다른 도시에서 일하러 온 인부도 있었다. 그런 탓에 로벨과 모닝스타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허리에 찬 칼과 멋진 말로 기사란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로벨은 정체를 밝히고 저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감상하자는 12살 꼬마 로벨을 찍어 누르고 멀찍이 돌아갔다. 사실 34살 기사 로벨도 ‘왕의 숲이니까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리면 어쩔 수 없이 우쭐거리며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는데, 그것은 숲지기 일이지 목수 일이 아니었다. ‘저건 기사 나으리니까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라는 생각도 엿보였다. 어쩌면 만사 귀찮은 건지도 모르겠다.

로벨은 목향이 가득한 오솔길을 조금 걷다가 숲지기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북쪽 숲의 숲지기 토드는 선대 로드릭 영주 시절부터 로드릭 가문에 봉사한, 이제는 얼마 안 남은 원로 로드릭 마을 주민이었다. 나이가 너무 많아 예전처럼 일을 못하고, 공왕령(領)이 몇 배로 커져 울프 용병단이 순찰을 돌아야 하지만, 원로의 자격으로, 혹은 관습적인 직위로 숲지기 신분을 지키고 있었다. 로벨도 젊은 날 고생한 가신을 이제와 필요 없다고 쫓아낼 생각 없었다.

“아아! 영주님! 영주 폐하(Lord’s Majesty)! 이 외진 곳에 어인 일이십니까요?”

호칭부터 옛날 사람 느낌이 났다. 로벨은 쩔뚝쩔뚝 달려오는 숲지기를 제지하고 모닝스타에서 내렸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렸어. 요즘 소식이 너무 뜸하잖아?”

“허허헛... 영주님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젊은이들을 보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지 않았습니까요.”

숲지기가 오두막 안으로 드시라 몸짓했지만 완강히 거절했다. 노인 혼자 사는 곳이라 엉망일 텐데 부산떨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장작을 패는 그루터기에 앉아 가죽 장갑을 벗었다.

“나 바빠. 물 한 잔 마시고 갈 거야.”

물 마시려고 여기까지 왔느냐 따지기 애매했다. 숲 속의 물은 특별했다.

도시의 물은 퀴퀴한 냄새가 나서 마실 것이 못 되었다. 로드릭 시티는 덜하지만, 지역에 따라 우물에 뿌연 석회가 섞이는 경우도 흔했다. 도시 노동자가 물 대신 맥주를 마시는 이유가 다 있었다. 하지만 숲 속 옹달샘은 달랐다. 이런 깨끗한 물은 페닝을 주고도 사 먹을 가치가 있었다. 진짜 페닝을 요구하면 칼부터 빼들겠지만... ‘물을 돈 주고 사 먹으라고? 정녕 미친 것인가!’

사려 깊은 숲지기는 말 못 하는 말에게도 물동이를 가져다주었다. 수컷이라면 종을 가리지 않고 들이박는 하프 유니콘도 배려를 모르진 않았다. 늙고 병든 사내라 무신경한지도 모르겠다.

“요즘 아이들은 어때?”

숲지기가 주름진 코를 훌쩍이며 웃었다. 아이들이라 하지만 로벨과 동갑이거나 몇 살 더 많았다. 물론, 고귀한 영주님과 숲지기의 자식이 같지는 않았다.

“첫째는 영주님 이름의 상단에서 일을 배우고 있고, 둘째는 뉴 로드릭 마을에 정착해 잘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아들을 낳았다고 하더군요.”

“손주? 몇 째야?”

“둘째네에서는 셋째입니다. 그래도 장남이죠. 재작년에 아들을 낳았는데 몹쓸 병에 걸려서 그만...”

“저런, 보러 가야 하지 않아?”

“이 무릎이 성치 않아 힘듭니다요. 애 때문에 정신없을 텐데 늙은이가 가봐야 서로 피곤하지요.”

왕과 숲지기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린 집사, 펄프 대장, 마녀 키르케 등을 제외하면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소소하게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해가 긴 여름에도 어둠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로벨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만 가야겠어. 깜깜해지기 전에 로드릭 항에 가야 하거든.”

“이런, 제가 괜한 말로 바쁘신 영주님을 붙잡았군요.”

“아니야. 아니야. 나도 재미있었어.”

로벨은 꾸벅꾸벅 조는 모닝스타를 깨우고 등자를 밟았다. 멋쟁이 말은 이제 끝났냐는 듯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다음에 올 때는 선물을 가져 올게.”

“영주님의 은혜로 하루하루 웃으며 지내는데 선물이 무에 필요합니까. 이 늙은이가 사는 게 궁금하면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요.”

로벨은 약속을 지켰다. 겨울에 쓸 양모 이불과 잘 익은 술, 그리고 손주들을 보러 갈 마차를 준비했다. 그러나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다. 이날이 마지막인 줄 알았으면 함부로 다음이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손자는 만났네.”

로벨은 씁쓸한 마음으로 묘비에 술을 부었다. 로벨을 기억하는 사람이 또다시 줄었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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