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화. 버릇
전쟁 피해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볼프 후작과 그 기사들이 수 차례 전령을 보내 위험을 경고했으나 봄농사에 사활이 걸린 농부들은 옛 신에게 기도할 뿐 쉽사리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의심 많은 영주들은 소집에 응하지 않은 볼프 후작의 복수라 생각하고 비웃기도 했다. 그 결과는 잉그비아 왕국군의 무자비한 약탈과 방화였다.
“이곳도 당했어.”
로벨은 잿가루 날리는 농장 앞에서 모닝스타를 세웠다. 먼저 온 울프 용병단이 창대로 잔해로 뒤적이고 있었다.
“페닝은 고사하고 냄비 하나 없군. 아주 알뜰하게 쓸어 갔네.”
페닝 대신 시커멓게 탄 시체를 두 구 찾았다. 골격을 보아 젊은 여자와 열두어 살 꼬마였다. 집안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불을 피하지 못하고 질식한 듯했다. 허풍쟁이가 쌍욕 비슷한 것을 중얼거렸다.
“짐승 밥이 되게 둘 수 없으니 돌로 덮어.”
불에 탄 시체는 옮기기 힘들었다. 돌담을 허물어 시신이 있는 잔해 위에 차곡차곡 쌓았다. 살아남은 가족이 있으면 나중에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이 최소 이틀은 지났습니다.”
시간을 조금 낭비했지만, 그런대로 소득이 있었다. 애꾸눈이 잉그비아 왕국군의 이동방향을 알아냈다.
“이틀... 생각보다 빠른데...?”
로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만한 농장이면 하루쯤 쉬었다 가도 될 텐데, 불까지 지르며 서둘러 약탈했다. 애꾸눈이 외눈 안대를 만지며 속삭였다.
“저희가 쫓는 것을 알아챈 모양입니다.”
로벨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짐작한 바였다. 아니, 기대한 바였다. 천 명 가까운 군대가 따라가는데 눈치 못 채면 그게 이상했다. 허풍쟁이가 흙 묻은 손을 털며 다가왔다.
“시신을 묻었습니다요. 이제 어찌할까요?”
새벽잠을 줄이며 강행군할 수 있고, 기사와 기마 용병을 추려서 추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 될 일이었다. 너무 빨리 추격해서도, 너무 늦게 쫓아가서도 안 되었다.
“지금까지 한 것처럼. 계속 몰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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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성을 우회한 잉그비아 왕국군은 세 갈래로 갈라져 남하했다. 애초에 점령보다 약탈이 목적이라 주저함이 없었다. 로벨과 볼프 후작은 즉시 세 개 추격대를 편성했다.
첫 번째 부대는 지리에 밝고 지역 간에 유대가 깊은 검은 성 기사들, 두 번째 부대는 볼탄 반도 연합에서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로벨 휘하의 늑대성 기사들, 그리고 세 번째 부대는 로벨이 직접 지휘하는 울프 용병단이었다.
각 부대마다 장점이 뚜렷하고 숫자도 충분했다. 그러나 숙련된 전쟁 장인의 위장이었다.
쪼개진 부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설령 운이 좋아 세 곳에서 모두 승리해도 흩어진 잔당을 토벌하려면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로벨과 볼프 후작은 전쟁이 장기화되지 않게 확고한 승리가 필요하다는데 동의했다.
“붉은 산의 주민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너무 마음 쓰지 마시지요. 피난 명령을 무시한 본인들 잘못입니다.”
잉그비아 왕국군은 자신들이 ‘충분히’ 빨라 추격대가 못 따라온다 생각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해적질로 단련된 솜씨인지 털어먹고 도망가는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그러나 이곳 토박이 기사들을 따돌릴 정도는 아니었다. 작정하고 쫓으면 엿새 안에 잡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일정 거리를 두고 계속 몰아갔다.
로벨과 볼프 후작은 잉그비아 왕국 깃발을 본떠 ‘사자몰이 작전’이라 명명했으나, 울프 용병단 이하 말단 병사들은 사자가 너무 세 보인다고 ‘고양이 사냥’이라 불렀다. 사자인지 고양이인지 모를 북쪽 섬 출신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것은 붉은 산 초입해서 동향 사람을 만났을 때였다.
해안에서 헤어진 아군 부대가 엉뚱한 곳에서 다시 모였다. 처음에는 우연히 길이 겹쳤다고 생각했지만, 이틀 뒤 울프 용병단에 쫓겨온 세 번째 부대가 합류하자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사냥꾼에게 쫓겨 공터로 몰린 사냥감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빨이 있다! 저 야만인이 무서워서 피한 것이 아니다!”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이 호기롭게 소리쳤지만, 지리적으로 불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신명나게 약탈할 때는 좋았으나, 이곳은 적진이었다. 크지 않아도 속이 꽉 찬 성들이 곳곳에 있었다. 전투 중에 포위될 위험이 높았다.
잉그비아 왕국군은 계속해 남하했다. 그러나 더 이상 전진이 아니었다. 빵 굽는 마을을 지척에서 보고도 피해 갔다. 초조함이 눈에 보였다.
로벨은 익숙한 대지를 굽어보며 적장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더 갈 곳이 없지.”
로벨의 말이 들릴 리 없지만 비슷한 타이밍에 인정했다. 붉은 산 경계를 넘자 야트막한 구릉뿐이었다. 더 내려가면 완전한 평야인데, 볼탄 반도의 중무장 기사들을 상대하기 좋지 않았다.
“여기서 싸우자고.”
“여기서 일전을 벌여야겠다.”
로벨이 지목한 바로 그 자리에서 회전이 결정되었다. 볼탄 반도와 잉그비아 양국이 군사를 나란히 세웠다. 그 숫자가 양측 합쳐 7천 8백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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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아군 진영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쭉 살폈다. 잉그비아 왕국군 추격조가 그대로 우익, 좌익, 중앙군이 되었다. 병과로 보나 소속으로 보나 최선이었기에 손댈 수 없었다. 펄프 대장이 풍성해진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또 손해 보는 역할이군요.”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좌익이었다. 사선으로 싸우는 기존 전술을 따라갈 경우 방패 역할을 수행했다.
“중장병이 우리 쪽에 많으니까.”
로벨은 시선을 멀리해 잉그비아 왕국군을 살폈다. 얼마 안 되는 기병 전력을 우익에 몰아넣고 중장보병과 장창병을 좌익에 배치했다. 아군만큼이나 정석이었다.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노병의 버릇일까, 펄프 대장이 남 일처럼 물었다.
“기사의 숫자는 우리가 많지만, 적의 좌익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야. 그것은 적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밀릴 리 없잖아?”
로벨의 말에 가까이 있는 용병들이 사납게 웃었다. 로벨은 마주 웃어준 후 차분히 말했다.
“힘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아. 중앙에서 싸움이 승부를 가를 거야.”
로벨의 말에 펄프 대장 일동이 오른쪽을 보았다. 하버트 ‘주니어’ 백작이 지휘하는 볼탄 반도 중앙군 약 2천 명이었다. 볼탄 반도 연합군 3개 부대 중 가장 많지만, 부실하게 생긴 농민병과 어중이떠중이 용병이 대다수라 신뢰가 가지 않았다. 못미더운 표정들이 보이자 한 마디 덧붙였다.
“저쪽도 마찬가지야.”
펄프 대장은 아지랑이 같은 적군을 살피는 시늉하고 끄덕였다. 시력 좋은 애꾸눈이 아무 말 안 하는 것 보아 사실 같았다.
“그럼 폐하의 식견으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군요.”
“도박 좋아하지?”
펄프 대장이 어리둥절해서 돌아보았다. 한탕주의가 만연한 직업이라 도박을 싫어하는 용병은 없었다. 군영에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는 탓도 있었다.
“이번 회전이 도박이란 말씀입니까?”
“아니야. 아니야. 비유를 들려는 거야. 카드 게임 말이야.”
어려운 설명이 아닌데, 그럴듯하게 말하려니 힘들었다. 마녀 키르케가 슬쩍 거들었다.
“숨겨진 패가 있군요?”
로벨은 ‘가끔’ 똑똑한 마녀 친구를 향해 미소 지었다.
“적은 가진 패를 전부 보였어.”
“저희는 아닙니까요?”
허풍쟁이가 물었다.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가문이 많이 있지만, 이제 와서 군사를 몰고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로벨은 자신했다.
“응. 하나 있어.”
그 패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적은 물론이고, 아군도 알아서 좋을 것 없었다. 기대가 커서 실망하거나 긴장이 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이 진행 중인 마녀 키르케와 머리 좋은 애꾸눈만 알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아요? 우리 기사님이 지는 싸움하는 거 봤어요?”
퍽 신뢰 가는 말이었다.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은 로벨의 별명이 ‘무적무패’임을 상기하고 자신감을 가졌다.
“뭐, 이길 수 있으면 됐습니다.”
“그래! 올 테면 와라!”
전투는 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거리를 좁히고 간격을 조절하며 미적거리기를 약 1시간, 초조함이 조급함으로 바뀌어 인내심을 소화한 잉그비아 왕국군이 먼저 움직였다.
뿔나팔이 길게 울리고, 북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둥. 둥. 두둥. 둥.
부우우우우우-웅-!
그에 맞춰 검은 숲 기사들도 움직였다. 평행으로 대치한 진영이 점차 비틀리기 시작했다.
“크로스보우 준비!”
“장전 후 대기!”
“기다려라!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쏘지 마라!”
기병이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거리는 120~150야드지만, 적진에 궁병이 많으면 조금 일찍 속도를 높이기도 했다.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은 크로스보우의 유효사거리인 250야드 앞에서 일제히 속도를 높였다.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쏴라!”
“쏴!”
크로스보우 중대가 일제사격 했다. 기계의 힘으로 한계까지 당겨진 활대와 강철로 된 쇠못 모양 촉, 그리고 마주 달려오는 기마의 속도가 합쳐지자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다. 열처리된 판금갑옷을 뚫지는 못했지만, 충격력만으로 여럿 낙마시켰다.
천이나 가죽을 두른 말은 더욱 피해가 컸다. 머리에 직격 당한 말은 쓰러지기 전에 절명했고, 가슴 맞은 말도 무릎이 꺾여 앞으로 뒹굴었다. 당연히 주인도 함께였다. 지면과 충돌해 목이 부러지고 동료 기사에 짓밟혀 허리가 끊어졌다.
개개인에 초점을 두면 끔찍한 피해지만, 군대 단위로 보면 작은 손실이었다. 쿼럴을 피한 기사들이 무섭게 다가왔다. 헬름 틈새로 핏발 선 눈이 보이는 듯했다. 재장전할 시간 따위 없었다.
“스피어맨! 앞으로!”
크로스보우 중대가 뒤로 빠지고, 최소 9피트 이상의 장창을 가진 롱 스피어맨 중대가 한 걸음 나섰다.
왼발을 90도로 돌리고 버트(Butt, 창대 끝부분)를 움푹 파인 발바닥 중앙에 고정했다. 오른발을 최대한 넓게 벌리고 양손으로 창대를 꽉 쥐었다. 창날의 기울기는 45도가 적당하지만 개인차가 있어 눈대중으로 옆 사람과 맞추었다. 그것은 꽤 도움이 되었다. 앞만 보았으면 진작 도망갔을 것이다. 전력으로 달려오는 중장 기사대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펄프 대장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버텨랏-!”
기사의 랜스를 2피트쯤 줄이지 않는 이상 쉽지 않았다. 쿵-! 콰직-! 히이잉-!
창이 부러지고, 말이 부러지고, 사람이 부러졌다. 두 자릿수 생명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래도 기마돌격을 저지했다. 울프 용병단이 적을 막아냈다.
“맨앳암즈! 돌격! 기사를 끌어내려라!”
펄프 대장이 신이 나서 명령했다. 직업적으로 갈고 닦은 폭력성을 사용할 때가 되었다. 쓰러진 말에 깔려 바둥거리는 기사 위에서 바이저를 발로 차 열고 창날을 찔러 넣었다. 필사적으로 약점을 보호하는 기사는 서너 명씩 붙어 도끼와 망치로 두드렸다. 용병이 지치는 게 먼저일지, 갑옷이 망가지는 게 먼저일지 흥미로운 싸움이었다.
기사들도 그냥 당하지는 않았다. 전투마를 잃지 않은 기사는 철구가 달린 마상용 플레일로 용병 머리통을 하나하나 깨트렸다. 낙마했어도 사지가 멀쩡한 기사는 롱소드를 뽑아 매섭게 휘둘렀다.
‘이쪽은 됐어. 볼프 후작군은...’
로벨은 검은 성의 기사들이 돌격한 적의 좌익을 보았다. 그곳도 만만치 않게 치열했다. 잉그비아 왕국이 자랑하는 롱보우가 아군 진영을 휩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