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화. 허락
간략하게 정리하면 까마귀 용병단을 쫓다가 수상쩍은 노파를 발견해 체포했다.
사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도 별거 없었다. 하필 노파가 있는 곳으로 도망간 패잔병이 하필 마법을 사용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하필 옛 신의 신실한 기사에게 사로잡혀 알량한 목숨을 구하고자 노파를 고발했다. 세상의 모든 사건·사고가 그러하듯 우연에 우연이 겹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노파가 ‘하필’ 악마추종자인 것도 우연일까요?”
“그건 아닐 거야.”
작년 여름의 몬스터 소동을 돌이켜보면 필연이었다.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를 아래로 끌어내리고 가드를 엄지로 살짝 밀었다. 칼날이 1인치쯤 뽑혔다.
볼프 후작의 젊은 종자는 로벨 왕의 거친 반응에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심각한 상황인 모양이다.
“마, 마스터, 아니, 후작님, 공왕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로벨은 주위를 한번 살피고 기사 종자가 걷어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환한 불빛, 거친 숨소리, 기름 타는 냄새가 오감을 괴롭혔다. 눈살을 찌푸릴 때 볼프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라 미안하오.”
로벨은 가느다란 눈으로 막사 내부를 살폈다. 후작의 거처치고 살풍경했다. 큼직한 화톳불이 두 개 놓여 있고, 칼과 철퇴를 쥔 기사들이 둥글게 둘러싸 있었다. 볼프 후작이 피곤한 얼굴로 몸을 돌리자 팔다리가 꽁꽁 묶인 악마추종자가 보였다.
“악...!”
어느새 따라 들어온 마녀 키르케가 비명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져있고, 콧대가 제자리를 찾지 못해 삐뚤어졌으며, 이빨도 모진 착취에 싫증이 난 듯 여럿 가출했다. 피멍과 피딱지는 굳이 거론할 필요 없었다.
“이 자가?”
“그렇소. 모두 자백했소.”
어떻게 자백을 받았는지 묻지 않았다. 화톳불에 꽂힌 인두와 피에 젖은 쇠집게가 이미 설명해 주었다. 로벨은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악마추종자 앞에 섰다. 호른 경이 바짝 긴장해서 칼자루를 잡았다. 주문 비슷한 것을 외우면 즉시 목을 칠 생각이었다.
“난 로벨 로드릭이야. 볼탄 반도의 왕이지.”
“아... 알고... 있다... 킥... 키킥...”
앞니가 빠진 탓인지 소리가 조금 셌다. 호른 경이 가까운 기사에게 항의했다.
“수고가 좀 모자란 거 같소. 기운이 넘치잖소.”
검은 성의 이름 모를 기사가 피식- 웃고 시뻘건 인두를 잡았다. ‘기운 넘치는’ 악마추종자가 자지러지며 바닥을 기었다.
“그만하시오. 본인과 대화 중이잖소.”
로벨이 제지하자 기사는 제 주인을 힐끔 보고 인두를 제자리에 놓았다. 숯덩이가 깨지며 불똥이 피어났다. 악마추종자는 어깨를 떨며 숨을 헐떡였다. 지금 모습만 보면 안쓰러운데, 수천, 수만 명의 볼탄 반도 주민을 괴롭힌 범인이라 동정할 수 없었다.
“존 공작 배후에 너희가 있다는 것을 알아. 이 전쟁도 너희가 꾸민 짓이지.”
“이... 이 모든 것은... 위대한 왕... 위해... 위해서...”
“어느 왕? 잉그비아 국왕? 아니면 마법사의 왕?”
“키... 키히힛... 그분의... 그분의 뜻대로...”
“마법사의 왕이구나.”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로벨은 악마추종자를 놓아주고 일어났다. 검은 성 기사들이 달라붙어 쓰러진 악마추종자를 억지로 일으켰다. 볼프 후작이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저자를 어찌하면 좋겠소?”
로벨은 마녀 키르케가 듣지 못하게 한층 더 목소리를 낮췄다.
“죽이시오.”
“...더 알아낼 것이 없소?”
“이곳에서 잡힌 수준이면 저들이 말하는 ‘탐구회’의 말단일 것이오. 존 공작 뒤에 악마추종자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되었소.”
볼프 후작은 옛 신의 교단에 고발하거나 존 오브 곤트 공작의 부도덕함을 공포하는 용도로 쓰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적대국의 정치선전으로 여길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마녀’를 정인으로 둔 로벨에게 마녀를 고발하자고 제안하기가 불편했다.
“그날이... 그날이 온다... 기쁨이 넘치고... 무지몽매한 아이야... 울어라... 울고 또 울어라...”
정신을 놓은 걸까, 아니면 꼴에 마법사라고 예언을 남기는 걸까. 검은 성 기사가 턱을 후려치고 입을 틀어막았다. 볼프 후작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뒤끝이 좋지 않군. 나가서 이야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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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볼프 후작은 조촐하게 술병을 비우며 향후 대책을 상의했다. 아직 뒷정리가 끝나지 않았는데 몰래 술 마신다고 타박할 사람은 없었다. ‘억울하면 후작이 되라고’ 볼프 후작이 술잔을 부딪치며 중얼거렸다. ‘아니면 왕이 되거나’
일단 악마추종자의 개입은 비밀로 삼았다. 전쟁으로 불안해진 민심이 동요할 수 있으니 훗날 협상카드로 쓰는 게 나았다. 그리고 잉그비아 왕국의 추가적인 도발을 막기 위해 연합함대를 고민했다.
“다음 전장은 북해가 될 가능성이 높소.”
“바다는 조금 곤란한데...”
로벨이 가진 청옥성 함대는 잉그비아 왕립해군은 당해내지 못한다. 재정난을 겪고 있는 검은 성 함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도 해안을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인어해의 함대를 북해로 보내고 포클랜드 함대와 검은 숲 함대의 도움을 받으면...”
“그래도 부족하오. 포클랜드 함대라 해봐야 연안 순시선이 고작 아니오?”
“후우... 잉그비아 왕국을 상대할 함대가 흔치 않으니...”
“이곳 북방에서는 에르나 왕국이 유일하지 않소.”
로벨과 볼프 후작은 동시에 술잔을 비우고 오랜 숙적을 생각했다.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그러니까 펄프 대장과 외팔이가 혈기왕성하여 주제도 모르고 국가 간 전쟁에 끼어들던 시절부터 포비아 왕국과 에르나 왕국은 기회가 없어 서로를 못 죽이는 철천지원수였다. 불과 3년 전에도 크게 한바탕했으니 관계개선은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역시 안 되겠지.”
“안 될 것이오.”
왕과 후작은 외부의 조력은 포기하고 가진 배를 어찌 운영할지 고민했다. 북해의 사자가 그리웠으나 서로 아픈 구석이 있어 입에 담지 않았다.
“결국 재원을 마련해야 하오.”
“어린 집사가 싫어할 텐데.”
“본인의 재무관도 좋아하진 않을 것이오.”
로벨과 볼프 후작은 마지막 잔을 비우고 올가을까지 로드릭-사트로 가문 연합함대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고향의 잔소리꾼을 생각하니 술맛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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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미래,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미래가 분명한 제2차 북해전쟁은 잠시 치워두고 개선이 시작되었다.
사흘에 한 번은 피를 보는 볼탄 반도지만, 이만한 규모의 전쟁은 좀처럼 드물었다. 그것도 숙명의 라이벌인 잉그비아 왕국을 상대로 대승했으니 참전 용사들의 기세가 하늘을 아프게 했다.
곧장 고향으로 가도 되는 기사와 용병도 ‘굳이’ 로드릭 시티까지 동행하여 개선식에 참가했다. 전투 전날보다 삐까번쩍하게 닦은 무기와 갑옷이 병사들의 기대치를 보여주었다.
펄프 대장은 무적 ‘무패’에 익숙한 로드릭 시민이 심드렁하게 반응하여 병사들이 실망할까 걱정했다. 그러나 기우였다.
전쟁을 옆집 부부싸움 정도로 여기는 로드릭 시민도 북부가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에는 적잖이 당황했다. 작년 몬스터 소동이 떠올라 부랴부랴 피난 짐을 싸기도 했다. 바로 그때 기다렸다는 듯 무적무패 왕의 승전 소식이 전해졌다. 근심이 깊었던 만큼 기쁨이 대단했다. 승리를 위한 사자 몰이 작전이 본의 아니게 극적인 반전으로 작용했다.
“저기 온다! 저기 와!”
“길에서 나와! 길 막지 마!”
로드릭 시티 시민과 인근 마을 주민은 위대한 승리를 가지고 온 개선군을 맞이하기 위해 시내로 모였다. 아리따운 아가씨들은 봄꽃을 한 바구니씩 따와 길가에 뿌렸고, 핑계 좋은 아저씨들은 술을 동이째 쌓고 환호했다. 철부지 꼬마들은 장난감 칼을 휘두르며 개선 행렬에 끼기도 했다. 기분 좋은 날이라 아무도 혼나지 않았다.
개선식이 무엇인지 깨달은 모닝스타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앞발을 높이 들며 우아하게 걸었다. 그러나 모닝스타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랑하는 주인이 모든 관심을 뺏어갔다.
“로벨 로드릭 왕 만세!”
“무적무패 왕 만세!”
로벨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번이 첫 전쟁인 어린 기사와 기사 종자, 멀리서 찾아와 우연히 구경하게 된 외지 상인 등은 깜짝 놀랐다. 세금을 걷는 이가 지지를 얻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 어려운 것을 해낸 주인공이 늑대성 언덕 아래에 있었다.
로벨은 시무룩해진 모닝스타를 진정한 전쟁 영웅 앞으로 몰았다. 펄프 대장의 구령에 울프 용병단이 발맞춰 사열하고, 봉신들의 군대가 눈치껏 빈자리에 모이는 동안 긴 인사를 나누었다.
“나 왔어.”
혹자는 뭐가 긴 인사냐고 따질지 모르나 소리로 하는 것만 대화가 아니기에 얼굴을 보이고, 팔다리를 살피고, 미소를 흘리고, 안도의 한숨을 삼키는 일련의 과정이 참으로 긴 인사였다.
“어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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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역시 철두철미했다.
승전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상인들을 소집해 전시 물가를 안정시키고 연회 준비를 서둘렀다. 전쟁특수를 노리고 사재기했다가 쪽박 차게 생긴 상인들은 연회 입찰에 사활을 걸었고, 어린 집사는 평소보다 훨씬 싸게 파티 준비를 마쳤다.
“진짜 물자가 모자란 곳은 봄 농사를 망치고 피난민이 대거 발생한 북쪽이죠.”
상인들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피난민=치안공백의 공식이 강렬하니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 부분은 로벨과 볼프 후작이 다시 상의해야 할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 배를 늘리자고요?”
어린 집사는 창밖의 푸른 하늘을 한 번 보고 작아진 동공으로 까매진 로벨을 한 번 보았다. 로벨은 전설로 남은 악마들과 살인 전문가인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 앞에서도 당당한 어깨를 움츠렸다.
“제가 페닝 한 장 아끼려고 치사하고 못되게 구는 거 아시죠?”
“아니야! 아니야! 농사를 망친 농민들은 어차피 할 일이 없잖아? 큰 전함을 만들면 나무도 필요하고, 쇠도 필요하고, 천도 필요하니까, 북쪽 주민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끼워 맞추지 마세요.”
황금을 황금으로 바르게 보는 우수한 시력을 가진 어린 집사지만, 무턱대고 재정을 아끼지는 않았다.
악마추종자의 개입이 확인되었으니 2차 북해전쟁은 기정사실이었다. 바다 건너의 적과 싸우려면 많은 전함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했다. 전쟁에서 ‘공격수단’은 실제 공격할 여력이 없다 해도 전략상 많은 이득을 주었다.
“그래도 무턱대고 배를 만드는 것은 안 돼요. 잉그비아 왕립해군을 상대할 배가 그냥 물에 뜨는 배는 아닐 테니까요.”
“그건... 이안 선장을 불러서 이야기하면...”
“이안 선장은 뱃사람이지 조선공이 아니에요. 기사가 칼을 잘 다룬다고 칼 만드는 법까지 잘 알진 않잖아요.”
“그건 그렇지?”
“일단 시간이 있으니 조선공부터 모집해요. 아, 포비아 왕국 조선공은 안 돼요. 최소 바다사자 호 급의 전함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잉그비아 왕국 몰래 해야 하니 왕의 권력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로벨은 걱정 없었다. 어린 집사의 허락이라는 가장 큰 고비를 넘겼으니, 남은 것은 어린 집사가 알아서 할 것이다.
“제가 뭐요?”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