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화. 패배
로드릭 시티 늑대성에서 출발한 4천 8백 군사 중 1천 명이 뒤처지거나 단독 작전에 돌입해 3천 8백 명만 사트로 시티 검은 성에 입성했다.
지긋지긋한 봄비와 진저리나는 기습 탓에 낙오한 부대가 많지만, 지휘관이 심각한 길치가 아닌 이상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합류할 것이다.
“지금은 좀 곤란합니다.”
잉그비아 왕국군이 새까만 바다를 건너 턱 밑에 도달했다. 항만시설을 장악하려는 기습공격이 몇 차례 이어졌다.
적수를 잘못 만나 평가절하 당하지만, 전(前)그랜드 챔피언 볼프 사트로 후작은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 검은 성 북쪽 탑에 대포를 몰아넣고 수레바퀴보다 큰 것이 접근하면 즉시 가루로 만들었다.
“사트로 항이 북해안에서 손꼽히게 크다 해도, 서른 척의 범선이 동시에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포격전을 시도해도 절벽 위 고지대에 위치한 아군의 상대가 안 되지요.”
볼프 후작의 수행기사가 사트로 시티 지도를 가리키며 전황을 설명했다. 범선 비슷한 나무조각과 대포 비슷한 철조각을 배치해 그럴듯한 브리핑이 되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군.”
“예. 도시 밖에 상륙해서 양면 공격을 시도할 겁니다.”
이미 북해안 어딘가에 거점을 마련했을 거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수행기사가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공왕 폐하께서 하루만 늦었어도 못 뵈었을 겁니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농담이 아니었다. 검은 성의 병력으로 도시와 바다를 모두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검은 성에서 버티거나, 아예 검은 성도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로벨이 너무 늦지 않게 나타나 다행이었다.
“우선 수비에 치중해야겠군. 후작, 어찌 생각하시오?”
로벨의 시선이 맞은편을 향했다. 별거 아닌 제스처지만 원탁에 모인 기사와 용병이 모두 숨을 죽였다.
일생의 라이벌. 숙적이라 말하면 온화하고 원수라 부르면 어딘가 어색한 사이.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치면 객기라도 부려 볼 텐데, 절벽 끝에 매달려서 마주하니 얼굴 들기가 힘들었다.
“공왕의 말씀이 옳소.”
별거 아닌 제스처에 별거 아닌 호응이 돌아오자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로벨은 팔짱을 끼고 매끈한 턱을 만졌다. 희고 고운 얼굴에 거칠게 갈라진 가죽장갑이 이질적이었다.
“그럼 후작은 지금처럼 바다를 지키고, 본인이 육지를 책임지도록 하겠소.”
“그건 안 되오.”
절벽에 매달린 볼프 후작이 반박했다. 검은 성 기사들이 숨을 들이켰다. 볼프 후작은 주위를 힐끔 보고 애써 온화하게 말을 이었다.
“공왕의 기사들이 용맹하다 하나 낯선 곳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는 힘들 것이오. 시가지와 방어시설을 잘 아는 본인이 성벽을 지키겠소.”
시민의 안전과 신뢰를 맡길 수 없다는 자존심인지, 군사기밀을 공개하지 않으려는 경계심인지 모르지만, 그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그래도 후작의 병사로는 부족할 텐데...”
“공왕이 왔으니 시민들도 용기를 얻었을 것이오. 자원병을 모집하겠소.”
“그걸로 충분하겠소?”
볼프 후작은 영리하고 현실적이었다. 가진 것이 많은 시민은 겁이 많고, 가진 것이 없는 시민은 싸울 이유가 없었다. 하루 종일 호소해도 100명이나 모이면 다행일 것이다. 로벨은 꿀 먹은 볼프 후작을 위해 한발 양보했다.
“울프 용병단을 일부 빌려주겠소. 수비에 도움이 될 것이오.”
병사만 빌리는 거면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볼프 후작은 기껏 도우러 온 사람에게 요구가 많아 부끄러웠다.
“...관대한 배려에 감사하오.”
그래도 이 정도면 훈훈한 결말이었다. 피 튀기는 싸움은 내일 예약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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쒸이이이에...
차디찬 북해 파도에 그림자가 일렁였다. 먼 하늘에 갈매기 그림자 같기도 하고, 포식자를 피해 도망치는 날치 그림자 같기도 한데, 소리가 그렇지 않았다.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에 파문이 뒤따랐다.
콰과과광-! 콰광-!
범선 7척에서 뿜어낸 포탄이 무려 28발이었다. 대포가 부족해 7척밖에 무장하지 못한 건지, 항로가 좁아 7척밖에 동원하지 못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딱히 행운이란 생각은 안 들었다.
“이쪽으로 온다! 이쪽으로 온다!”
“전부 엎드려!”
바다에서 쏘는 대포가 정확하기는 힘들었다. 부두에 닿지 못하거나 지나쳐간 것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요행히 표적을 찾아간 몇 발이 끔찍한 피해를 만들었다. 수레로 만든 바리게이트가 박살나고, 옹기종기 모인 풋맨 3소대가 와르르 쓰러졌다. 일부는 파편을 뒤집어쓴 듯 피범벅이 되었다.
“푸르르릉...”
로벨은 뒷걸음치는 모닝스타를 진정시키고 우측 해안절벽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절벽 위 검은 성 포대를 보았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쏴!’ 성급하게 화를 낼 필요 없었다. 검은 성의 용병들이 남쪽에서 온 친구들을 대신해 답신을 보냈다. 콰앙- 콰아앙-!
화약연기가 구름처럼 솟아나고, 12발의 포탄이 잉그비아 왕국 함대로 날아갔다. 고정된 포대라 명중률이 쬐금 더 좋았다. 범선 한 척이 피격당해 파편을 뿜으며 기우뚱거렸다.
“우와아아아-!”
“끼야오옷!”
사트로 항에 포진한 울프 용병단 북군 외 1천 5백 군사가 환호했다. 로벨은 펄프 대장에게 눈짓하고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전투는 이제 시작이었다.
“보트가 접근합니다!”
“잉그비아 왕국군이 온다!”
대포와 화약이 발전했다지만, 아직은 창과 칼이 전쟁의 주역이었다. 적장을 사로잡고 깃발을 빼앗아야 진정한 승리였다. 잉그비아 왕국군은 진짜 승리를 탐내었다.
“크로스보우 준비.”
이른 아침부터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다. 파비스 사이사이로 쇠촉이 등장했다. 표적은 노를 저어 다가오는 14척의 상륙함이었다.
야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침묵이 깔렸다. 사격 거리에 들어왔지만 사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체에 납작 엎드려 방패를 세우고 있으니 지금 쏴 봐야 화살 낭비였다. 타이밍을 잡아야 했다.
“좀 더. 좀 더 기다려.”
애꾸눈이 방아쇠를 거듭 고쳐 쥐며 중얼거렸다. 첫 번째 보트가 해변에 닿았다. 용골이 썩은 생선과 조개껍질을 밀어냈다. 심장 소리가 물레방아 소리만큼 커졌다. 그리고 잠시 뒤,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아아와아앗!”
“돌격! 돌격!”
뱃전에 늘어선 방패가 치워지고, 수염이 잔뜩 난 해적들이 껑충껑충 뛰어내렸다. 애꾸눈 이하 크로스보우 중대는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열렬히 환영했다.
“쏴라!”
팡-! 팡-! 파앙-!
기계장치에 꿰여 U자로 구부러진 활대가 속박에서 벗어났다. 쇠심줄에 걸려 있는 참나무 막대가 반동에 휘말린 것은 별개 일이었다. 공기마찰로 뜨거워진 쇠촉이 바닷물에 젖은 두발짐승을 아프게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일련의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아무도 관심주지 않았다.
“크어억-!”
“컥!”
땅을 밟자마자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열쯤 되었다. 이만하면 섭섭지 않은 환영 인사였다.
“이 개자식들이!”
“뭐? 쳐들어온 쪽이 잘못이지!”
잉그비아 왕국군은 급히 방패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2차 사격은 없었다. 크로스보우 중대는 파비스 뒤에 숨고, 롱 스피어를 지참한 스피어맨 중대가 앞으로 나왔다. ‘정예’가 무엇인지 한눈에 알 수 있는 동작이었다.
“들어와. 들어와.”
“비, 빌어먹을...”
잉그비아 왕국군은 창벽에 밀려 조금씩 물러났다.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다. 아가미 호흡을 속성으로 배우지 않는 이상 끝이 있었다.
“이쪽은 됐고...”
로벨은 바이저를 내리고 시야를 넓혔다. 울프 용병단의 승리는 국지적인 승리였다. 사트로 항구는 용병 한 부대가 막기가 지나치게 넓었다. 부두를 피해 해안 곳곳에 상륙한 잉그비아 왕국군이 볼탄 반도 봉신들의 군대와 충돌했다. 숫적으로 유리한 곳도 있고, 무기와 경험에서 밀리는 곳도 있었다.
“켈트 경, 바이란 경, 동쪽을 지원하시오. 파도성은 잘 버티니 일단 두시오. 메튜 경, 헤르만 백작에게 자리를 지키라 전하시오. 적이 시내에 진입하게 놔둬서 안 되오.”
로벨의 지시에 예비대가 바쁘게 움직였다. 팔다리가 여러 개인 괴생명체가 생긴 것과 달리 기민하게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머리’의 운동신경이 유난히 좋은 탓이었다. 어린 집사가 알면 슬퍼하겠지만, 로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전쟁이 아직도 많았다.
검은 성에서 다시 대포를 쏘았다. 육상병력을 내린 탓에 후퇴도 못하는 잉그비아 왕국 함대는 맥없이 두들겨 맞았다. 잉그비아 왕국군 지휘관이 누군지 모르지만 속이 많이 쓰릴 것이다.
“이쪽은 되었고... 저쪽은 어떤지 모르겠네.”
로벨이 지키는 부두 뒤편, 검은 성 동문에서 시가지를 빙 둘러 서쪽 해안으로 이어진 도시 외벽에서도 혈투가 한창이었다. 울프 용병단 남군(南軍)과 사트로 가문과 휘하 봉신들이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남서쪽 탑! 대포! 대포입니다!”
수일 전에 상륙해서 무얼 준비했는지 알 수 있었다. 볼프 후작은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가 놓았다. 진정해서가 아니라 명령을 내려야하기 때문이었다.
“사트로 시티의 성벽은 무너지지 않는다! 겁먹지 마라! 자리를 지켜라!”
성벽은 어떤지 몰라도 성벽 위의 사람은 그리 튼튼하지 않았다. 잉그비아 왕국이 자랑하는 주철대포가 불을 토하자 임시로 설치한 호딩이 박살나고 그 안에 병사도 조각났다. 포탄에 맞아 조각난 건지 추락해서 조각난 건지 알기 힘들었다.
“움츠리지 마라! 철로 만든 대포는 오래 쏘지 못한다! 사다리! 사다리를 걷어내!”
볼프 후작은 여장 아래 웅크린 수비병을 손수 일으켜 세웠다. 잔인한 짓이었다. 세 번째 일으킨 수비병이 자세를 잡기도 전에 화살을 맞았다. 그것도 하필 눈구멍이었다. 볼프 후작은 뒤통수를 뚫고 나온 화살촉에 깜짝 놀라 물러났다. 역시 잉그비아 롱보우였다.
“제길...!”
어떤 명사수인지 찾을 필요 없었다. 볼프 후작을 노리고 쐈는데 재수 없는 수비병이 맞은 것뿐이다. 수행기사가 커다란 카이트 실드로 후작을 보호했다. 최고의 장인이 만든 갑옷이라도 안 좋은 곳에 맞으면 위험했다.
“적이 너무 많습니다! 무적무패 왕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공왕도 지금 전투 중이다! 우릴 도울 여력이 안 돼!”
그것은 무적무패 왕을 얕잡아 본 발언이다. 로벨은 승기를 잡자마자 여력이 있는 기사들을 빼내 볼프 후작에게 보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위태위태하던 남서쪽 탑이 잠잠해졌을 때였다. 볼프 후작은 못 보던 얼굴을 보고 당황해서 물었다.
“설마, 로벨 왕은 벌써 적을 격퇴한 것인가?”
항구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바티안 채플린 경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저쪽의 적은 공왕 폐하의 적수가 되지 못했소. 본인은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린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예의가 부족한 것이 로벨 휘하의 기사가 맞았다. 볼프 후작은 안도하는 동시에 분개했다.
‘사트로 시티는 승리했다. 그러나 기사 볼프 사트로는 또다시 패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