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09화 (509/605)

509화. 선방

봄비가 주적주적 내렸다.

파종이 끝난 농부에게는 덧없이 반가운 단비지만, 원정을 떠난 기사에게는 골치 아픈 재난이었다. 안 그래도 겨우내 쌓인 눈이 녹아 사방이 진창인데, 빗물까지 고여 1마일 갈 때마다 한 번씩 쉬어야 했다.

“밀어! 더 밀어!”

“니들이 당기라고! 당겨!”

로벨은 오늘만 세 번째 수렁에 빠진 마차를 보며 한숨 쉬었다. 진창만 문제가 아니었다. 비는 체온을 뺏어가고 병장기를 녹슬게 했다. 늑대도로를 벗어나자 하루 10마일도 전진하지 못했다.

“그래도 겨울보단 낫지 않습니까.”

아침저녁이 춥긴 하지만 동사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드레쯤 방치했다가 썩은 내가 나서 잘라내는 발가락이 없는 것만도 축복이었다.

“속도가 너무 느리오.”

로벨이 조그맣게 불만을 토로했다. 겨울보다 낫다고 가을만큼 즐겁지 않았다.

“북해를 건너는 것보단 빠를 겁니다.”

곤트 백작의 반란 때도 그랬지만, 로벨의 대응은 상식 이상으로 빠른 편이었다. 상시 동원 가능한 울프 용병단과 사전에 준비한 제후들 덕분이었다.

“검은 성이 호락호락한 곳도 아니니 하루나 이틀, 아니, 열흘이나 열하루쯤 늦어도 괜찮을 겁니다.”

정말 열흘 늦으면 전술적으로 문제가 큰데, 위로의 말이라 아무렇게나 던졌다.

“좋아! 빠졌다! 빠졌다!”

“뭐? 또 빠졌다고?”

“아니! 수렁에서 빠져나왔다고!”

용병들이 용을 써서 마침내 마차 바퀴를 빼냈다. 쿼럴을 작은 통나무에 담아 쌓은 짐마차로 비교적 가벼운 것이었다. 진흙투성이가 된 용병들은 동의하지 않겠으나 곡물자루나 지주(支柱)가 실린 마차가 빠졌으면 반나절 동안 꼼짝 못 했을 것이다.

“10분간 휴식하고 출발하자.”

“으아아... 감사합니다요.”

외팔이가 얼굴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며 진저리쳤다. 깨끗해지기는커녕 더욱 까매졌다.

로벨은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지만, 부득이한 경우가 종종 있어 딱히 장담하지는 않았다. 이번이 그러했다. 수통 마개를 열기도 전에 앞서간 과묵한 몬트가 ‘조랑말’을 몰고 돌아왔다.

“공왕 폐하! 맥기 남작이 습격을 받았습니다!”

“뭐? 맥기 경이?”

로벨 뒤를 바짝 쫓아온 켈트 경, 바이란 경, 메튜 경 등이 깜짝 놀라 다가왔다. 과묵한 몬트는 고귀한 기사님들 앞에서 말 타고 있기 거북해 일단 하마했다.

“잉그비아 왕국군이 벌써 여기까지 왔나?”

“그럴 리가 없잖소! 겁을 상실한 도적이나 겨울 나고 훼까닥 돌아버린 화전민이겠지!”

그 잠깐 사이 뭐가 정답이냐는 눈빛이 쏘아졌다. 숨 막히는 일이었다. 로벨은 외팔이에게 준 수통을 도로 빼앗아 과묵한 몬트에게 주고 숨 돌리기를 기다렸다.

“확실한 정보는 아닙니다만, 호수성 부대로 도망친 맥기 가문 병사가 칼을 든 쌍두 독수리 깃발을 보았다고 합니다.”

“쌍두 독수리...”

로벨 이하 늑대성 기사들은 최신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한 기사 가문 문장을 주르륵- 떠올렸다. 켈트 경이 가장 빨리 그림 찾기에 성공했다. 얼마 전에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곤트 가문의 문장이오.”

“그 늙은 백작은 항복한 게 아니었소?”

“잠깐! 곤트 가문의 상징은 칼이 아니라 방패요. 쌍두 독수리에 십자모양 방패. 칼은 가지고 있지 않소.”

“아, 기억났소. 곤트 가문의 방계인 킹스턴 가문 문장일 것이오. 잉그비아 쪽이지.”

“그쪽에 붙어먹은 놈들이 왜 이리 많아?!”

남의 가정사를 이야기해봐야 입만 아팠다. 로벨은 쓸모없어진 기사 가문 사전을 대뇌 깊은 곳에 도로 넣고 지리지를 꺼냈다.

“검은 성까지 얼마나 걸려?”

펄프 대장이 즉각 대답했다.

“지금 속도로 엿새가 걸립니다. 허나 뒤처진 부대가 합류하려면 그 두 배쯤 걸릴 겁니다.”

이 시대 군대가 원래 그렇지만, 한곳에 뭉쳐서 간격 유지하며 행군하지 않았다. 제각각 흩어져서 이동하다 보니 가장 먼 부대는 7~8마일쯤 떨어져 있기도 했다. 주기적으로 파발을 보내 경로를 확인하고 있으나, 파발도 사람이라 위치를 놓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며칠 씩 소식이 두절되었다.

“곤트 가문의 잔당이 활동하고 있으니 주의하라 전하시오.”

“그것도 길이 이 모양이라...”

빗물이 스며들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한 탓에 가도가 움푹움푹 주저앉았다. 말 달리기에 최악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연락해. 불필요한 희생을 줄여야지.”

기마 용병의 역할이 커졌다. 과묵한 몬트 이하 말을 가진 용병들이 사방으로 떠나갔다. 남은 용병도 쉴 틈이 없었다. 적의 존재가 확인된 이상 신속하게 안전지대를 확보하고 경계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검은 성까지 쉽게 쉽게 가나 했더만...”

“세상에 쉬운 일은 쉽다 생각하는 것 말고 없지.”

외팔이가 철학자 같은 소리를 하며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뚝뚝 떨어지는 진흙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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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성에 군영을 차리고 해안가에서 첫 전투를 치를 거란 예상이 보기좋게 빗나갔다. 군대의 집결은 로벨이 빨랐지만, 선공은 존 오브 곤트 공작이 가져갔다.

“근데 고작 저건가?”

흔히 선수필승, 선발제인, 선빵무적(?)이라 하지만, 그것도 최소한 넉 다운시킬 위력이 있을 때 이야기고, 체급 차이가 크면 가소로웠다.

로벨 휘하의 울프 용병단만 720명이고, 동행중인 호른 성, 바위성, 가시성, 늪지성 등의 군사를 합치면 약 900명이었다.

두 개의 나라와 후작 가문이 참전한 전쟁 규모에 비하면 대군이라 할 수 없지만, 시골의 일개 기사 가문이 대적할 병력이 아니었다. 실제 킹스턴 가문 병력은 영내 농민과 패잔병을 탈탈 털어 모았음에도 100명 남짓에 불과했다.

“저런 것들한테 당하다니, 맥기 경이 한심하군요.”

“방심하지 마시오. 대부분 이 지역 출신일 것이오.”

전시에 바리게이트 이하로 취급받는-적어도 바리게이트는 도망을 안 간다- 농민병이지만, 가끔 정예 용병단 이상으로 무서운 힘을 발휘할 때가 있었다. 고향 마을을 지키기 위해 수성할 때와 익숙한 지형에서 게릴라전을 펼칠 때였다. 여러 전장을 다니며 체험하고, 또 시도해 본 늑대성 기사들은 지역주민의 군사조직을 우습게보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에 좌우되는 집단이기도 하지. 초반에 기세를 꺾어야 하오.”

로벨은 킹스턴 경의 목적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잉그비아 왕국군이 사트로 시티 근방에 전초기지를 확보할 때까지 시간 끄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면 금방 도망가겠지.”

“지당하고 지당한 말씀입니다! 저런 허접 찌끄레기 잡놈들이 감히 무적무패 왕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제가 가서 궁둥이를 걷어 차주겠습니다!”

켈트 남작을 보좌하는 장남 켈트 경이 흉갑을 탕탕 치며 말했다. 주위 기사들이 ‘저거 왜 데려왔소?’ 힐책을 던지니 켈트 남작의 얼굴이 빨개졌다.

로벨은 바이저 이음새를 만지는 척하며 적군을 살폈다. 작년가을에 보리를 상대로 맹활약했을 대낫과 올봄에 얼어붙은 땅을 무자비하게 훈계했을 괭이가 주된 무기고, 천옷을 겹겹이 껴입거나 생가죽을 얼기설기 엮어 몸에 두른 것이 주된 갑옷이었다.

“크로스보우 중대 앞으로.”

로벨의 명령이 떨어지자 울프 용병단 제1중대가 앞으로 나왔다. 크기와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강철로 된 무구(武具)가 킹스턴 가문 오합지졸과 비교되지 않았다. 발을 맞춰서 도열하고, 거대한 크로스보우를 동시에 조준하는 광경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군집된 생물이 통일된 동작을 하면 실제 숫자보다 몇 배 더 많아보였다.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킹스턴 가문 병사들이 혼란에 빠졌다. 로벨은 호른 경 등에게 말했다.

“일제사격 후 돌격하시오. 깊이 추격할 필요 없소. 숲으로 도망가면 그냥 두고 돌아오시오.”

저지대가 늪이 되어 함정을 파기 좋았다. 꼭 함정이 아니어도, 저들의 의도대로 시간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사격 개시.”

“쏴랏! 쏴!”

이 백여 발의 쿼럴이 단단한 쇠뇌를 떠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북해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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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로벨의 짐작대로 일제사격 한방에 기겁해서 도주했다. 그 직후 호른 경 이하 늑대성 기사들이 뒤쫓아 창을 찔러주니 전투 시작 오 분 만에 스무 구 시체가 생겼다.

로벨도, 용병들도 싱거운 결과라 생각했다. 그러나 싱거운 스튜도 계속 먹으면 짜디짠 소금보다 괴로운 법이다. 킹스턴 경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군대를 모았으며, 실전에서 보기 드문 야습도 여러 번 시도했다.

“가랑비에도 옷이 젖는 법이오. 잔 주먹이 슬슬 아파질 때가 되었소.”

전력차이는 여전히 압도적이며, 전사자 비율도 1대 12로 일방적이었다. 그나마 몇 명 나온 전사자도 봉신의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공격할지 모르니 진지구축과 정찰, 경계에 많은 인원이 투입되었고, 그만큼 행군속도가 처참히 떨어졌다. 전투를 치른 날은 고작 7마일 전진했다.

“이렇게 된 거 킹스턴 가문 본거지를 박살내고 검은 성으로 가시죠!”

썩 괜찮은 의견이었다. 안 그래도 약탈을 못 해 근질근질한 기사들이었다. 자원하는 자가 대단히 많았다.

“호른 경, 울프 용병단 2개 소대를 빌려주겠소. 킹스턴 성을 불태우시오.”

“공왕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조나 켈트 경 등 일부 기사들은 호른 경을 너무 편애한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재미있는’ 역할을 맡은 호른 경은 내키지 않았다. 로벨을 곁에서 보좌하지 못하니 불안하고 불편했다. 로벨도 그걸 알고 호른 경을 지목했다.

“약탈은 최소한으로. 최대한 빨리 복귀하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로벨은 호른 경의 별동대가 떠난 후 검은 성으로 무작정 진격했다. 습격할 거면 습격하라는 도발이었다. 동시에 습격할 리 없다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피해가 큰 반(反)로드릭 세력은 근거지가 위협받자 순식간에 흩어졌다. 머리가 여러 개고 몸이 땅에 얽매인 봉건제 군대 한계였다. 그리고 마침내 검은 성에 도착했다.

로벨은 북해만을 끼고 둥글게 자리한 사트로 시티와 해안절벽을 타고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솟은 검은 성을 보았다. 예정보다 이레 늦었지만, 재난에 가까운 비와 지속적인 방해를 뚫고 큰 피해 없이 도착했으니 선방이었다.

“공왕 폐하, 저기를 보십시오.”

성벽 너머로 한없이 펼쳐진 북해 바다를 보는 순간 더욱 그리 생각했다. 잉그비아 왕국이 자랑하는 초대형 원양 범선-카락선이 서른 척 이상 떠 있었다.

“아슬아슬했군요.”

“호른 경 말대로 열흘 늦었으면 큰일 났겠어.”

당사자가 없으니 기사나 용병이나 피식피식- 웃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봉신들이 있으나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성문이 봉쇄되기 전에 들어가야 했다. 펄프 대장은 성 밖에 남겨질 호른 경과 일부 봉신들을 걱정했지만, 로벨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할 일이 있었다.

“진짜 전쟁이 시작됐어. 마음 단단히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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