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11화 (511/605)

511화. 후계

사트로 시티 공방전은 볼탄 반도 동맹의 승리로 끝났다. 그것도 압도적인 승리였다.

성벽에서 120명, 해안에서 274명 사살하고, 185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 52명, 부상 34명으로 비교적 경미했다.

“공왕 폐하의 전공이지요. 전부는 아니고, 한 9할 정도?”

로드릭 가문 기사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사회적 신분은 둘째치고, 나잇값 못하는 조롱이었다. 사트로 가문 기사들이 욱해서 반박했다.

“잉그비아 왕국 전함 한 척을 반파했소. 사트로 후작님의 위엄이지.”

“뭐, 우리 공왕 폐하가 아니었으면 검은 성이 완파되었겠지만.”

늪지성의 메튜 경이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하자 얼마 전 쉰 살이 된 기사 양반과 올해 손주를 볼 기사 양반이 좋다고 박장대소했다. 근엄한 수염과 피 묻은 갑옷을 제외하면 12살 악동 같았다. 그래도 한심하게 볼 수 없었다.

적아 구분 없이 수백 명이 비명 지르며 죽었다. 그중에는 철없을 때 친구처럼 지낸 영지민과 손수 이름을 지어준 영지민의 아이들이 있었다. 승리의 기쁨으로 떠나간 슬픔을 가리지 않으면 금방 우울해졌다.

“이제 우리가 쳐들어가서 본때를 보여 줘야지 않소?”

“기왕이면 잉그비아 섬을 점령합시다! 땅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영지민을 숨 쉬는 페닝이나 말하는 가축으로 여기는 기사도 있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살아있는 나는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생각하는 기사도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런 자들이 적극적이고 진취적이었다.

“현실적으로 말하시오. 그게 가능할 것 같소?”

“왜 불가능하다 생각... 윽! 공왕 폐하...”

로벨 왕과 볼프 후작이 2층 집무실에서 내려왔다. 휘하 기사들을 홀에 모아놓고 따로 티타임을 가진 것은 아닌 듯 진지했다.

“항구는 여전히 봉쇄되었고, 지원군은 더 이상 오지 않소.”

전술적인 승리가 전략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거시적으로 보면 변한 것이 없었다. 잉그비아 왕국군은 여전히 강하고, 검은 성은 여전히 고립되었다.

“우선해야 할 것은 적의 교두보를 찾아 박살내는 것이오.”

다른 말로 전진기지 내지 상륙거점이라 할 수 있었다. 잉그비아 섬에서 계속해 무기와 병력을 나르고 있을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자 호기롭게 외치던 기사들이 침묵했다. 볼프 후작이 바로 이어 말했다.

“게르트 경, 울리히 경, 두 사람은 몸이 가벼운 병사를 데리고 동쪽 해안으로 가시오. 가급적 교전을 피하고 잉그비아 왕국 주둔지를 발견하면 즉시 돌아와 보고하시오. 켈트 경, 바이란 경, 언제든지 출진할 수 있게 준비해 주시오. 메튜 경, 본인의 부족함을 너무 비웃지 마시오.”

귀까지 뻘개진 메튜 경 외에는 모두 로벨을 보았다. 로벨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후작의 체면을 살려주는 건가?’

그렇다면 그냥 따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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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갑옷을 벗어 망치를 쓸 필요 없는 범위에서 꼼꼼히 닦고 손질했다. 어린 집사도, 호른 경도 없어 손이 많이 갔다.

‘호른 경은 어디쯤 왔을까?’

킹스턴 성(城)은 말이 좋아 성이지 담장 하나 가진 농장이라 했다. 호른 경의 무용과 울프 용병단 2개 소대면 어렵지 않게 점령할 것이다.

‘별일 없으면 내일이나 모레쯤 돌아올 텐데... 별일 없으면...’

로벨은 기름먹은 헝겊을 놓고 상념에 잠겼다. 억압된 삶을 살아온 사람이 흔히 그러하듯 감정을 읽는 게 서툴렀다. 이것이 걱정이란 것을 깨닫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기사님? 저 들어가도 되나요?”

“키르케? 아, 잠깐...”

로벨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밍 더블릿에 망토까지 둘렀음을 깨닫고 진정했다.

마녀 키르케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혹은 알아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기사들은 로벨의 몸종이자 정인으로 알고 있었다. 이번에 데려온 것도 식사와 빨래 등 시중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녀 키르케는 알려진 것 이상으로 유능한 마법사였다. 잡일이나 부리려고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성 안을 살펴봤는데 마법의 기운은 없어요.”

로벨은 흉갑을 뒤집으며 안도했다. 잉그비아 왕국은 악마추종자의 본거지고, 악마추종자는 존 오브 곤트 공작의 협력자였다.

“적진은 어때?”

“저 눈이 그렇게 좋지 않아요.”

‘마법의 기운’이란 게 눈으로 봐야 하는 건지, 그냥 관용적인 표현인지 모르지만, 잉그비아 왕국 진영 사정은 알 수 없었다.

“그럼 됐어. 수고했어.”

성 안에 악마추종자가 없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한밤중에 성문이 벌컥 열리거나 정체 모를 전염병이 퍼져 꼬꾸라지는 일은 없을 듯했다.

“그런 것은 마법이 아니어도 할 수 있잖아요?”

“눈에 보이는 수작은 나도 막을 수 있으니까.”

“기사님은 보이지 않는 마법도 막을 수 있을걸요?”

마녀 키르케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냥 하는 칭찬이나 아부가 아니었다.

“내가 수호자니까?”

“예. 비밀이 많은 마도의 수호자잖아요.”

로벨은 갑옷을 내려놓았다. 무의식적으로 칼자루를 쥐었다가 그것도 놓았다. 오갈 곳 없는 손이 방황하다 얼굴을 덮었다.

“...알고 있었어?”

“기사님이 마도의 수호자인거요? 그야 당연하죠! 저도 마법사라고요.”

“그거 말고. 내가 사실은...”

가만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부터 거리감이 있었다. 사랑이 우정으로 변했다고 할까. 단순히 지쳐서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공왕 폐하! 공왕 폐하!”

로벨이 입술을 움직이기 전, 먼저 소리를 토해낸 외팔이가 있었다. 로벨은 짜증 반 안도 반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크 비슷한 것이 들리자마자 외팔이가 뛰어 들어왔다. 로벨은 무례를 지적하려다가 말았다. 성 아래 주둔지에서 성탑까지 뛰어온 듯 땀투성이였다.

“적의 공격이야?”

“예? 예예! 어떻게 아셨습니까요?”

그거 말고 그렇게 뛰어올 이유가 없으니까. 로벨은 경외심이 엿보이는 외팔이의 눈을 외면하고 갑옷을 다시 착용했다. 사베튼, 그리브, 뱀브레이스 등은 벗지 않았기에 상체만 다시 끼우면 되었다. 마녀 키르케가 손을 쭉 뻗어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니야. 혼자 할 수 있어. 그만 나가 봐.”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마녀 키르케’라 거절했다. 전투 중에 흉갑이 뚝 떨어지거나 스커트가 풀리는 일은 아무래도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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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생활 20년이면 복잡한 풀 플레이트 아머도 혼자 잘 입었다. 흉갑과 배갑을 맞추고 어깨 보호구의 가죽끈을 쪼이는 게 좀 어려울 뿐 나머지는 본래 직접 하는 일이었다.

로벨은 갑옷이 잘 고정되었는지 상하좌우로 몸을 움직여보고 소드 벨트를 감았다. 해비 랜스, 라이트 랜스, 호스 플레일 같은 덩치 큰 무기는 마구간 근처에 있는데, 오늘은 쓸 일 없을 것이다.

성탑을 한 바퀴 반 돌아 지상에 내려오자 외팔이와 마녀 키르케가 투닥거리며 싸우고 있었다. 덩치를 보면 아빠와 어린 딸인데, 주로 당하는 것은 아빠 쪽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로벨이 등장하자 마녀 키르케가 바로 고자질했다.

“아니! 이 수염 난 곰 아저씨가 자꾸 아기 이야기를 하잖아요!”

“아기? 무슨 아기?”

로벨이 의아해서 다시 묻자 외팔이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그냥 한 소리입니다요. 그냥이요.”

“뭐가 그냥 한 소리예요! 하여간 남자들은 음흉해가지고!”

“음흉? 음흉이라고? 남녀가 그렇게 오래 지냈는데? 우리 공왕 폐하 후계자 걱정이 왜 잘못이야? 다른 나으리들도 다 묻는...”

외팔이가 본의 아니게 전부 실토했다. 로벨은 큰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가 뒤늦게 이해했다. 여기서 의외의 사실이라면, 기사, 용병, 마법사 중 가장 개방적이고 털털한 게 마법사란 것이다. 로벨과 외팔이는 빨개진 얼굴로 아무 말이나 꺼냈다.

“그,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지금 중요한 일도 아니고. 잉그비아 왕국군이 어디로 왔다고?”

“남문! 남문이요! 남문입니다요!”

“그래. 빨리 가자.”

로벨은 헛기침하고 모닝스타가 있는 곳으로 서둘렀다.

봄을 타는 것은 짐승도 마찬가지였다. 모닝스타 곁에 형형색색 암말들이 득실거렸다. 보통은 수놈이 적극적이고 암놈이 무심한데, 모닝스타가 잘 생긴 탓인지 어째 암컷들이 적극적이었다.

“여기 마구간은 왜 죄다... 저리 가! 저리 비켜!”

로벨은 발정 난 암말들을 쫓아냈다. 과분한 구애에도 시큰둥하던 모닝스타가 주인을 보고 잇몸을 드러냈다.

“전시에 고삐도 채우지 않다니! 여기 관리인은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억울한 마구간지기를 위해 진실을 고백하면, 욕심 많은 검은 성 기사들이 모닝스타의 씨를 받아내기 위해 자기네 암말을 집어넣고 고삐를 풀었다. 아무래도 로벨의 후계에만 관심 있는 게 아니었다. 모닝스타가 주인 말이 모두 옳다는 듯 갈기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나중에 다녀와서 혼내주자. 지금은 남문으로 가야 해.”

로벨은 손수 안장을 올리고 훌쩍 올랐다.

외팔이를 길잡이 삼아 남문에 도착하자 검은 성 기사, 늑대성 기사, 울프 용병단 남군(南軍) 중대장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시종도, 종자도 없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모시는 이가 없는 왕이라 망정이지, 누구 휘하의 기사였으면 주인보다 늦은 죄로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이다!

“공왕 폐하.”

“로드릭 폐하.”

로벨이 말에서 내리자 출신과 소속을 가리지 않고 고개 숙여 경의를 표시했다. 로벨은 적당히 응한 후 휘하 기사들과 함께 성벽을 올랐다. 철컥. 철컥. 끼릭. 철컥. 서른두 개의 강철부츠가 계단을 밟자 요란도 했다.

“슈미츠 중대장.”

지켜보는 눈이 많아 별명 대신 직함을 불렀다. 발가락 슈미츠가 얼른 다가와 보고했다.

“제6시 경에 출몰해서 300야드 거리를 유지한 채 대기 중입니다.”

로벨은 태양을 한번 보고 잉그비아 왕국군을 한번 보았다. 지금껏 공격하지 않았으면 싸울 생각이 없는 것이다.

“잉그비아 왕국 깃발을 잘 알지 못해 어느 가문인지 모르겠으나 700명에서 800명으로 추정됩니다.”

로벨이 오기 전에 연습 좀 했는지 매끈하게 보고했다. 로벨은 리처드 2세 휘하의 여러 가문 깃발을 확인한 후 말했다.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수작일 수 있소. 다른 성문도 점검하시오. 본인이 모르는 암문이 있으면 그곳도 확인하시오.”

로벨의 지시에 검은 성 기사 몇 명이 사라졌다.

“저들은 어쩔까요?”

“우선 의도부터 확인해야지. 내 깃발을 가져와.”

300년 역사의 로드릭 가문 깃발이 가장 높은 곳에서 흔들렸다. 와서 가져가 보라는 도발 같기도 하고, 왕이 여기 있으니 할 말 있으면 하라는 제안 같기도 했다. 어느 쪽으로 받아들이든 반응이 있을 것이다. 과연 잉그비아 왕국군이 움직였다. 기사인지 기사 종자인지 말을 탄 한 사람이 어디론가 달려가고, 십수 명의 병사가 창날에 밀려 앞으로 나왔다.

“저게 뭐지? 포로인가?”

“아군 포로라고?”

로벨의 눈이 평소의 두 배로 커졌다. 순간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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