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12화 (512/605)

512화. 구주

왕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해 성과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부모 잃은 소년의 통곡과 신랑 잃은 신부의 흐느낌이 걸음마다 묻어났다. 그러나 기사는 외면했다. 그에게도 여유가 없었다. 전장으로 떠난 왕이 걱정되었다.

어쩐지 불안한 마음에 박차를 가했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 왕이 있는 곳에 도착했으나, 웃으며 반기는 이는 없고 수천 개의 칼과 수만 개의 창에 포위된 요새만이 있었다.

‘나의 왕이시여!’

충심인지, 연심인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기사는 왕을 구하고자 홀로 적진에 뛰어들었다.

‘나의 왕, 나의 주인, 나의 심장... 내 마음을 돌려주기 전에 쓰러지지 마소서...’

기사는 베고, 베고, 또 베었다. 그러나 모진 바람이 고삐를 빼앗고 잔혹한 핏물이 몸을 누르니 기사는 끝내 사로잡히고 만다. 최후의 순간까지 왕이 있는 성탑을 바라보며 애절한...

“저건 울리히 경이군요.”

“...아?”

“저 얼굴 좀 보십시오. 하루 만에 사로잡힌 작자가 뭐 좋다고 웃는지...”

로벨의 얼굴이 괴상해졌다. 기사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모양이다. 안 그래도 빈곤한 상상력이 정형화되었다.

하긴, 호른 경이 바보천치도 아닌데 적진에 혼자 돌격할 리 없고, 설령 눈이 뒤집혀 날뛰다가 사로잡혀도 알토란 같은 땅을 가진 기사라 포로 대접을 거하게 받지 고문을 당하진 않을 것이다. 실제 저 아래 포로들도 무기만 뺏겼을 뿐 사지 멀쩡했다. 기사인 울리히 경은 술대접까지 받은 듯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잉그비아 놈들이란...”

신학, 과학, 수학, 문학 등등 학(學)자가 들어가는 모든 분야에서 일자무식 소리를 듣는 기사지만, 직업적인 전문분야까지 어둡지는 않았다.

“급하게 데려온 거 보니 몸값 협상은 아니고, 포로 교환을 요구할 것 같소.”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혹시 포로 중에 거점을 아는 자가 있나?”

“포로를 전부 심문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 아닐 거요. 공왕 폐하가 잡은 포로는 잉그비아 섬에서 바로 건너온 해적들이고, 성문 밖에서 주워온 포로는 죄다 무지렁이라 동쪽으로 걸어왔다는 것 말고 아는 것이 없소.”

고향 땅도 10마일 이상 벗어난 적 없는 농부들이 외국의 지리를 알 리 없었다. 검은 성의 인간 백정들이 이틀 동안 열심히 심문했지만, 해안에서 반나절, 해 뜨는 곳으로 하루 반나절, 큰 바위와 작은 나무가 많은 곳이란 정보만 겨우 알아냈다. 북해연안에 그런 곳은 족히 서른 곳이 되니 찾으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대상이 바뀌었소.”

로벨이 불편한 낌새로 말했다. 기사들은 서로를 한번 보고 다시 로벨을 보았다.

“그 말씀은... 무슨 뜻인지...”

“우리는 실패했지만, 저들은 성공한 모양이오.”

“그러니까 그게 정확히...”

“포로의 입을 열게 하는 것 말이오.”

기사들과 용병들의 시선이 울리히 경을 향했다. 얼굴을 보니 대충 짐작되었다. 입담 좋은 자가 명예를 추켜세우며 비싼 와인을 따라주니 좋다고 ‘대가’를 토해냈을 것이다.

“울리히 경은 그렇게 가벼운 자가... 으음... 가능성은 있군요.”

꼭 울리히 경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시대 기사들은 대부분 그랬다. 기분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며 기이한 명예를 목숨보다 중시했다. 포로 상태에서 구출되었는데 명예롭지 못하다고 제 발로 적을 찾아간 기사 일화나 적장이 전투준비를 마칠 때까지 꼬박 하루를 기다린 후 ‘정정당당히’ 싸워 포로가 된 기사 일화는 너무 흔해서 이름도 헷갈렸다.

외팔이가 버클러 테두리로 머리를 긁으며 슬쩍 물었다.

“그런데 뭘 바꿉니까요?”

로벨은 울리히 경 외 40여 명의 포로를 보며 설명했다.

“이곳의 병력, 무기, 사기 등을 알았으니 승산 없는 싸움을 포기하고 다른 곳을 공략할 거야. 그전에 포로를 빼내려는 거고.”

전투 경험이 있는 장병 180명이면 그냥 두고 가기 아까웠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포로를 주지 말까요?”

“그건 명예롭지 못하잖아.”

로벨도 이 시대 기사였다. 저쪽이 내미는 손을 거절할 만큼 무례하지 않았다.

로벨 패거리가 잡담하는 사이, 포로를 인솔하는 잉그비아 왕국 기사가 성벽 아래에 이르렀다. 로드릭 깃발을 힐끔 보고 바로 목적을 밝혔다.

“떠오르는 태양이자 영원불변한 아홉 섬의 지배자! 리처드 2세 폐하의 이름으로 경의를 담아 볼탄 반도 왕에게 고하니! 충성에 보답을, 헌신에 명예를 다하여 양자 모두 만족할 대화를 요청하는 바요!”

조금 전과 다른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부는 눈살을 찌푸리고, 일부는 볼살을 파르르 떨었다.

“싸, 싸우자는 건가!”

“아니! 포로교환 협상하자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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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게 너무 ‘잉그비아’스러워서 잠깐 오해가 있었지만, 포로 교환이 맞았다.

볼탄 반도 연합군 포로는 41명이고, 잉그비아 왕국군 포로는 180명이지만, 저쪽에는 볼프 후작의 명으로 정찰 나갔다가 붙잡힌 울리히 경이 있었다. 고귀한 기사의 가치를 하찮은 농민으로 계산할 수 없으니 얼추 의견이 맞았다.

“기사 하나가 병사 100명 치 몫을 하나?”

...라고 의문을 제시한 사람도 있지만, 결정권은 ‘명예를 아는’ 기사들에게 있으니 상관없었다. 실제 몸값으로 따지면 농민 100명보다 기사 1명이 더 비쌌다. 아니, 애초에 농민을 몸값 주고 데려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의 포로가 되어 몸값을 지불하는 것은 부끄럽긴 해도 불명예는 아니었다. 울리히 경은 당당하게 무기와 말을 돌려받고 검은 성으로 복귀했다. 볼프 후작의 한숨이 깊었지만 기사답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영리한 자는 영리하기 때문에 지난 일에 집착하지 않고, 모자란 자는 모자라기 때문에 지난 일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볼탄 반도의 두 지배자는 앞으로 일에 집중했다.

“검은 성이 아니면 리처드 2세가 어디를 공격할 것 같소.”

“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짚고 갑시다. 리처드 2세는 이제 9살 소년이오.”

리처드 2세 군(軍)을 말하는 것을 알기에 이것도 길게 거론하지 않았다. 반면, 잉그비아 왕국군의 진격로는 오래 생각했다. 검은 성에서 서쪽으로 가면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의 소영주들 땅이고, 남서쪽으로 가면 강철성, 남동쪽으로 가면 붉은 산이었다.

“세 곳에 모두 전령을 보내야겠소.”

“강철성은 필요 없을 거요.”

볼프 후작도 강철성 백작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자를 막기 위해 죽음보다 괴로운 불명예를 감수했으니, 어쩌면 잉그비아 왕국보다 미울 것이다.

“악마추종자도 백작의 정체를 알고 있을 것이오. 작년 여름 몬스터 소동 때도 강철성은 아무 피해를 입지 않았지.”

“몬스터 소동...”

로벨은 잠시 생각한 후 붉은 산을 지목했다.

“동남쪽이오. 붉은 산으로 갈 것이오.”

볼프 후작도 금방 알아챘다.

“정보수집이었군.”

“겸사겸사요.”

잉그비아 왕국의 목적은 볼탄 반도에 막대한 피해를 주어 북해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북해안 교역도시 사트로 시티를 점령하는 것이 제일이지만, 여의치 않으면 그 아래 영주들을 약탈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에 풀 한 포기 남기지 않을 것이다.

“리처드 2세와 존 오브 곤트 공작의 목적은 그것이고, 그들에게 협력하는 악마추종자의 목적은 다르오.”

이 전쟁의 진짜 원흉은 리처드 2세도, 존 오브 곤트 공작도 아닌 악마추종자 무리였다. 로벨과 볼프 후작의 진짜 적이기도 했다.

“그자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시오?”

“볼탄 반도의 혼란이요.”

로벨 옆에서 포도주를 홀짝이던 마녀가 말했다. 어엿한 숙녀가 된 마녀지만, 어린 집사와 티격태격하던 모습을 기억하는 볼프 후작은 레이디로 대하지 않았다.

“선대의 일로 마법에 관해 조사한 적 있지. 공포심을 자극해 사술을 부리려는 것인가?”

“그게 흑마법의 기본 골자죠. 전쟁뿐만 아니라 가뭄이나 전염병을 이용하기도 해요.”

“그런데 왜 하필 볼탄 반도인가. 전쟁은 저 남쪽 땅부터 동쪽 끝까지 매일 일어나는데?”

“음... 가까우니까요?”

“...현실적이군.”

“그리고 볼탄 반도에는 기사님이 계시니까요.”

보통명사로 지칭했지만 대명사였다. 볼프 후작의 시선이 로벨을 향했다.

“뱀파이어 군주가 원하는 것과 같아요. 기사님을 통해 현실의 벽을 허물고 인지의 세계를 불러오려는 거죠. 그것도 아주 대규모로요.”

“인지의 세계가 무엇이기에?”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이요. 용이 하늘을 날고 마차가 바다를 달리고 수염 난 난쟁이가 매일 같이 빵을 구워주는 세상이요.”

“그런 허무맹랑한 것이 가능한가?”

“옛 신이 이 땅을 만든 것은 가능했나요?”

“신성모독이군. 사제들 앞에서 조심하도록.”

볼프 후작이 굳은 얼굴로 경고했다. 하지만 그도 신실한 신자는 아니었다.

“옛 신은 옛 신이기에 가능했다. 그렇기에 유일한 자이며 지고지순한 신이지. 인간과 괴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구세주라고 하죠. 그리고 아시나요? 옛 신의 경전에는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날 거라 적혀 있죠. 그래서 ‘신’이 아니라 ‘옛 신’이죠. 새로운 신이 있으니까요.”

옛 신을 모시는 성직자조차 잊어버린 옛 신의 의미를 이단자가 거론하니 놀라운 경험이었다. 볼프 후작은 어릴 적 어머니 무릎에 앉아 자장가 삼은 성경 구절을 떠올렸다.

“새로운 구주(救主)가 나타나는 날이 심판의 날이지.”

“맞아요. 맞아. 옛 신이 만든 현세가 끝나고, 새로운 신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테니까요. 기왕이면 핑크빛 아기용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로벨을 향한 눈빛이 ‘하나 만들어줄 거죠?’에 가까웠다. 당연히 장난이지만, 장난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내가? 왜?”

“...핑크색이 싫어요?”

“그거 말고! 내가 구세주라고?”

로벨이 보기 드물게 소리치자 마녀가 목을 움츠렸다.

“제가 아니라 저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저는 이상한 신보다 지금의 기사님이 좋은걸요.”

볼프 후작도 동의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놀라울 정도로 허황된 망상이군.”

“그 말이 옳소. 그냥 미치광이잖아?”

로벨이 한숨 비슷한 것을 쉬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볼탄 반도를 혼란에 빠트리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볼프 후작은 술병을 치우고-마녀가 울상이 되자 슬그머니 쥐여 주고- 지도를 꾹 눌렀다.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잉그비아 왕국군의 진격로를 예측할 수 있겠소?”

로벨은 지도 위에 로드릭 깃발을 보며 상념을 털어냈다. 뱀파이어 군주와 드루이드 족장의 경고가 귓가에 감돌아 쉽지 않았다.

“저들의 목적이 약탈이라면 최대한 많은 마을을 걸쳐 갈 것이오. 적의 규모를 생각하면 부대 나눠서 이동할 가능성도 있소. 하인즈 가문과 그 휘하 봉신들에게 모두 경고하고...”

지도 한 장으로 세울 수 있는 작전은 많지 않았다. 정찰병을 계속 보내 적의 위치를 알아내고 인근 주민을 대피시키자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회전을 준비해야 할 것 같소.”

“회전이라면, 어디서 말이오?”

볼탄 반도가 크다고 하나 일 만에 가까운 군사가 동시에 싸울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로벨의 손가락이 지도 한 곳을 가리켰다. 볼프 후작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얄궂은 일이군.”

펠트 성 앞 1마일 지점. 과거 볼프 후작이 패배를 인정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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